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섬진강 푸른 물에 넋을 버린 여자, 그 여자를 중생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혜관. 괴물 같은 혜관의 마음속에 엷은 한 같은 것이 솟는다. 최서희의 일행이 간도로 떠난 후 홀로 남아서 절로 은신해 왔었던 꽃다운 처녀 봉순, 절 마당을 왔다갔다 하던 그 자태에 젋은 사미승들은 오뇌의 밤을 보내야 했었고 중년이던 혜관마저 남모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후 봉순이는 기화가 되었고 노류장화, 그러나 출가한 중에게는 여전히 꺾지 못할 벼랑의 꽃이었다. _ 박경리, <토지 12> , p159/692


 <토지 독서챌린지> 23주차. 다음 주면 2021년 독서챌린지 마지막 차수가 될 듯하다.(마지막 주는 방학이다!). 전체 여정의 60%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이번 주 읽은 내용을 정리해 본다. <토지 12>의 첫 부분에서는 봉선(기화)의 죽음을 떠올리는 혜관, 언쟁을 벌이는 상현 그리고 일본에서 돌아온 아들 환국과 어머니 서희의 이야기 등이 보여진다. 서로 다른 공간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등장인물들의 이야기 속에서 개인적으로 여러 생각들을 떠올리게 된다. 


 먼저 혜관 스님. 혜관은 봉선의 죽음을 듣고, 지난날 봉선에 대한 추억을 떠올린다. 출가인(出家人)으로서 가져서는 안되는 여인에 대한 흔들리는 마음. 정진하는 수도자에게 그런 마음은 마구니의 유혹이었겠지만, 봉선(기화)은 중년의 스님에게 마구니의 유혹이 아닌 꺾을 수 없는 벼랑의 끝꽃으로 자리하고 기억된다. 혜관에게 봉선은 유혹이 아닌 사랑이었을까. 여기서 '벼랑의 끝꽃'과 관련하여 <헌화가>의 노인을 떠올리게 된다. 


 성덕왕 때 순전공(純貞公)이 강릉태수로 부임하다가 바닷가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곁에는 석벽이 병풍처럼 바다를 둘렀는데, 높이가 천 길이나 되었다. 그 위에는 철쭉꽃이 활짝 피어 있었는데, 공의 부인 수로(水路)가 그것을 보고 좌우에게 말했다.  "누가 저 꽃을 꺾어 바치겠느냐?" 종자가 말했다. "사람의 발자취가 이를 수 없는 곳입니다." 모두들 할 수 없다고 사양했다. 마침 곁에 한 늙은이가 암소를 몰고 지나가다 부인의 말을 듣고는 그 꽃을 꺾었다. 그러고는 가사도 지어 (함께) 바쳤다... 노인의 <헌화가 獻花歌>는 이러했다.


 자줏빛 바위 가에 

 잡고 있는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_ 일 연, <삼국유사> , p152


 <토지>에서 중년의 혜관 스님이 벼랑의 꽃을 꺾을 수 없었다면, <헌화가>의 노인은 아름다운 수로 부인을 위해 암소를 잠시 내려 놓고 벼랑 끝의 꽃을 꺾어 바친다. 혜관 스님이 수행자의 마음을 내려놓을 수 없었기에 꽃을 꺾을 수 없었다면, 노인은 자신의 소중한 암소를 잠시 놓았기에 꽃을 꺾을 수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혜관 스님이 내려 놓지 못한 것과 노인의 암소는 번민이었을까, 미련이었을까. 혜관에게 봉선은, 노인에게 수로 부인은 사랑이었을까, 자신의 길을 가지 못하게 하는 장애였을까. 혜관 스님과 노인의 경우를 여러 면에서 비교하게 된다.

 

 혜관 스님과는 달리 아직 봉선의 죽음 소식을 채 듣기 전 상현은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하고 주변인들과 끊임없이 부딪힌다. 송장환과의 대화에서 나온 이광수(李光洙, 1892 ~ 1950)의 <민족개조론> 이야기는 잠시 언급되지만, 1919년 3.1항쟁 실패 이후 방황하는 지식인과 이들의 사상전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시선을 두게 된다.


