손대봉이 말하였다. "나는 처음부터 유대부(劉大夫, 유전)를 좇았고 조서를 받들어서 군진(軍鎭)으로 오자 어떤 사람이 내가 반란하였다고 말하였지만 이공(李公, 이장용)이 군사를 일으켜서 유대부를 없앴는데 지금 또 이공이 반란하였다고 하오. 이와 같다면 누가 반란한 사람이 안 되겠으며 끝까지 남을 사람이 있겠소? 나는 차라리 죽게 되더라도 다른 사람이 죄를 짓지 아니한 것을 가지고 무고할 수는 없소." 드디어 그를 참수하였다.

무진일(13일)에 신라왕 김억(金?)이 들어와서 조현하면서 이어서 숙위(宿衛)하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가지는 논의를 하였다. "지금 경학을 시험 치는 사람은 첩자(帖子)에 정통하고, 문장을 시험 치는 사람은 성조(聲調)의 병통으로 시비를 가리니, 풍류는 퇴폐하여지므로 진실로 마땅히 고쳐야 합니다. 그러나 동진시대 이후로 사람들은 대부분 교우(僑寓)하여 선비로 향토에 살고 있는 사람은 백 가운데 한둘도 없으니, 청컨대 겸하여 학교를 넓히시고 상재(桑梓)를 지키는 사람은 향리에서 천거하게 하고, 유우(流寓)하는 사람은 상서(庠序, 학교)에서 천거하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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