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사마광이 아룁니다. "옛날에 신백(辛伯)이 주(周)의 환공(桓公)에게 고하였습니다. ‘궁궐 안에서는 총애하는 사람을 황후와 나란히 해놓고 궁궐 밖으로는 총애 받는 신하들이 정사를 둘로 나누어 하며, 서자의 권세가 적자의 권세에 필적하게 되고, 대도시가 경사와 비슷하게 하는 것이 반란이 일어나는 근본입니다.’ 인주(人主) 가운데 진실로 이 네 가지를 신중히 한다면 반란이 어찌 스스로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무신일(18일)에 조서를 내려서 말하였다. "여론을 듣고 채택하며 모의한 것이 백성들에게 이르게 하는데, 그러면 형정(刑政)의 득실(得失)을 살필 수 있다. 지금 장차 회(淮, 회수)와 해(海, 華東)를 순시하여 풍속을 살펴보고자 한다."
신해일(21일)에 상서우승 황보의(皇甫議)에게 명령하여 황하 남쪽과 회수 북쪽에 사는 여러 군(郡)의 백성들을 전후 1백여만 명을 징발하여 통제거(通濟渠)를 개착하게 하였다. 서원(西苑, 낙양)에서부터 곡수(穀水)와 낙수(洛水)를 끌어들여 황하에 도달하게 하였고, 다시 판저(板渚, 하남성 형양현 북쪽)에서부터 하[황하]의 물을 끌어들여 형택(滎澤, 하남성 정주시 서북쪽)을 거쳐 변수(?水)로 들어가게 하였다. 또 대량(大梁, 하남성 개봉시)의 동쪽에서부터 변수의 물을 끌어들여 사수(泗水)로 들여보내서 회수에 도달하게 하였다. 또 회수 남쪽에 사는 백성 10여만을 징발하여 한구(?溝)를 개착하여 산양(山陽, 강소성 회안시)에서부터 양자(楊子, 강소성 양주시 남쪽 장강 나루)에 이르러 강[長江]에 들어가게 하였다. 운하의 너비는 40보(步)이며, 운하 옆에는 모두 어도(御道, 황제가 거동하는 길)를 수축하고 버드나무를 심었다. 장안(長安, 섬서성 서안시)에서부터 강도(江都, 강소성 양주시)에 이르기까지는 이궁(離宮)58을 40여 곳에다 설치하였다.
5월에 서원(西苑)을 수축하니 둘레가 200리였다. 그 안에 바다[인공바다]를 만들었는데 둘레는 10여 리였고,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洲) 여러 산을 만들고 물이 높이 솟아나오게 하여 100여 척이 되었으며, 대(臺)·누각·전각은 산 위에 벌려서 늘어져 있어서, 앞이건 뒤이건 선경(仙境)같았다.
우홍(牛弘) 등이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여 완성하니 무릇 18편(篇)이었으며, 이를 <대업률(大業律)>이라고 하였다. 갑신일(6일)에 비로소 그것을 반포하고 시행하였다. 백성들은 오랫동안 엄격하고 가혹한 법률에 혐오를 느꼈으므로 관대한 정사를 기뻐하였다. 그 후에 정벌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자 백성들은 명령을 감당하지 못하였으며, 유사는 때가 되어서야 위협하면서 그 일을 처리하려고 하니, 다시는 율령을 사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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