겔너가 대체로 유럽과 이슬람 세계를 대상으로 민족주의의 본질을 구명(究明)했다면, 스미스는 유럽과 이슬람은 물론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 전 세계를 대상으로 민족/민족주의 문제를 넓게 그리고 깊이 파고들어간 인물이라고 비교해서 말할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이 두 사람은 최근의 민족주의 연구의 진정한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양자의 근본적인 입장은 서로 다르지만, 겔너가 없었다면 스미스가 없었을 것이고, 또 스미스가 없었다면 겔너의 위상이 지금보다 낮아졌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겔너에게 민족주의는 근대 산업사회의 문화이다. 즉 서구에서 그야말로 ‘기적’적으로 성공한 근대화가 마치 해일과도 같이 전 지구를 불균등하게 휩쓰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 민족주의이고, 그 민족주의의 핵심 내용은 근대 산업사회가 필요로 하는 언어문화(linguistic culture)로 설명된다. 겔너의 말을 직접 빌리자면, "민족주의는 근본적으로, 이전에는 저급문화들(low cultures)이 주민의 다수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주민 전체의 삶을 차지하고 있던 사회에 고급문화(a high culture)를 전반적으로 부과하는 것이다. 그것은 학교가 주선하고 국가교육기관이 감독하는 이디엄(Idiom, 언어)의 확산, 즉 상당히 정확한 관료제적·기술적 커뮤니케이션의 필요조건에 맞게 기호 체계화된 이디엄의 전반적인 확산을 의미한다. 그것은, 극소집단들에 의해 지역적으로 그리고 특이하게 재생산된 민속문화들(folk cultures)에 의해 지탱되던 지역집단들의 이전의 복잡한 구조 대신에, 무엇보다도 이런 종류의 공유된 문화에 의해 하나가 된, 서로 대체 가능한 원자화된 개인들로 구성된 익명의 비인격적 사회의 수립이다. 그것이 바로 실제로(really)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스미스에게 민족주의는 "근대적 이데올로기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하고 장기지속적인 이데올로기"이고, 그것은 "하나의 특유한 공동체를 위한 프로그램을 문화집단들에 대한 더 보편적인 비전과 결합시킨다."3) 즉 과거에 전통과 종교가 해오던 구원(salvation)의 길 가운데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길을 추구하는 것이 근대 이데올로기들이고 그 근대적 이데올로기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장기지속적인 것이 민족주의이다. 요컨대 스미스에게 민족주의는 과거에 전통과 종교가 해오던 일을 근대사회에서 하는 대행자로서, 하나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훨씬 넘어선 것이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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