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가득히 뿌려진 별은, 별 하나하나에서 뿜어낸 여광(餘光)들은 서로 녹아 흘러서, 그야말로 은하(銀河)인가, 지상에도 천상에도 견사 같은 엷고 맑은 어둠이 부유(浮遊)하고 있는 아름다운 밤이다. 밤바람이 한랭하여 더욱 맑은 느낌인지, 멀리 있는 성당의 첨탑이 뚜렷하게 솟아올라 있다. _ 박경리, <토지 7> , p400/514
이번 주 토지독서챌린지 미션 : '2부 3권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장면 소개'를 포함한 감상평 작성하기.
2부 3권에서 극적인 장면은 길상, 서희와 봉선의 반갑고도 어색한 재회지만, 밤하늘에 빛나는 별과 맞닿은 지평선 끝의 성당의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별이 뜨기 얼마 전에 울렸을 성당 종(鐘)소리가 사라지면서 이를 대신해서 떴을 별들의 모습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 ~ 1922 )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 A L'ombre des Jeunes Filles en Fleurs> 속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사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전편에서 '성당'의 이미지는 마들렌 과자의 환상 이후 조금씩 다르지만 반복적으로 제시되는데, 그 중에서도 다음이 '청각'과 '시각'의 이미지를 잘 살리는 듯하다.
혼자 남은 내가 앞에 있는 녹색 덩어리에서 성당을 발견하려면, '성당'에 대한 관념을 보다 깊이 파헤쳐 보는 노력을 해야했다. 실제로 라틴어에서 모국어로 번역하거나, 모국어에서 라틴어로 옮겨야 할 때, 평소에 익숙한 형태를 벗어던져야만 문장의 의미를 더 잘 깨닫게 되는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여느 때는 종탑만 보아도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어 그다지 생각해볼 필요가 없었던 그 성당이라는 관념에, 여기 담쟁이덩굴의 아치는 고딕식 채색 유리의 아치이며, 저기 나뭇잎들의 돌출부는 기둥의 돋을새김에 해당한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환기해야 했다. 그러나 약간의 바람이 불어와 움직이는 성당 정문을 흔들자 빛의 소용돌이와도 같은 것이 일면서 전율하듯 번져 나갔고, 나뭇잎들은 파도처럼 부서졌고, 식물로 뒤덮인 정면은 파르르 떨면서 물결치듯 애무하며 사라지는 기둥을 함께 휩쓸어 갔다. _ 마르셸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p85/419
<토지 7>에서 이 아름다운 광경은 임역관과 공노인이 조준구를 만나기 전에 그려진다. 탐욕스러운 조준구에게 금광(金鑛)관련 정보를 흘리면서 접근하는데 성공한 두 사람. 이로써 서희의 조준구에 대한 복수는 은밀하게 성공적으로 시작되었다. 성공을 거둔 두 사람은 돌아오는 길에 같은 하늘을 올려다 본다. 조준구를 만나기 전 밤하늘은 아름다운 풍경에 불과했다면, 악인(惡人) 조준구를 만나고 다시 올려다 본 하늘은 하나의 깨우침을 주는 천지질서로 두 사람에게 보였을까.
밤하늘이 그 수많은 별들 운행같이 삼라만상이 이치에서 벗어나는 거란 없는 게야. 돌아갈 자리에 돌아가고 돌아올 자리에 돌아오고, 우리가 다만 못 믿는 것은 이르고 더디 오는 그 차이 때문이고 마음이 바쁜 때문이지. 뉘우침 말고는 악이란 결코 용서받을 순 없는 게야. _ 박경리, <토지 7> , p581/614
밤하늘을 보며 공감(共感)하는 두 사람. '성당'을 매개로 한 두 사람의 공감을 소재로 한 레이먼드 카버 (Raymond Carver)의 <대성당 Cathedral>을 떠올리게 된다. '대성당'에서도 두 인물이 등장한다. 볼 수 없지만, 느끼려고 했던 맹인과 그에게 '대성당'을 보여주려 했던 장교. 서로 넘어설 수 없는 '시각'과 '청각'의 한계를 인정하고 대신 '촉각'을 통해 교감했던 그들처럼, 임역관과 공노인이 악(惡)인 조준구에게 선(善)을 다른 방법으로 보여주려 했다면 조준구의 결말은 달라졌을까. 아마도 모를 일이다. 이번 주 읽은 내용 중에는 실존인물 한 명이 지나가듯 나온다. 이인직(李人稙, 1862 ~ 1916)이다. 최초의 신소설을 쓴 작가이자 이완용(李完用, 1858 ~ 1926)의 비서로 활약한 친일행적으로 생을 마감한 그에 대한 내용 일부를 옮겨본다.
