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일(16일)에 백제(百濟)에서 사람이 와서 그의 왕인 부여장(扶餘璋)의 상사(喪事)를 알리니, 사신을 파견하여 그의 사자(嗣子, 후계자)인 아들 부여의자(扶餘義慈)에게 책명(冊命)을 주게 하였다.

황상이 위징에게 물었다. "최근에 조회에 나오는 신하들이 어찌하여 특별히 사건을 평론하지 않는가?"
대답하였다. "폐하께서 마음을 비우시고 받아들이신다면 반드시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무릇 신하들 가운데는 나라를 위하여 죽으려는 사람이 적고, 자기 몸을 아끼는 사람이 많으니, 저들은 죄 지을까 두려워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말을 아니 할 뿐입니다."

정사일(5일)에 영주(營州)도독 장검(張儉)이 주문을 올려서 고려(高麗, 고구려)의 동부대인(東部大人)인 천개소문(泉蓋蘇文)이 그의 왕인 고무(高武)를 시해하였다고 하였다.

황상이 위징을 생각하는 것이 그치지 않아서 시중을 드는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사람은 구리를 가지고 거울을 만들어서 의관(衣冠)을 올바르게 하는데, 옛것을 거울로 삼는다면 흥망을 볼 수 있고,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잘잘못을 알 수 있는데, 위징이 죽으니, 짐은 한 개의 거울을 잃었도다."

황상이 직방랑중(職方郞中) 진대덕(陳大德)을 파견하여 고려(高麗)35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8월 기해일(10일)에 고려에서부터 돌아왔다. 진대덕이 처음에 그들의 경계로 들어가서 산천과 풍속을 알고자 하여 도착하는 성읍마다 그 지키는 사람에게 능기(綾綺)36를 주면서 말하였다.

"나는 본디 산수(山水)를 아주 좋아하니 이곳에 명승지가 있으면 내가 이를 보고 싶소."

지키던 사람은 기뻐하며 그를 이끌고 돌아다녀서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왕왕 중국인들을 만나자, 그들은 스스로 말하였다.

"집은 어느 어느 군에 있었는데 수(隋) 말년에 군대에 나왔다37가 고려에 몰입되었으며, 고려에서는 떠돌아다니는 여자를 처로 삼게 하였으며, 고려 사람들과 섞여 사는데 거의 반이 될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