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唐)이 일어난 이래로 변방의 장수들은 모두 충성이 두터운 이름난 신하들을 채용하였지만, 오랫동안 맡기지도 않았고 요령(遙領)하지도 않았으며, 겸하여 통솔하지 아니하게 하면서 공적과 명성이 뛰어난 사람은 왕왕 조정으로 들어와 재상이 되었다.
당시는 평안한 날이 오랫동안 이어져서 의론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중국(中國, 중원 지역)의 무기들을 녹일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이에 백성들 사이에서 무기를 차고 다니는 것을 금지하였고, 아들이나 동생이 무관이 되면 아버지와 형은 물리치고 같이 나란히 하지 않았다. 맹장(猛將)과 정병(精兵)들은 모두 서북쪽에 모여 있었고 중국에는 군사적인 준비가 없었다.
안서(安西) 사진(四鎭)절도사인 고선지(高仙芝)가 거짓으로 석국(石國, 중앙아시아 Tashkent)과 화약을 맺고는 병사를 이끌고 기습하여 왕과 부중(部衆)들을 사로잡아 돌아왔는데 그중에 늙고 약한 사람은 모두 살해하였다. 고선지는 성격이 탐욕스러워 슬슬(瑟瑟) 10여 곡(斛)과 5~6마리의 낙타로 실을 분량의 황금을 약탈하여 빼앗고 나머지 사람과 말 그리고 여러 가지의 물건도 그만큼이었는데 모두 그 집으로 들여갔다.
이로부터 안록산이 궁액(宮掖)에 드나드는 것을 금하지 아니하였으며 어떤 때는 양귀비와 더불어 마주하여 식사를 하고 어떤 때는 밤이 지나도 나가지 않아 자못 추한 소리가 밖에서 들려 왔으나 황상은 또한 의심하지 않았다.
고선지(高仙芝)가 석국(石國, 중앙아시아 Tashkent) 왕을 포로로 사로잡으면서, 석국의 왕자는 도망하여 여러 호족(胡族)들에게로 가서 고선지가 거짓으로 유혹하고 탐욕스러우며 포악스럽게 한 상황을 모두 알렸다. 여러 호족들이 모두 분노하여 몰래 대식(大食, 시리아 다마스쿠스 성)을 이끌고 함께 4진(鎭)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고선지가 이 소식을 듣고 번(蕃)과 한(漢)으로 구성된 3만의 무리를 이끌고 대식을 치고자 깊이 700여 리를 들어가니 항라사성(恒羅斯城, ?羅斯城, 중앙아시아 Dzhambul)에 이르러서 대식 사람들과 만났다. 서로 버티며 닷새 동안 지켰는데, 갈라록부(葛羅祿部, 중앙아시아 액이제사하 유역)의 병사가 반란을 일으켜 대식과 더불어 당의 군대를 협공(挾攻)하였으므로 고선지가 대패하여 사졸들은 죽어서 거의 없어졌고 남은 병사는 겨우 수천 명이었다.
이때에 중국은 강성하여 안원문(安遠門) 에서부터 서쪽 끝 당(唐)의 변경까지 1만2천 리(里)였는데, 여염(閭閻)집들이 서로 바라보이면서 뽕나무와 삼이 들판을 덮었으므로 천하에서 부유하고 살이 쪘다고 일컬어 진 곳으로 농우(?右)만한 곳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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