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야망 때문이 아니었다. 보복 때문이다. 서희가 얼굴에 침을 뱉었을 적에 귀녀는 보복의 칼을 갈았다. 이제는 그 칼을 내려침에 주저할 것이 없는 것이다. 이미 죽이기로 작정하였고 죽일 것을 주저했던 귀녀는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귀녀는 만석꾼 살림보다, 아니 백만석의 살림보다 여자로서 물리침을 당한 원한이 더 강하였다. _ 박경리, <토지 2>, p556/688


 개인적으로  <토지 2>에서 가장 긴박감이 넘치는 부분은 최치수의 죽음이 아닐까 한다. 자신의 아내를 데리고 도망간 구천이를 잡기 위해 신식총도 구입하고, 수동이와 강포수를 데리고 근처로 인간사냥을 나가기도 한 그였으나, 정작 덫에 걸린 것이 그 자신이었다는 것은 비극이자 아이러니로 다가온다. 치수를 직접 목졸라 죽인 사람은 평산이었으나, 평산을 조종한 이는 귀녀요, 귀녀에게 보복감을 심어주어 결행하게 만든 이는 서희였다는 인과관계를 따지고 보면, 서희가 치수의 죽음의 방아쇠를 당겼다고 봐야할 것인가. 그런 면이 없진 않겠지만, 아버지 죽음의 계기를 어린 서희에게 묻는다는 것은 너무 가혹하게도 느껴진다. 서희의 거친 행동이 방아쇠를 당기긴 했을 지언정 자신을 '욕망'이라는 화약창고로 만든 것은 귀녀 자신일테니까.


 비단과 누더기를 구별하는 따위의 자존심, 야수 같은 강포수에의 허신과 인간쓰레기 같은 칠성이와의 동침을 거치면서 마지막까지 최치수에게 여자 대접을 받고자 하는 희망은 애정일까 허영일까 또는 집념일까. 악업(惡業)을 쌓기 위해 목욕재계하고 동자불 앞에서 도움의 기도를 올리던 귀녀, 모든 것은 밖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고귀함도 염원도 사랑도 밖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_ 박경리, <토지 2>, p556/688


 만석꾼 집의 대를 잇는 아이를 낳겠다는 귀녀의 욕심은 제프리 버튼 러셀 (Jeffrey Burton Russell)의 <메피스토펠레스 mephistopheles>에서 소개된 조르주 베르나노스(Georges Bernanos, 1888 ~ 1948)의 작품 세계관을 떠올리게 한다. 치수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규정할 수 없는 귀녀의 욕망의 끝은 시작부터 이미 어둠으로 향한 것은 아니었는지.


 악은 단순히 인간이 만들어낸 범주만이 아니라 그 궁극적인 특성이 무와 부동성인 실재하는 것이다. 악은 본질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근본적으로 이해 불가능하다. 악의 중심은 공허이다. 이러한 무는 우리들의 정신에 침투해서 지옥에 동참할 것을 유혹하면서 덩굴 같은 손을 뻗치는 무한한 차가움이다. 인간의 악이 비밀스런 원천으로서 무는 신에 대한 증오와 죽음에 대한 사랑이 스며나오는 의식의 가장 깊은 부분에 숨어 있다... 무에 대한 욕망은 우리 안 깊은 곳에 심어져 있고, 그러한 영향 하에서, 우리는 시선을 빛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돌려서 어둠만을 볼 수 있게 되고 그 자체를 위해 어둠을 택할 수 있다. _ 제프리 버튼 러셀, <메피스토펠레스>, p447


 그리고,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올라탄 귀녀는 멈추지 못하고 자신의 삶 속에서 자신의 형식을 만들어갔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처음에는 치수에 대한 동경과 사랑으로부터 출발했을지도 모를 감정이 자신의 욕망과 결합하면서 작가는 '악마'의 모습을 그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우리는 그로부터 악마를 보았다.


 한 개인은 살면서 수없이 악을 지각하게 된다. 그 각각의 경험은 이전에 축적된 지각들(Pn)에 의해 부분적으로 형성된 새로운 P를 하나하나 추가하면서 사건과 구조가 이전과 같이 상호작용을 일으키면서 생겨난다. 각각의 새로운 지각은 이미 가지고 있는 축적된 지각을 수정하거나 강화한다. 정신 속에 일반적인 악의 형식(F)을 만들어내기 위해 한 개인의 지각은 여러 해 동안 결합되어 하나의 집합이나 저장소가 된다. Pn -> F. 사람은 이러한 일반적인 개념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심리학적인 지식이나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 환경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용어들 - 신화, 시, 그림, 도덕 신학, 사회적인 용어 등 - 로 형식화한다. 악에 대한 지각은 종종 악에 어떤 패턴이나 통일설이 있다는 생각을 초래하기도 하면서, 악의 인격화라는 생각도 나오게 되는 것이다. _ 제프리 버튼 러셀, <데블>, p55


 "귀녀를 강포수에게 주기로 했습니다."

