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거절당했으며 무엇을 희망했었는가. 혼인을 거절하고 혼인을 희망했었다. 단순히 그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엇인가를, 지순한 것을 거절당한 것은 이 편이며 거절한 것은 그 편이 아니었던가? 길상의 두려움은 서희에 대한 자기의식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가를 보는 데 있었다. _ 박경리, <토지 6>, P112/482


  박경리(朴景利, 1926 ~ 2008)의 <토지 6>는 길상과 서희의 어색한 관계로부터 시작된다. 서희가 상현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배우자로 길상을 생각하면서 갈등이 시작된다. 김훈장 등 주변인은 물론 결혼 당사자인 길상마저 이를 거부할 정도로 서희의 결혼 결정은 적지 않은 파장을 용정에 가져왔다. 무엇이 문제일까.


 야망은 불순물이다. 불순물은 혼합될 수 있는 것이다. 상현과 사이에 질러놓았던 지름목은 길상과 서희 사이에는 제거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을 드러내려는 서희의 모험을 길상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서희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해주고 싶다던 그러나 길상은 그것만은 용납할 수가 없다. 서희와의 거리는 절체절명의 것이다. 왜냐? 자존심 따위, 사내로서의 오기 따위 그런 것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사랑의 순결 때문이다. 순결을 지키고 싶은 때문이다.(p20).... 시초부터 야망의 수단이 아닌 길상과의 결합은 가능할 수 없었다. 적어도 길상과의 결합에 그것 이외 어떤 구실로 서희는 자신을 설득시킬 수 있었겠는가. _ 박경리, <토지 6>, P21/620


 결혼(結婚)을 하려는 또는 피하려는 길상과 서희의 생각은 다르다. 서희를 사랑하기에 되려 거리를 두는 길상과 자신의 야망을 위해 결혼을 결심한 서희.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하나가 된다(그래서 부부의 날이 5월 21일이라고 한다)는 결혼이기에 생각이 다른 것은 너무도 당연하겠지만, 이들의 결혼은 두 사람의 생각 차이 외에도 여러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그래서, 이번 페이퍼에서는 앨런 맥팔레인 (Alan Macfarlane, 1941 ~ )의 <잉글랜드에서의 결혼과 사랑 Marriage and Love in England 1300~1840>의 도움을 빌려 결혼과 사랑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인류학자 로버트 로우이(Lowie)에 의하면 대부분의 인류사회에 있어서 결혼을 성사시키고 유지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관습적 견해이다. 원시부족뿐 아니라 서구의 몇몇 사회를 제외한 거의 모든 곳에서 낭만적 사랑은 무색해진다. 낭만적 사랑이 없을 수는 없으나, 결혼이라는 인생의 중요한 사안에서 로맨스는 중요치 않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_ 앨런 맥팔레인, <잉글랜드에서의 결혼과 사랑> , p179


 저자 앨런 맥팔레인은 대부분 인류 사회에서 오랜 기간 동안 결혼에 '사랑'이라는 감정 요인이 거의 관여하지 않음을 강조한다. 이로부터 오늘날에는 보편화된 '낭만적 사랑'에 기초한 '연애결혼'은 오직 잉글랜드, 미국 등 영미(英美) 문화권에서 발견되는 독특한 특성을 저자는 '맬서스주의적 결혼체제'라고 부르며, <잉글랜드에서의 결혼과 사랑>에서 잉글랜드의 근대성과 연관짓는다. 이런 면에서 '개인의 감정'에 기반한 결혼은 근대적 양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낭만적 사랑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자녀들이 가족의 통제로부터 벗어나는 구실을 제공해 준다. 자녀들은 '사랑'을 위해 결혼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부부관계를 부모형제에 대한 유대보다도 최우선에 둔다. 따라서 아프리카에서는 '연애결혼(love marriage)'은 가족주의에서 개인주의로 이동시키는 이데올로기적 발판을 제공함으로써 자녀들이 부모세대를 떠나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사회적으로 상승이동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이러한 변동은 위로 향하는 부의 흐름에서 아래로 향하는 부의 흐름으로 전환하는 과정의 일부분이다. 이것은 또한 부모-자식 관계가 아니라 남편-아내의 관계를 가장 중요한 심리사회적 유대관계로 분리시키는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_ 앨런 맥팔레인, <잉글랜드에서의 결혼과 사랑> , p182

 사실, 맥팔레인이 본문에서 지적한 '부모'는 단순하게 혈연적 부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그들이 속한 집단, 관습의 총체이며, 결혼 당사자가 이러한 관습을 거부하고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당사자 의사'를 존중하는 제도가 우선 정착될 필요가 있었다.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결혼 당사자의 의견에 우선권을 준 이 같은 제도가 과연 산업화의 노동자 공급에 어떤 역할을 했을지는 별도의 페이퍼로 미루도록 하고, 여기서는 1910년대 간도 지역 서희-길상의 결혼 속에서 매우 서구적인 생각이 담겼다는 정도를 담자. 