 이광수가 <민족개조론>이다 뭐다 하고 시시한 것을 발표하는 이유는, 그가 어째서 한때 영웅이 되었는가 그것을 누구보다 그 자신이 잘 알지. 그의 문학과 그의 반일 사상 그 두 가지가 합친 때문이라는 걸. 그 야심가, 명성에의 노예는 양자 중에 보다 유리한 것을 택하였고 그러고도 연연하여 자기 문학에다 애매모호한 것을 풀칠해서 붙이고 있는 거야. 두 가지를 다 갖고 싶겠지만 두 가지를 다 잃는 결과는 아니될지. 그는 약한 사람 같다. 두 가지를 다 해낼 뜨거운 피, 강인한 의지가 없었을 게야. 글은 칼이 될 수 있는 거고 꽃도 될 수 있는 건데 칼은 무디어졌고 꽃은 종이꽃이 되고, 그래서 괴상망칙한 <민족개조론> 같은 것도 튀어나오게 된 거지. _ 박경리, <토지 12> , p251/590


  양주동(梁柱東, 1903 ~ 1977) 교수가 '우리나라가 가진 재주가 10이라 했을 때 이광수가 가진 재주가 6'이라는 말을 할 정도로 뛰어난 천재 이광수. 그는 2.8 독립선언서를 작성했지만, 이후 <민족개조론>을 통해 우리 민족의 한계를 지적하며 전향을 한다.  본문에서 그는 민족의 성격을 근본적인 부분과 부속적인 부분으로 나누고, 그 중에서도 부속적인 면에 대한 대대적인 개조를 통해 새롭게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춘원(春園)은 민족의 각성을 위해 소수 엘리트의 깨우침을 강조한다.


 

 조선민족은 적어도 과거 오백 년간은 공상과 공론의 민족이었습니다. 그 증거는 오백 년 민족생활에 아무것도 남겨 놓은 것이 없음을 보아 알 것이다. 과학을 남겼나, 부를 남겼나, 철학, 문학, 예술을 남겼나, 무슨 자랑 될 만한 건축을 남겼나, 또 영토를 남겼나, 그들의 생활의 결과에는 남은 것이 하나도 없고 오직 송충이 모양으로 산의 삼림을 모두 벗겨 먹고, 하천의 물을 말끔 들이마시고 탕자(蕩子) 모양으로 선대(先代)의 정신적, 물질적 유산을 다 팔아먹었을 뿐이다. _ 이광수, <민족개조론> , p78/100


 이렇게 직업을 사랑하고 그것을 위하여 근면함으로 주색에 빠지거나 잡담, 장기와 바둑(博奕)을 즐길 새는 업지마는, 그에게는 향기로운 가정의 즐거움과 문학, 예술, 혹은 종교나 철학을 즐기며, 혹은 순결한 교우의 즐거움과 동지의 모임의 즐거움을 가진다. 그러고 그는 일정한 운동으로 건강과 용기와 쾌락을 얻는다. 그는 국가에 대하여서는 모든 의무를 다하는 국민이다. 그의 삼가는 모든 단체에 대하여는 충실한 회원이다. 그러므로 그는 혹은 체면에 끌려 혹은 군중심리에 끌려 용이하게 무슨 허락을 하지 않지만, 한번 허락한 이상 그는 결코 변함이 없다. 그는 위인이 아닐는지는 모르나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다. _ 이광수, <민족개조론> , p82/100


 

 그렇다면, <민족개조론>의 문제는 무엇일까. 마치 플라톤의 <국가> 또는 스파르타의 정체를 떠올리게 하는 그의 엘리트 이론의 전제는 '인물'과 '금전'이다. 신교육을 통해 인물을 양성하고 자금을 통해 투자가 필요하다는 이광수의 주장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독립적'이 아닌 일본의 힘에 '의존적'이 될 수밖에 없게 된다. 본인은 이 길이 가장 빠르게 근대화되는 길이라는 것을 강조하지만, 그것은 결국 일본제국 내에서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자는 내선일체론(內鮮一體論)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민족개조론> 속에서 1920년대 이후 지식인들의 사상 전향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음을 느끼게 된다.


