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해에 흑수말갈(黑水靺鞨)이 사신을 파견하여 들어와서 알현하였는데, 황상이 그 나라를 흑수주(黑水州)로 삼고, 이어서 장사(長史)를 설치하여 그곳을 진수(鎭守)하도록 하였다. 발해의 말갈왕 대무예(大武藝, 발해의 제2대 武王)가 말하였다. "흑수(黑水)가 당(唐)에 들어간다면, 그 길은 우리의 경역(境域)을 거쳐야 한다. 이전에는 그들이 돌굴에게 토둔(吐屯)을 요청하면서 먼저 우리에게 알리고 우리와 함께 갔는데, 지금은 우리에게 알리지도 않고 당에게 관리[長史]를 요청하니, 이는 반드시 당과 담합하여 모의하여 앞뒤로 우리를 공격하려는 것이다." 그는 친동생 대문예(大門藝)와 장인 임아(任雅)를 파견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흑수를 쳤다.
이제 명황(明皇, 현종)은 위세를 가지고 대무예를 복종시킬 수도 없게 되고, 은혜를 가지고 대문예를 감쌀 수도 없게 되었으니, 돌이켜보건대 소인들이 하는 거짓말을 본받다가 작은 나라에게 곤욕을 당하였으며, 마침내는 홍려시(鴻?寺)에서 누설한 것을 죄를 주니, 역시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릇 변경에서 생기는 일이란 곧 장교와 관리들이 인연으로써 관부의 물품을 훔치고 숨기고는 거짓으로 공장(功狀, 공적부)을 써서 훈작을 얻는 것으로, 이것들은 모두 간사한 신하들이 취하는 이득일 뿐 국가의 복은 될 수 없습니다.
하늘과 땅을 경위(經緯)하는 것은 ‘문(文)’이라 하고, 화란을 감정(戡定)하는 것은 ‘무(武)’라고 하는데, 옛날부터 이 두 가지를 함께 갖추지 않고서 ‘성인’이라 불렸던 사람은 아직까지는 없습니다.
사람이 태어난 이래 공자와 같은 이가 아직까지 없었는데, 어찌 태공이 공자와 대립되어지거나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옛날에 발동할 일이 생기면, 대사도(大司徒)에게 명령하여 병사들에게 전차와 갑옷을 입는 법을 가르치고, 옷을 걷어서 넓적다리와 팔뚝을 드러내고 활쏘기와 말 타기로 승부를 결정짓고, 받아들여 완성하고, 수급(首級)을 베어 바치는 것을 가르치게 하였으니, 배우는데 있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된 까닭은 교육에서는 예절과 의리를 우선하고 용기와 역량은 뒤에 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발해말갈(勃海靺鞨)왕 대무예(大武藝, 武王)가 그 장군인 장문휴(張文休)를 파견하여 해적을 인솔하고 와서 등주(登州, 치소는 산동성 蓬萊市)를 노략질하고 자사 위준(韋俊)을 살해하니, 황상은 우령군(右領軍)장군 갈복순(葛福順)에게 명령하여 군대를 발동하여 그들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천하의 호구(戶口)의 수는 786만 1천236호이었고, 인구수는 4천 543만 1천265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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