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태종은 천하라는 큰 그릇을 그가 아끼는 사람에게 사사로이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화란(禍亂)의 근원을 막았으니, 멀리를 꾀하였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9월 경진일(4일)에 신라(新羅)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백제(百濟)가 그 나라의 40여 개 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다시 고려(高麗, 고구려)와 군사연합을 하겠다.’고 말하여서 신라 사람들이 들어와서 조현(朝見)하는 길을 끊으려고 모의하였다고 말하고, 군사로 구원해 달라고 빌었다.
상리현장(相里玄?)이 평양(平壤)에 이르렀는데, 막리지(莫離支)는 이미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쳐서 그 두 개의 성을 깨뜨렸지만 고려왕의 사자가 그를 부르니 마침내 돌아왔다. 상리현장이 신라를 공격하지 말게 하려고 타일렀더니, 막리지가 말하였다. "옛날에 수(隋) 사람들이 들어와서 노략질하자 신라가 틈을 타고서 우리의 땅 500리를 침략하였는데, 스스로 우리에게 침략하였던 땅을 돌려주지 않으니 아마도 군사조치는 그칠 수 없을 것이오." 상리현장이 말하였다. "이미 지나간 일인데 어찌하여 추후에 논란을 한단 말이오? 요동(遼東)에 있는 여러 성의 경우에 본래 모두 중국의 군현(郡縣)들이지만 중국에서도 오히려 또한 말을 하지 않는데 고려가 어찌하여 반드시 옛날 땅을 요구한단 말이오." 막리지는 끝내 좇지 않았다.
여름, 4월 초하루 무술일에 이세적은 통정(通定, 요녕서 신민시 동쪽)에서 요수(遼水)를 건너서 현토(玄?)에 이르렀다. 고려에서는 크게 놀라서 성읍(城邑)에서 모두 문을 닫고 스스로 지켰다.
정해일(9일)에 태상승(太常丞) 등소가 고려(高麗, 고구려)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회원진(懷遠鎭, 요녕성 요중현)에 수(戍)자리를 서는 병사를 늘려서 고려를 압박할 것을 요청하였더니, 황상이 말하였다. " ‘멀리 있는 사람이 복종하지 않으면 문덕(文德)을 닦아서 그들을 오게 하여야 하는 것’인데, 아직은 100~200명의 수자리 서는 병사가 떨어진 지역에 있는 사람에게 위엄을 보일 수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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