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멩이가 날아왔다. 그것이 신호인 양 두 번째 세 번째 돌멩이가 날아왔다... 바로 대놓고 때릴 수 없는 젊은 사람, 아낙들에게 돌은 참 편리한 것이다. 누가 던졌는지 알 수 없는 돌멩이는 그 수가 많을수록 군중의 심리를 폭력으로 이끄는 데는 안성맞춤이다. 삽시간에 돌멩이는 우박이 되어 봉기한테 쏟아진다. _ 박경리, <토지 11> , p149/560
<토지 11>에서는 삼수에게 겁탈당한 딸 두리를 위해 복동네가 삼수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헛소문을 퍼뜨린 봉기 이야기가 나온다. 봉기는 석이의 설득으로 동네 사람들 앞에서 사실을 털어놓지만, 그는 자신의 고백으로 인해 주변의 수많은 군중으로부터 무수한 돌멩이 세례를 받으며 피범벅이 되고 만다. 개인으로서 주변인들은 죄를 저질렀다고는 하나 나이 많은 어른인 봉기를 직접적으로 단죄하기는 어려웠으리라. 그렇지만, 자신의 익명성이 보장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집단의 익명성 뒤에 숨어서 날아든 돌 하나. 그것이 신호가 되어 수많은 개인들은 자신의 감정을 과감하게 표현하는 장면이 작품 속에 표현된다. 그리고, 작가는 이 장의 제목을 '군중심리'라 이름짓는다. 이에 대해, 귀스타브 르 봉 (Gustave Le Bon,1841 ~ 1931)의 <군중심리 Psychologie des Foules>를 연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껏이다. 여기서 르 봉이 바라본 군중의 속성을 살펴보자.
'군중'이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국적과 직업, 성별을 불문하고, 또한 그들이 어떤 우연한 계기로 모였든지 상관없이 어떤 개인들의 집합을 의미한다.(p42)... 군중이 드러내는 감정의 과격함은 책임감의 부재로 한층 더 과장되며, 이질적인 군중은 특히 그렇다. 군중은 고립된 개인은 할 수 없는 감정 표현과 행동을 할 수 있다. 군중은 숫자가 많으므로 무사하리라는 확신과 인원이 많으니 일시적이나마 강력한 힘을 갖게 되었다는 생각 덕분이다. 어리석고 무지하고 시기심 많은 개인이 군중을 이루면 자신이 무가치하고 무기력하다는 감정에서 해방되어 일시적이지만 엄청난 힘을 갑작스레 갖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_ 귀스타브 르 봉, <군중심리>, p91/472
르 봉이 바라보는 '군중'은 비합리적인 집단이다. 외적 충동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매우 불안정한 존재로서 과잉된 감정을 단순하게 표현하는 집단. 이 안의 구성원들은 맹목적으로 휩쓸려가기 쉬우며, 이러한 개인이 모여 매우 단순하면서도 극단적인 집단의 성격이 표출된다는 것을 르 봉이 <군중심리>에서 설명한다. 르 봉의 이러한 주장을 학인한 후 <토지 11>의 상황을 돌아가보면, 봉기의 거짓말에 대한 군중의 분노가 돌팔매로 표현되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와 비슷한 장면을 <토지 10>에서 이미 본 적이 있었고, 이와 다른 대중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두 청년이 달려든다. 간부(姦夫)와 간부(姦婦)를 치는 것은 누구에게도 거리낄 것이 없는 불문율이다. 홍이와 장이는 비참하게 맞았다. 그러나 육신의 아픔이 무엇인가. 반죽음이 될 만큼 코피가 쏟아져서 낭자한데 중늙은 여자는 또다시 명령을 내렸다. "징거가 있어야 한다. 야아들아! 그 쪽문 열고오, 이웃 사람들 들어와 구겡하라 캐라! 간통한 연놈들 얼굴을 똑똑히 구겡하라 캐라!" 문이 열렸다. 우르르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제각기 한마디씩 했다... 낄낄낄 웃는 소리... 사내들의 음탕한 웃음소리... 동정의 소리도 있다. __ 박경리, <토지 10> , p622/682
<토지 10>에서 홍이와 장이의 불륜을 바라보는 군중(구경꾼)의 대응은 봉기의 경우와는 사뭇 다르다. 봉기는 자신의 거짓말로 인해 거의 반죽음을 당할 뻔하였지만, 간통현장을 들킨 홍이와 장이는 장이의 친척들의 폭력에 노출되었을 뿐 군중의 폭력으로부터는 안전할 수 있었다. 비웃음으로부터는 자유롭지 못했지만. 이들 두 사건에 대한 군중의 대응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설명 또한 르 봉의 <군중심리>에서 찾아본다.