 내가 보기에 우리 민족에 결핍한 것은 사상이기보다 실행이니 우리가 아는 것만이라도 실행만 하면 살 수가 있으리라 하다. 가령 거짓이 없어야 한다. 부지런해야 한다. 학술이나 기예(技藝)를 배워야 한다. 그래서 누구나 한 가지 직업을 가져야 한다. 교육과 산업을 발달시켜야 한다. 이런 것은 누구나 다 알만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할 일은 그대로 실행함이다. _ 이광수, <민족개조론> , p88/100


 다른 한편, 일본에 유학갔던 환국은 어머니와 함께 진주로 내려간다. 그 전에 감옥에 갇힌 아버지 길상을 만나고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생각하는 환국. 환국의 생각 속에서 우리는 아들과 아버지, 아들과 어머니의 관계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로 정리한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 ~ 1939) 이론을 떠올리게 된다.


 남자아이의 경우는 다음과 같이 기술될 수 있을 것이다. 매우 어린 나이에 그 작은 남자아이는 어머니에 대한 대상 리비도 집중을 개발시키는데, 그것은 원래 어머니의 젖과 관련되어 있고 의존 Anlehnung 유형에 의한 대상 선택의 원형이 된다. 이 아이는 자기 자신을 아버지와 동일시함으로써 아버지 문제를 처리한다. 일정 기간 동안 이 두 관계가 나란히 지속되다가 이 아이의 어머니에 대한 성적 욕망이 더 강렬하게 되고 아버지는 그 욕망에 대한 장애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여기에서부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발생한다. 그렇게 되면 그의 아버지와의 동일시는 적대적인 색채를 띠게 되고,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 그를 제거하려는 욕망으로 바뀐다. 그 후부터 자식과 아버지와의 관계는 양가적이다. 그것은 마치 처음부터 동일시 속에 내재되어 있던 양가성이 명시적으로 드러난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에 대한 양가적인 태도와 어머니에 대한 애정 일변도의 대상 관계는 남자아이에게 있어서 단순한 긍정적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내용을 형성한다. _ 지크문트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 p247/460


 유명한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을 아들과 아버지를 경쟁자로, 그리고 억압의 구조 속에서 제도에 대한 복종을 말하며 이를 발전시켜 의식-무의식 구도를 형성한다. 이런 면에서 '아들 - 아버지', '아들 - 어머니'의 관계 설정은 프로이트 이론의 대전제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아버지 존재의 각인이 반드시 어머니를 사이에 둔 대립 구도 속에서 형성될 것인가? <토지>의 환국은 그렇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절대적인 존재, 환국의 마음속에서의 아버지는 절대적인 존재다. 독립투사로서의 아버지가 아닌 아버지, 아버지라는 존재 그 자체가 환국에게는 절대적인 것이다. 그것은 핏줄의 부름이며 어릴 적에 뇌리에 박혀버린 그 모습, 그 음성이 절대적인 것이다. 그것들은 세월과 더불어 한층 강하게, 굳게 각인된 것처럼 마음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_ 박경리, <토지 12> , p305/692

 

 아들에게 아버지는 자유의사에 반하는 그 모든 사회적 강제를 구현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의지에 따라 행동하려는 통로를 막아버리고 너무 빨리 성적 쾌락에 빠져다는 것을 금지하며, 가족 간의 공동 재산이 있을 경우 그것을 누리는 것을 억압합니다. 아버지가 죽기만을 엿보는 이와 같은 심리는, 그러므로 황태자의 경우에 비극으로까지 치달을 만큼 엄청난 정도로 발전합니다. _ 지그문트 프로이트, <정신분석 강의> , p207/518