 부르주아들이 즐겨 쓰는 결혼 전략은 소개에 의한 결혼이었다. '중매장이들'이 이 분야의 전문가 역할을 했는데, 대개 좋은 집안의 친지인 노처녀들로서 나무랄 데 없는 평판을 지니고 있어 모두에게 신뢰를 주는 인물이어야 했다. 이들은 서로 조건이 어울려 보이는 젊은이들의 만남을 주선하였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부모, 자크 샤스트네의 부모, 에드메 르노댕의 아저씨 부부는 이처럼 소개를 받아 결혼했다. _ 필립 아리에스 외, <사생활의 역사 4> , p350


  미래의 배우자를 고르는 몇 가지 기준이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한 가지 조건이 탁월하면 다른 불리한 점은 무시될 수 있었다. 결혼 체제에서 가장 흥미로운 특징은 아마도 재산과 혈통 사이의 용이한 교환이었다. 일반적으로는 그러한 교환이 극도로 어려웠다. 예컨대, 낮은 카스트의 재산 많은 청년이 브라만의 가난한 여성과 결혼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부유한 유산계급(bourgeois) 청년은 귀족 신분과의 결혼에 장벽을 느꼈다. _ 앨런 맥팔레인, <잉글랜드에서의 결혼과 사랑> , p241


 우리보다 앞서 근대화를 이루었다고 하는 유럽 여러 나라들에서도 신분을 뛰어넘는 결혼은 매우 파격으로 받아들여졌던 시대였다. 이 시대에 이제 막 신분제가 철폐된 조선 사회에서 서희의 결정이 가져온 충격이 컸던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순결한 사랑'을 지키고자 결혼을 거부한 길상의 결정까지 함께 놓고 생각한다면 어느 시대 못지 않게 개인의 감정을 중시하고, 평등하게 바라보는 근대화된 시대상을 그리게 된다. 서희의 결혼 목적만 빼놓고 생각한다면.


 대부분의 사회에서 결혼의 궁극적인 목적은 재생산, 즉 자손을 얻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중요성이 있다(p219)... 결혼은 남녀 간에 견해차이가 있었고, 그와 동시에 가문의 사회경제적 수준에 따라서도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p223)... 반려자를 얻는 이상적 결혼, 우정으로서의 결혼은 결혼에 대한 기독교적 이상인데, 기독교적 이상이 제시하는 결혼의 세 번째 존재이유는 '서로가 서로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 상호교제, 도움 그리고 위로였다.' _ 앨런 맥팔레인, <잉글랜드에서의 결혼과 사랑> , p229


 

그렇지만, 가문과 자신의 복수를 위해 모든 것을 불태우는 몽테크리스토 백작(Le Comte de Monte-Cristo) 에드몽 당테스와 같은 서희의 모습을 본다면,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운 결정이 아니라 관습에 누구보다도 철저한 결정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신분, 재산 등을 고려하지 않는 서희의 모습에서 냉혹한 마키아벨리즘(machiavellianism)에 충실한 인간상을 발견하게 된다. 이같은 서희의 면모가 길상으로 하여금 서희를 사랑하면서도 거리를 둘 수밖에 만들었던 것은 아닐런지.  결국, 이렇게 끝나는 듯하던 이들의 관계지만 용정으로 돌아오는 길에 닥친 불의의 사고로 극적으로 맺어지는 것을 보면서, 사고를 통해 이들이 '거리'를 분명 느끼면서도 결혼을 '운명'으로 받아들였음을 짐작하게 된다. 비록, 그 운명이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못하겠지만.


 푼수 없이 지껄인 길상이나 체모 잃고 울어버린 서희, 푼수 없었다고 느끼는 이상, 체모 잃었다고 느끼는 이상, 이들 사이에는 엄연한 거리가 있는 거고 거리를 의식하면 할수록 멍울은 굳어질 수밖에 없다. 그들은 더 깊은 고뇌를 안고 돌아가는 것이다. 흔들리는 마차 속에서 때론 절망이, 때론 희망이 교차하는 마음은 끝없이 방황하면서. 그러나 이들에게 결정적인 계기가 왔다. 그것은 용정을 향해 달리던 마차가 어떻게 되어 그랬던지 뒤집힌 사건이다. _ 박경리, <토지 6>, P159/482


 이번 주에 읽은 <토지 6>에서의 결혼을 둘러싼 서희와 길상의 미묘한 대립과 갈등 속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에 충실한 근대적 사고를 길상에게서 발견하는 한편, '가문'을 지키기 위해 신분의 차이는 신경쓰지 않는 보수(保守)주의적인 서희의 다른 면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갈등이 결혼으로 온전히 봉합되지 않았음을 길상의 귀마동(歸馬洞)에서의 환상에서 확인하게 된다. '꿈'이라는 환상을 통해 길상은 자신의 미래감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본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부르다흐는 꿈-생활의 특성을 다음과 같은 명제로 요약한다. <꿈의 본질적 특징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1) 지각 능력이 공상의 산물을 감각 인상처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 정신의 주관적 활동이 객관적인 것으로 보인다. (2) 수면은 자아의 권능이 중단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잠이 들면서 일종의 수동적 상태가 된다.... 자면서 보는 형상들은 자아의 권능이 중지된 결과 생겨난 것들이다. _ 지그문트 프로이트, <꿈의 해석> , p48/505



 말 한 필은 서쪽에서 돌아오고 다른 한 필은 동쪽에서 돌아오는 게요, 실은 그들이 돌아오는 게 아니라 말이 돌아오는 거지만, 한데 사내와 여인은 옛날의 그들은 아니오. 아니거든. 머리칼은 햇볕에 타서 삼올 모양으로 누렇게 뜨고 얼굴에는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 같은 굵은 주름, 거미줄 같은 잔주름, 이빨은 빠져서 양 볼이 꺼지고 파파할멈 할아범의 모습들이오. 허나 그보다 슬픈 것은 사내와 여인이 서로를 알지 못하며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는 일이었소. 그네들은 타인이며 먹구름이 몰려오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게요. 제가끔 자기 갈 길을 탄식하는 게지."_ 박경리, <토지 6>, P173/482


PS. <토지>를 읽다보면 길상이 환상에 빠지는 장면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만약,  무당이 이런 길상을 보면 '신내림'을 받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도 길상은 스님이 되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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