배심원들은 언젠가는 자신들도 피해를 볼 가능성이 있는 범죄들[특히 사회에 위협적인 범죄들]에 대해서는 무자비했지만 치정범죄에 대해서는 무척 관대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런 범죄들이 사회를 위험에 빠뜨릴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기 때문이다._ 귀스타브 르 봉, <군중심리>, p285/466
르 봉은 배심원(군중)들이 갖는 심리를 분석하며, 배심원들이 자신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 범죄는 보다 감정적인 반응을 보인 반면, 치정 사건에는 보다 객관적인 입장을 보일 수 있음을 지적한다. 자신과 주변세계의 질서를 위협할 수 있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군중의 반응. 홍이와 장이의 간통사건과 같은 일은 자신에게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하기에 군중은 제3자의 입장에서 이를 바라볼 수 있었던 반면, 봉기의 거짓말은 식민상태에서 자신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는 위협이었기에 군중은 분노했던 것일까. 그리고, 이러한 군중의 반응은 우리가 <사랑과 전쟁>은 막장 드라마로 가볍게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그것이 알고 싶다>의 살인 사건은 국민청원의 대상이 되는 차이로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바라본다면, 우리 역시 군중의 일원임을 씁쓸하게 자인할 수 밖에 없을 듯하다.
다른 한 편으로 이번 주 <토지 11>에서 죽음을 다시 발견한다. <토지> 작품 전반에 수많은 인물들의 죽음이 나오지만, 이번 죽음이 각별한 것은 토지 1세대의 인물들 중에서도 비중있는 이들인 김 환(구천)과 임이네의 죽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환이의 죽음은 환이의 시각에서, 임이네의 죽음은 남편 용이와 아들 홍이의 관점에서 보여주면서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독자들이 죽음을 생각하게 만든다. 이에 대해서는 죽어가는 사람과 죽음을 지켜보는 사람.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Norbert Elias, 1897 ~ 1990)가 생각하는 죽음의 의미를 먼저 살펴보자.
죽음 자체는 위협적이지 않다. 사람들은 기나긴 꿈 속으로 떠나가고 세상은 사라진다. 두려운 것은 죽어가는 고통이며, 또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산 자의 상실감이다. 죽음을 둘러싼 집합적이거나 개인적인 환상은 종종 사람들을 섬뜩하게 한다. 그 공포의 독성을 완화하고 유한한 삶이라는 소박한 현실을 그에 맞세우는 것은 아직 우리 앞에 놓인 과제다.... 죽음은 숨겨야 할 어떤 비밀도 없다. 어떤 문도 열어 보이지 않는다. 죽음은 한 인간의 종말이다. 남는 것은 그 혹은 그녀가 다른 사람들에게 주었던 것, 즉 산 자가 가진 기억들이다. _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죽어가는 자의 고독>, p74
지삼만의 밀고로 붙잡혀 고문을 받으며 동료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김 환은 자신의 죽음 역시 예감한다. 죽음 앞의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삶을 마무리한다. 별당 아씨와의 인연, 자신 삶의 의미 등을 환상과 현실을 오가며 삶을 정리하며 환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마감한다. 혼자 남겨진 이의 죽음. 죽어가는 자의 고독이다.
