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 무혜비(武惠妃)가 사망하자 황상이 슬퍼하며 생각하기를 그치지 않았고 후궁이 수천이었으나 뜻에 해당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수왕(壽王, 무혜비의 소생 李瑁)의 비(妃)인 양(楊)씨의 아름다움은 세상에 둘도 없다고 하였다. 황상이 그를 보고서 기뻐하며 이내 비(妃)로 하여금 자신의 뜻으로 여관(女官)이 되게 해달라고 청하도록 하였고, 이름을 태진(太眞)으로 하도록 하였다. 다시 수왕을 위하여 좌위(左衛)랑장 위소훈(韋昭訓)의 딸을 맞게 하였다.

몰래 태진을 궁 안으로 들였다. 태진은 피부가 살이 찌고 자태가 요염하였으며, 음율(音律)을 알고 품성이 조심스러우면서도 빼어나 황상의 뜻을 잘 받들며 맞아들였으므로 한 해가 지나지 않아 총애하여 대우하기를 무혜비와 같이 하니, 궁 안에서 부르기를, ‘낭자(娘子)’라고 하며 모든 의례는 모두 황후처럼 하였다.

황상이 조용히 고력사(高力士)에게 말하였다. "짐이 장안(長安)을 나가지 않은 지가 10년이 되는데도 천하에 아무 일이 없으니, 짐은 높은 곳에 머물며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모든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이림보에게 맡기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대답하였다."천자가 순수(巡狩)하시는 것은 예부터 있어 온 제도 입니다. 또 천하의 대권(大權)은 다른 사람에게 빌려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의 위세가 이미 이루어지고 나면 누가 감히 다시 그를 논의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황상이 기뻐하지 않았다. 고력사는 머리를 조아리며 스스로 말하였다. "신(臣)이 정신병이 들어 망령된 말을 하였으니 마땅히 죽을죄를 졌습니다."

황상이 이내 고력사를 위하여 술자리를 베풀자 좌우(左右)에서 모두 만세를 불렀다. 고력사는 이로부터 감히 천하의 일을 깊이 말하지 아니하였다.

옛날의 제도에 의하면 변경을 지키는 사람은 그의 조용(租庸)을 면제해 주고, 6년이 지나면 바꾸었다. 당시 변방의 장군들은 패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사졸 가운데 죽은 사람들을 모두 보고를 하지 않고 관적(貫籍)에서 없애지 않았다.

왕홍의 뜻은 거두어들이는데 있었으므로 호적에는 있으나 실제 사람이 없는 경우에 모두 과세를 피하였지만 호적을 조사하여 변방에서 수자리 선 6년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 조용(租庸)을 징수하니 합쳐서 30년분의 세금을 낸 사람이 있었지만 백성들은 하소연할 데가 없었다.

양귀비가 바야흐로 총애를 받아 매번 말을 타게 되면 고력사(高力士)가 말고삐를 잡고 말채찍을 주었는데, 수(繡)를 놓는 공인(工人)으로 오로지 귀비원(貴妃院)에게 이바지 하는 사람만 700명이었고 안팎에서 다투어 그릇과 의복과 진귀한 노리개를 올렸다.

애초에, 장군 고선지(高仙芝)는 본래 고려(高麗, 고구려) 사람으로 안서(安西, 신강성 고차현)에서 군대에 복무하였다. 고선지는 날래고 용감하고 말 위에서 활을 잘 쏘아 절도사 부몽령찰(夫蒙靈?)이 누차 천거하여 안서(安西) 부도호·도지병마사(都知兵馬使)에 이르렀고, 4진(鎭)절도부사(節度副使)로 충임하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