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개 사회의 범죄와 관습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76
브로니슬라프 말리노프스키 지음, 김도현 옮김 / 책세상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어떤 사회에서든 종교족 제재에 의해서만 지지되기에는 너무 실용적이고, 단순히 호의에만 맡겨버리기에는 너무 부담스럽고, 추상적 정부 기관에 의해서만 강제되기에는 개인적으로 너무 긴요한 일군의 규칙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법 규칙의 영역이야말로 감히 예견하건대 호혜성, 체계적 영향력, 전시성, 야망 따위가 원시법의 구속력의 핵심 인자를 이루는 영역인 것이다. _ 브로니스라브 말리노프스키, <미개 사회의 범죄와 관습> , p76/224


 브로니스라브 말리노프스키 (Bronislaw Malinowski, 1884 ~ 1942) 의 <미개 사회의 범죄와 관습 Crime and Custom in Savage Society>는 서구와는 다른 법 질서가 아닌 새로운 질서가 지배하는 사회를 보여준다. 서구의 법이 '처벌을 통한 강제'의 원리라면, 트로브리엔드의 사회는 '이익을 위한 호혜'의 원리가 작용하기에 서구의 틀로는 그들 사회를 이해하지 못한다. 말리노브스키는 책에서 바로 이 점을 짚어낸다.


 그동안 멜라네시아인의 속성이라 여겨져온 의무 이행의 '자동적 원활함 automatic smoothness'을 보다 자세히 관찰해보면, 거래에는 항상 장애가 있고 불만과 비난이 많으며 자기 파트너에 대해 완전히 만족하는 경우란 거의 없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파트너 관계가 유지되고 대체로 각자 자기 의무를 이행하려 노력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이해관계 self-interest를 잘 알고 있어 이에 얽매이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야망 ambition과 감정에 순응하기 때문이다. _ 브로니스라브 말리노프스키, <미개 사회의 범죄와 관습> , p44/224


 <미개 사회의 범죄와 관습>에서 저자는 서구 사회보다 복잡한 생활양식이 공존하는 미개한(?) 트로브리엔드의 실상을 말한다. 모계제를 기본으로 하되, 부성애(父性愛)를 인정하며 사회 내에서 서로 다른 제도가 공존할 수 있게끔 유지하는 트로브리엔드 사회는 강제된 법으로 유지되는 서구 사회보다 다양성을 보존하고 있다.


 트로브리엔드의 사회관계는 다양한 법적 원리들에 의해 규율되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모권제 Mother-right 로서 이에 따르면 자식은 육체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어머니 편 친족에, 오직 어머니 편 친족에만 속하게 된다. 이 원리는 신분/권력/ 위신의 세습, 경제적 상속, 전지(田地)에 대한 권리, 지역적 시민권 local citizenship, 그리고 토템 씨족의 구성원 자격 따위를 규율한다. (p82)... 하지만, 모권 체계와 나란히, 말하자면 그 그림자 속에 다른 소외된 법 규칙의 체계들이 존재하고 있다. 혼인법, 마을 공동체의 헌법, 즉 마을에서 촌장의 지위, 지방에서 추장의 지위, 그리고 공적 주술사의 특권과 책임 따위는 모두 독립된 법체계를 이룬다. _ 브로니스라브 말리노프스키, <미개 사회의 범죄와 관습> , p83/224


 이처럼 서로 다른 형태의 제도가 공존함에도 트로브리엔드 사회가 정(靜)적인 것만은 아니다. '교차사촌혼'을 통한 근친혼의 예외는 모계제 사회와 부계제 사회 사이의 갈등의 씨앗을 보여주기도 하며, 마법(주술)의 보수주의적 사용 등을 통해 체제의 안정, 계급의 분화의 불씨를 발견할 수 있기에, 이 사회는 다른 어느 사회보다 불안정한  동(動)적인 면을 갖는다.


 부계 혈통이 일시적으로 모권제를 잠식해 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장치는 교차사촌혼 cross-cousin marriage 제도에서 발견된다. 트로브리앤드에서 아들이 있는 남자는 만약 누이가 딸을 출산한다면, 아들과 누이의 딸(생질녀)을 혼인시킬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그리하여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손자는 자신의 친족이 되고, 자신의 아들은 추장직 상속자의 매부가 된다. 그러므로 추장직 상속자는 추장 아들 가족에게 식량을 공급해야 하고 추장 아들에게 협력해야 하는 일반적인 의무를 부담하며, 자기 누이 가족의 보호자가 된다. 아들에 의해 이익을 잠식당할 수 있는 바로 그자가 그것에 분개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자신의 의무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_ 브로니스라브 말리노프스키, <미개 사회의 범죄와 관습> , p117/224


 요컨대 마법은 사법(司法)을 행하는 방법인 동시에 범죄를 저지르는 형식이기도 하다. 마법은 두 가지 가운데 어느 쪽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 하지만, 권력자가 약자를 해코지하는 데 마법을 사용하는 경우는 있지만, 법에 정면으로 대항하기 위해 마법이 사용되는 경우는 없다. 따라서 어느 쪽으로 사용되든, 마법은 현상 유지를 강조하고 뿌리 깊은 불평등을 표현하며 새로운 사회를 형성하는 것을 막는 방법이다. 보수주의는 원시 사회의 가장 중요한 성질이므로, 전체적으로 볼 때 마법은 유익한 제도이며 초기 문화에 있어 막대한 가치를 지닌다고 하겠다. _ 브로니스라브 말리노프스키, <미개 사회의 범죄와 관습> , p100/224


 이처럼 말리노프스키의 <미개 사회의 범죄와 관습>은 서구중심의 관점에 의문을 제기하며, 미개 사회 역시 다른 형태의 문명으로 결코 미개하지 않은 구조를 갖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책의 제목은 미개 사회지만, 내용은 매우 역설적이다.


 '처벌을 받지 않을 하한'을 규정한 서구의 법질서가 '처벌을 받지 않을' 구성원들의 회피 행동을 낳는다면, '자신의 이익을 위한 호혜성'은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끌어낸다는 점에서 보다 시장경제적인 윤리(倫理)가 아닐런지. 또한, 구성원들의 회피가 결국 힘없는 자들의 강탈로 이어지는 반면, 자발적인 참여는 자긍심 증대와 함께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이런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결코 트로브리엔드 사회는 미개 사회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인류 문명은 예전보다 퇴보해 온 것은 아닐런지를 생각하며 리뷰를 갈무리한다...

사회관계의 법적 성격으로서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것은 호혜성 - 주고받기의 원리 - 이 씨족 내에서도, 아니, 가장 가까운 친족 집단 내에서도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_ 브로니스라브 말리노프스키, <미개 사회의 범죄와 관습> , p59/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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