하는 날에는 만사는 휴다. 야망은 모래무덤같이 허물어지고 말 것이며 배속의 아이는 쓸모없는 핏덩이, 숲 속에나 내다 버릴 물건밖에는 되지 못한다. 수동이를 나귀 등에 싣고 돌아오던 날, 그 황망한 중에 돌아왔다는 인사를 올린 후 아직 한 번도 최치수 모자는 상면한 일이 없다. 그러니까 강포수에게 귀녀를 주겠다는 말을 했을 리 없고 그렇다면 때는 늦지 않았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귀녀의 이빨 사이에서 무서운 소리가 새나왔다. 악마의 얼굴이요 악마의 미소요 악마의 희열, 복수의 화신. _ 박경리, <토지 2>, p432/540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향한 귀녀의 의식(儀式) 속에서 경건함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의 일시적인 속된 행동을 통해 남은 여생이라는 영원의 평안함을 위한 귀녀의 행동. 속(俗)에서 성(聖)을 향한 경건함이 '목욕재계'라는 의식으로 나타났다면, 그러한 성(聖)의 속성이 선(善)일수도 때로는 악(惡)일수도 있겠다...


 악마는 신들만큼이나 종교적인 의미를 상당히 드러낸다. 사실, 악마를 경험해서 생긴 감정은 선한 신을 경험하고 얻어진 감정만큼이나 엄청난 것이다. _ 제프리 버튼 러셀, <데블>, p37


 지난 주에 읽은 부분 중에서 귀녀의 욕망만큼이나 시선이 머물렀던 부분은 김평산의 부인 함안댁의 죽음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함안댁의 죽음 직후 보인 사람들의 행동에 의식이 멈춘다. 이웃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상황에서 빠르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 모습 속에서 자신 이외의 죽음에는 무감각한 인간 본성에 대한 생각과 함께 민간신앙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함안댁이 목을 매고 죽은 것이다... 어느새 나무 밑으로 몰려들었다. 바우랑 붙들이, 마을의 젊은 치들도 덤비듯이 쫓아왔다. 모두 엉겨붙어 나뭇가지를 꺾어 간수하기에 바쁘다. 순식간에 나무는 한 개의 기둥이 되고 말았다... "이기이 만병에 다 좋다 카지마는 그 중에서도 하늘병(간질)에는 떨어지게 듣는다 카더마."... 죽은 사람의 정기를 받아 약물(藥物)이 된다는 믿음에서 모두들 덤벼들어 꺾은 것인데 죽은 나무여서 과연 정기가 통하겠느냐는 아낙의 의심이다. 병에 효험이 있기로는 목을 매단 끈이나 새끼줄이 제일이라는 것이 예부터 전해져 내려온 말이었다._ 박경리, <토지 2>, p652/688


 목매달아 죽은 이가 사용한 나무가 간질에 효험이 있다는 민간신앙(民間信仰). 이를 우리는 일제 식민시대 학자 무라야마 지쥰(村山 智順, 1891 ~ 1968)의 <조선의 귀신 朝鮮の鬼神 >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실, 간질과 관련한 여러 민간 치료법에는 이외에도 여러가지가 있지만, 오늘날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납득하기 어려운 치료법들이다. 


 간질에는 지진동이 있을 때 문창호지를 잘라두었다가 발생 당시 그 종이를 태워서 물에 복용하면 발병하지 않는다.(p384)... 간질에는 남자에게는 여음을, 여자에게는 남근을 잘라서 먹인다. 목매어 죽는 데 쓰인 적이 있는 나무껍질을 벗겨서 달여 마신다. 매장된 시체를 파내서 먹는다. (사람이 알게 되면 죽는다.) 인육을 먹는다. 인분을 건조시켜 달여서 마신다. 인골을 분말하여 음용한다. 사람의 정액을 마신다. 열흘에 한 마리씩 잡은 모기 세 마리를 말린 후 분말하여 복용한다. 어린아이가 이 병에 걸렸을 때는 닭의 볏에서 나오는 피를 마시게 한다. _  무라야마 지쥰, <조선의 귀신 > , p391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위와 같은 방법이 만약 효능이 있었다면 위약(僞藥, placebo)효과 정도나 있었을까. 같은 상황에서 민간요법의 치료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을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이러한 것이 과학(科學)덕분이라는 생각까지는 쉽게 미치지는 않는다. 아마도, 이는 과학이 우리에게 던져준 다른 과제 때문일 것이다. 과학, 자본주의 등으로 대표되는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환경문제, 인간소외 문제에 대한 답을 이제는 동양사상에서 찾고 있는 현실 때문이 아닐까.. 앞서 조르주 베르나노는 무(無)에서 허무, 악을 발견했지만, 노자(老子, BC 604 ? ~ ?) 는 무에서 유(有)를 만들어낼 가능성을 찹은 것처럼 분명 '달의 뒷면'을 보여주는 통찰이 동양사상에는 있으니까 말이다.