 아들 환국에게 한없이 커보이는 절대적인 존재로 비춰지는 아버지 길상. 그렇지만, 아버지 길상은 성장기의 환국에게는 멀리 떨어진 그리운 존재였다. 환국의 의지를 강제하는 위치에 있지 않았던 길상이 강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도 절대적인 존재로 아들의 의식 속에 자리하는 것은 프로이트의 이론으로는 설명되기 어렵다. 그것은 성(性)욕구로 의식-무의식을 설명하려는 프로이트 도식의 한계를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마찬가지로, 아버지가 없는 상태에서 어머니와 아들이 겪어야 했던 공포와 공포로 인해 가졌던 동질감 또한 어머니에 대한 성적인 욕구가 아닌 가족애의 모습이라는 점에서 모든 것을 리비도(Libido)로 설명하려는 프로이트 이론의 한계를 생각하게 된다.


 서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결코 흐트러진 모습을 남에게 보이지 않았으며 약해지는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지 않던 그였으나 자신이 병드는 것을 두려워했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공포에 떠는 것이었다. 아이들을 두고 죽을 수 없다, 절대로 죽을 수 없다고 외쳐대는 것 같았다. 서희와 환국이는 필사적으로 그런 공포를 엄폐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아들은 어머니에게 태연했다. 그러나 다 같이 상대가 자신의 마음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_ 박경리, <토지 12> , p327/692


 차창 밖에는 싱그럽고 짙푸른 수전(水田)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논둑에 흰 새 한 마리 하늘을 우러러 보며 그림같이 서 있다. 순간 환국이는 그 흰 새 한 마리가 어머니의 모습같이 생각되는 것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수전에 머문 흰 새 한 마리.(p306)... 푸른 수전과 흰 새 한 마리, 눈물의 응결 같은 푸른 보석과 어머니의 하얀 모시옷. 환국은 눈길을 들어 차창 밖을 내다본다. 손안에 물이 흘러버리듯 만남의 그 격렬한 시간은 가고 없다. 차창 밖의 시시각각 날아가 버리는 연변 풍경 같은 것인가. _ 박경리, <토지 12> , p307/692


 어쩌면 프로이트 이론은 근친상간의 이야기가 점철된 헬라(그리스) 문명과 히브리 문명권에는 적절한 설명이 될런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히브리-헬레니즘 이외 문명권에서 모든 심리문제의 근원을 리비도(성충동)로 밝히려는 프로이트 이론이 공감받기 어려운 것은 아닌가를 생각하게 된다. 동시에, 이러한 도식으로 심리와 문화를 해석하려는 작업이 얼마나 무리한 것인지도 차창을 바라보는 환국의 모습을 지켜보며 떠올린다...


 다소 두서없는 내용의 페이퍼가 되버렸지만, 이번 주 독서챌린지는 매일의 독서가 서로 다른 자극을 준 매우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시대의 역사물이면서도 인물들의 마음과 심장소리가 느껴지고, 그와 함께 시대의 큰 변화도 함께 느낄 수 있었던 한 주간의 독서가 아니었나 싶다...


 PS. <토지>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불안한 인물은 상현이다. 작품 내에서 '고뇌하는 지식인' 캐릭터를 맡고 있는 상현은 매 권마다 술에 취해 다른 이들과 언쟁을 벌이는데, 절대로 아무렇게나 말하질 않는다. 나름 당대 지식인들의 사상과 저서를 언급하면서 평을 하는데, 그 내용을 따라가기가 참 쉽지 않다. 대표적으로 이렇게 놓친 인물이 양계초(梁啓超, 1873 ~ 1929)다. 양계초의 <신민설 新民說>도 <토지> 초반부에 언급되어 내용을 정리하던 중 빠르게 장면이 전환되어 결국 중반이 넘어서도록 페이퍼에 올리질 못했다. 이런 책들이 적지 않은 것을 보면 상현이 주사(酒邪)처럼 읊조리는 책과 사상만 정리해도 어느정도 시대 분위기는 파악하지 않을까 싶다. 놓친 부분들에 대해서는 별도의 리뷰로 정리할 계획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