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숙이 이어서 힐리에게 유세하였다. "당과 돌굴은 풍속이 달라서, 돌굴이 비록 당의 땅을 얻는다고 하여도 살 수가 없소. 지금 노략질하여 붙잡아서 모두 국인(國人)으로 넣는다고 하여도 가한에게 무엇이 있게 하겠소? 군사를 돌려서 다시 화친관계를 맺어서 발섭(跋涉)하는 수고를 없애고 또 앉아서 금폐(金幣)를 받아서 또 모두 가한의 부고(府庫)로 들어가게 하는 것만 같지 아니한데, 형제들이 여러 해 쌓아 온 즐거움을 버리고 자손들이 끝없는 원망을 맺으려고 하는 것과 어떠하오?" 힐리가 기뻐하면서 병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황상이 진양(晉陽, 산서성 태원시)에서 군사를 일으킨 것은 모두 진왕(秦王) 이세민의 꾀였다. 황상이 이세민에게 말하였다. "만약에 일이 성사되면 천하는 모두 네가 이룩한 것이니 마땅히 너를 태자로 삼을 것이다." 이세민은 절을 하고 또 사양하였다.

당왕(唐王)이 되기에 이르자 장군과 보좌하는 사람들이 역시 이세민을 세자로 삼을 것을 청하였는데, 황상은 곧 그를 세우려고 하였으나, 이세민이 굳게 사양하여 중지하였다. 태자 이건성은 성격이 관대하고 간결하며 술과 여색(女色)과 사냥을 좋아하였고, 제왕 이원길은 과실이 많아서 모두 황상에게 총애를 받지 못하였다.

황상이 수(隋) 말의 전사(戰士) 가운데 대부분이 고려(高麗)에 몰입되어서, 이 해에 고려왕 고건무(高建武)에게 편지를 내려주고 모두 보내 돌아오게 하였다. 역시 주와 현으로 하여금 중토(中土)에 있는 고려 사람들을 찾게 하여 그 나라로 돌려보내게 하였다. 고건무가 조서를 받들어서 중국 백성들 가운데 앞뒤로 돌려보내 온 사람이 1만 명을 헤아렸다.


정미일(7일)에 고려왕 고건무(高建武)가 사자를 파견하여 와서 역서(曆書)를 나누어 달라고 청하였다. 사자를 파견하여 고건무를 요동군왕(遼東郡王)·고려왕으로 책봉하고, 백제왕(百濟王) 부여장(夫餘璋)을 대방군왕(帶方郡王)으로 삼고, 신라왕(新羅王) 김진평(金眞平)을 낙랑군왕(樂浪郡王)으로 삼았다.

처음으로 균전(均田), 조(租), 용(庸), 조(調)의 법을 확정하였다. 정(丁)과 보통의 백성은 전(田) 1경(頃)을 주고, 심하게 병이 든 사람은 10분의 6으로 감하고, 과부와 처첩(妻妾)은 10분의 7로 감하며, 모두 10분의 2를 대대로 쓸 수 있고, 10분의 8은 구분전(口分田)이었다. 매 정(丁)마다 1년에 내야 하는 조(租)는 속(粟) 2석(石)이었다.

조(調)는 토지에 따라서 적당한 것을 내는 것인데, 능(綾), 견(絹), 시(?), 포(布)로 하였다. 1년 역(役)은 20일로 하였다. 역에 나가지 아니하면 그 용(傭)을 거두는데 하루를 3척(尺)으로 계산한다. 일이 있으면 역(役)을 더하는데, 15일이 되면 그의 조(調)를 면제해 주고, 30일이 되면 조(租)와 조(調)를 모두 면제해 주었다. 수재, 한재, 병충해, 서리 등으로 재앙을 만난 경우에 10분의 4 이상 손해를 보면 조(租)를 면제해 주며, 6 이상 손해를 보면 조(調)까지 면제해 주고, 7 이상 손해를 보면 과역(課役)을 전부 면제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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