 고묘 顧墓는 불안한 상태에 놓인 유해의 영혼이 직접 그 자손에게 재액을 준다는 신앙이다. 바꾸어 발하면 각종의 재액과 질병의 원인이 좋지 못한 곳에 매장한 유해 때문이라 생각하고 이 불량상태를 개량함으로써 그 병원을 근절시키려는 것이다... 이는 받아야할 것을 받지 못하여 생기는 재액/질병이다. 이 양자에게 공통되는 받아야 할 것은 생기이다. 만물은 생기 生氣에서 생겨나고 이 생기를 받는다는 것은 번영을 뜻하며, 이것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망한다는 의미다. 이는 중국에서 전래된 생기신앙으로서, 고묘법은 이 생기신앙와 귀신신앙이 연결되어 나타난 예이다. _  무라야마 지쥰, <조선의 귀신> , p412


 우리는 치료를 위해 인육(人肉)을 먹는다는 끔찍한 이야기가 있어 조선 시대를 야만의 시대로 생각하게 되지만, 루신(魯迅, 1881 ~ 1936)의 소설 <광인일기 狂人日記> <약  藥>에서 보듯 식인 풍속이 우리 문화에 한정된 것만은 아니라는 점과 굶어죽을 위기에 인육을 먹었다는 이야기는 어느 문화권에서도 전승되는 소재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를 반드시 미신(迷信)이나 후진 문화로 치부할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도 생각해본다.(그렇다고 비극의 깊이가 얉아지는 것은 아니겠고, 이는 반드시 사라져야 할 것은 분명하다) 다만, 오늘날의 의학(醫學) 역시 완전한 것은 아닌만큼 보다 나아지려는 문명(文明)화 과정 중 일부로 여기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생각할 수 없네. 4 천 년 동안 수시로 사람을 잡아먹던 곳, 나도 여러 해 동안 그 속에서 함께 살아왔다는 것을 오늘에야 비로소 명백히 알았다. 큰형님이 바로 집안일을 관리하고 있을 때에 마침 누이동생이 죽었으니, 큰형님이 밥이나 반찬 속에 섞어 우리에게 몰래 먹였음에 틀림없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이동생의 고기 몇 점을 먹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는 내 자신의 차례다... _ 루쉰, <루쉰 소설 전집> <광인일기>, p48/1006


 "이봐! 돈 내고 물건 받아요!"

 온몸이 시커먼 사람이 라오수안 앞에 불쑥 나타났다. 두 자루 칼날 같은 눈초리에 라오수안은 질겁을 하여 몸이 반으로 오그라드는 듯했다. 그 사람은 커다란 한쪽 손은 그를 향해 벌리고, 한쪽 손에는 시뻘건 만두를 움켜쥐고 있었다. 시뻘건 것에서는 아직도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것으로 누구의 병을 고치려는 거요? _ 루쉰, <루쉰 소설 전집> <약>, p68/1006


 요약하자면, 지난 주에 읽은 <토지>독서 내용은 악(惡)과 무지(無知)로 정리될 듯하다. 우리가 자각하는 악(惡)과 마찬가지로 무지(無知) 역시 절대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으로부터 인지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실체 속에서 '절대선' 또는 '절대진리'가 아니라 '보다 선함'과 '보다 참됨'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우리 삶의 과정이고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런지를 <토지 2>의 치수와 함안댁의 죽음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악마란 호전적인 힘이 인간적으로 또는 신적으로 구체화된 것이고, 이러한 호전적인 힘이 우리 의식의 밖에서 지각된 것이다. 이러한 힘 - 우리 스스로는 이러한 힘을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듯하다 - 은 외경, 불안, 두려움, 공포와 같은 종교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_ 제프리 버튼 러셀, <데블>,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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