1906년 2월 일진회(一進會) 기관지 <국민신보>의 주필을, 같은 해 6월 손병희, 오세창 등이 일진회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천도교 기관지 <만세보>의 주필을 맡았다. <만세보> 주필로 활동하면서 1906년 7월부터 10월까지 <혈의 누>를, 1906년 10월부터 1907년 5월까지 <귀의 성>을 연재했다. 1907년 7월 <만세보>가 재정적 이유로 폐간되고 친일 이완용 내각의 기관지 <대한신문>으로 바뀐 뒤 대한신문사 사장에 취임했고, 이후 이완용의 후원을 받으면서 그의 비서 역할을 수행했다... 1913년 11월 경학원이 전라북도 강사의 순회강연을 시찰할 때, 금산군에서 조선왕조의 통치를 비판하고 일제의 식민지배를 찬양하는 강연을 했다. 1914년 총독 데라우치의 조선합병을 칭송하고 일제의 무단통치를 덕치(德治)에 비유하면서 모든 분야가 발전하는 은택을 입었다고 식민통치를 미화했다... <친일인명사전> 中
<토지 7>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소설로 평가되는 <혈의 누>를 쓴 이인직 이름과 함께 문학과 번역에 관한 대화가 이어지는데, 이러한 대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생각은 근대문학(近代文學)과 근대화(近代化)로 이어진다. 뒤이어 생각은 네이션(nation)=근대국가(state)의 출현을 국민문학과 연결시킨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1941 ~ )에 이른다.
몇몇 식자들이 새로운 문명을 두고 왈가왈부하는데 그럴 것이 아니라 보다 많은 사람 일반대중이 짧은 시일에 눈을 뜬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니겠느냐 그 얘기라구. 우물 안 속에서도 한 권의 소설을 통해서 그 나라의 풍물이며 새로운 사상, 그네들의 생활방도 종교 윤리관을 싹 훑을 수 있다면은 그런 작품의 소개란 상당히 시급한 일일 게고 몇 사람은 선구자가 있어야잖겠어? 물론 지금까지의 얘기는 번역하는 일인데 그런 다음." _ 박경리, <토지 7> , p435/514
근대의 네이션이 성립하기까지의 '세계제국'에서는 라틴어나 한자나 아라비아문자라는 공통의 문자언어가 사용되었고, 또 각 민족이나 각 공동체의 종교를 넘어선 '세계종교'가 있었습니다.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등입니다. 그런 '제국'이라는 것은 지배관계에 저촉되지만 않는다면, 각 부족의 습관에 대해 무관심했습니다. 동아시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가운데서 근대적 의미의 네이션(민족)이 출현했습니다. 그러나 네이션이 네이션이 되는 데에는 언어의 변혁, 즉 그런 '보편적'인 개념을 토착적이랄까 신체적/감정적 기반에 의거하는 것이 되도록 하는 언어를 만들 필요가 있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런 언어란 음성언어 또는 속어입니다. _ 가라타니 고진, <문자와 국가> , p138
'언문 言文일치' 운동의 본질은 문자개혁이다... '언문일치' 운동은 무엇보다도 '문자'에 관한 새로운 관념에서 비롯되었다. 막부의 통역 마에지마 히소카를 사로잡은 것은 음성 문자가 갖는 경제성, 직접성, 민주성이었다. 그는 서구의 우월성은 음성 문자에 있다고 생각했고, 음성 문자를 일본어에서 실현시키는 일이 긴급한 과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_ 가라타니 고진, <일본 근대 문학의 기원> , p58
가라타니 고진은 민족을 기반으로 하는 근대국가 출현 이전에 민족의식을 보편화할 수 있는 언어의 출현이 필수적이었다고 바라본다. 이러한 관점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시대의 일본 지식인에게도 공통된 것이어서 이들은 기존의 '한자가나혼용' 대신 '가나'혼용을 주장하게 된다. 이론적-도덕적인 내용을 담는 '한자'와 , 감정과 기분 등 느낌을 담는 '가나'. 이들이 '언문일치'를 통해 한자 사용을 금하고자 했던 것은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기존의 추상적 표현을 서구문화를 번역한 새로운 용어로 대체함으로써 그들은 탈아입구(脫亞入歐)라는 그들의 꿈을 이루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한자에서는 형상이 직접 의미로 존재한다. 그것은 형상으로서의 얼굴이 직접 의미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표음주의에서는, 설사 한자를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문자가 음성에 종속될 뿐이다. 마찬가지로 '얼굴'은 이미 맨 얼굴이라는 일종의 음성문자가 된다. 그것은 거기에 표현되어야 할 '내적인 음성=의미'를 존재하도록 만든다. '언문일치'로서의 표음주의는 '사실'이나 '내면의 발견과 근원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_ 가라타니 고진, <일본 근대 문학의 기원> , p62
과거 전통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새롭게 유럽의 제국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일본의 지식인들과 이들을 따라 근대화를 이루려 했던 구한말의 지식인들. 이인직처럼 이들중 다수가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는 사실 속에서 언어와 문자 그리고 민족이라는 개념이 결코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한글의 소중함을 잊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글로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분명 오늘의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임을 생각하며,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근대문학을 다루는 문학사가들은 '근대적 자아'가 그냥 머릿속에서 성립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자기 self가 자기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조건이 필요하다... 프로이트는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추상적 사고 언어가 만들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언어 표상의 감각적 잔재가 내적인 것과 연결되며, 그에 따라 내적인 것 그 자체가 점차 지각되게 된 것이다.' _ 가라타니 고진, <일본 근대 문학의 기원> , p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