'더 늙으면 추해진다.' 눈을 뜨고 노을이 타는 철창문을 또 바라본다. 생애를 통하여 철창문에 비치는 저 노을만큼 아름다운 것을 보지 못했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다시 눈을 감는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 환이는 자신의 생애가 성인의 길이 아니었음을 새삼스럽게 생각한다. 투쟁과 방랑과 애증(愛憎)과 원한의 가파로운 고개를 넘은, 평지가 오히려 발끝에 설었던 오십 평생은 마음과 몸이 피로 물들었던 것처럼 격렬했었다. 환이는 무엇 때문에 살고 죽는 것인지 그것을 생각한다. _ 박경리, <토지 11> , p200/560
다른 한 편, 임이네의 죽음은 남겨진 이들의 기억으로 표현된다. 남편 용이에게 임이네의 죽음은 절망이었다면, 아들 홍이에게 임이네의 죽음은 투쟁이었고, 자리바꿈이었다. 그리고, 임이네의 죽음을 통해 홍이에게 월선과 임이네는 대립되지만 공존(共存)하는 어머니였음을 알게 된다. 적대적 공생관계가 있다면 이들의 관계였을까. '선(善)- 악(惡)'처럼 월선에 대한 그리움이 임이네의 죽음으로 인해 사라졌다는 사실을 통해서 홍이에게 월선이나 임이네가 '키워준 어머니' 와 '낳아준 어머니'로 구분된 존재가 아니라 '월선-임이네'로 함께 자리잡았음을 깨닫게 된다. 이와 함께. 홍이가 첫 사랑 장이에게 끌렸던 이유가 장이가 월선을 닮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리면서 임이네가 홍이 인생에 남긴 그림자가 얼마나 짙었는가를 실감하게 된다. 그림자가 짙었지만, 그림자와 함께 한 시간이 너무도 길었기에 그림자가 사라진 이후 홍이의 삶이 행복할 것인가는 이후 지켜볼 부분일 것이다. 죽어가는 자에게 두렵지 않은 죽음과 죽음을 지켜보는 이들에게 남겨진 기억의 의미를 우리는 <토지 11>의 두 죽음을 통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가슴이 답답하고 고통스러웠다. 속으로 고개를 저어댔지만 임이네 죽음이 되살아난 것이다. 한 번도 따뜻하게 대해준 일이 없는 여자, 죽음은 살아남은 사람에게 회한을 남기게 마련이다. 좋지 않은 추억들을 다 떠내려 보내기 위해선 임이네 생각을 말아야 하고, 그 고독하고 처참한 죽음에 대한, 불쌍한 망령에 대한 최소한의 예절이다. 임이네의 죽음은 슬픔이나 애통보다 용이에게는 충격이었다. 죽음과의 처절한 싸움, 밑바닥을 헤아릴 수 없는 절망, 죽음은 모두 그럴 것이지만 뼛골까지 스며드는 외로운 죽음을 용이는 도저히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연민이었으나 임이네에 대한 기억은 언제나 절망이었고, 그 절망감은 죄의식을 몰고 오는 것이다. _ 박경리, <토지 11> , p64/670
견딜 수 없는 죄책감, 죽은 어미를 생각한다는 것은 가장 고통스런 일이다. 어쩌면 일본으로 간 이유 중에는 모친에 대한 기억에서 도망치고 싶은 심사가 있었는지 모른다. 비참한 죽음을 잊고 싶었는지 모른다. 병석에서 병으로 갔지만 임이네의 죽음은 월선의 죽음과는 달랐다. 이 두 죽음에서 비로소 홍이는 월선에 대한 그리움으로부터 놓여났으며, 월선이 점령했던 자리에 생모의 죽은 모습이 낙인과 같이 찍혀버렸던 것이다. 임이네의 죽음은 죽음과의 무참한 투쟁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체념 못한 죽음과의 투쟁이었다.(p266)... 그것은 자기 자신의 죽음과 모든 사람의 운명으로 확대되어간 허무의 깊이 모를 심연이었다. 월선이 축복받은 죽음이라면 임이네는 저주받은 죽음이요, 근원적으론 죽음이란 저주받은 것일 거라는 공포는 홍이 마음을 깊이 지배하였다. _ 박경리, <토지 11> , p267/560
이번 주 읽은 <토지 11>의 내용을 통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대중심리와 죽음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번 페이퍼는 빌헬름 라이히 (Wilhelm Reich, 1897 ~ 1957)의 <파시즘의 대중심리 Die Massenpsychologie des Faschismus>에 대한 내용을 마지막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대중들의 심리와 지도자의 성격이 일체성이 가져온 비극이 히틀러의 독일 지배임을 밝히는 라이히의 저서 속에서, 선천적으로 지도자의 성격 구조와 대중(군중)의 성격 구조가 동일했을 때만 파시즘 집권과 같은 비극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묵돌 선우(冒頓單于, ? ~ BC174)의 경우처럼 강압에 의해서도 강제 동화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 묵돌의 명적 또는 봉기에게 가해진 첫 번째 돌팔매가 갖는 의미를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번 주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묵돌은 명적 鳴鏑(소리나는 화살)을 만들어 부하들에게 나누어 준 뒤 그것으로 기사 훈련을 시켰다. 그는 이런 명을 내렸다. "내가 명적을 쏘면 다 같이 그곳을 쏘도록 하라. 쏘지 않는 자는 참한다." 얼마 후 사냥을 나간 뒤 명적을 쏜 곳에 화살을 날리지 않은 자는 가차 없이 참했다... 얼마 후 묵돌이 사냥에 참가한 뒤 부친인 두만 선우가 타고 있는 말을 향해 명적을 날렸다. 부하들이 모두 일제히 활을 쏘았다. 묵돌은 비로소 좌우 모두 자신의 명을 따른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_ 사마천, <사기열전 2> <흉노열전>, p3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