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데니소비치는 감옥과 수용소를 전전하면서 내일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내년에 또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계획을 세운다든가, 가족에 생계를 걱정한다든가 하는 버릇이 아주 없어지고 말았다. 그를 위해서 모든 문제를 간수들이 대신 해결해 주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이런 것이 훨씬 마음 편했다.
발밑만 보고 걸어다니란 말이지. 그러면, 어떻게 이곳엘 들어왔는지, 어떻게 이곳을 나갈 것인지 하는 생각을 할 시간이 없을 테니 말이야.
형식적으로 말한다면, 슈호프가 수용소에 들어온 죄목은 반역죄이다. 그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또 일부러 조국을 배반하기 위해 포로가 되었고, 포로가 된 다음 풀려난 것은 독일 첩보대의 앞잡이 노릇을 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도 인정했다. 그러나 어떤 목적을 수행할 계획이었는지는 슈호프 자신도, 취조관도 꾸며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목적이 있었다는 것만으로 결정을 내렸다.
작가는 작품 속에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 있는데, 그가 수용되어 있는 강제노동수용소라는 장소는 아무런 범죄 행위를 한 적도 없고, 어떤 특별한 정치적인 임무를 갖고 활동한 적도 없으며, 심지어는 특별한 정치사상을 가져 본 적도 없는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한 인물인 슈호프와 대비되어 당시의 지배 이데올로기의 아이러니와 모순을 날카롭게 드러내 준다. 즉, 작가는 이 인물을 스탈린 공포시대의 상징이며 정치적 억압의 한 수단이었던 혹독한 강제노동수용소에 배치시킴으로써, 스탈린의 정치적 허울과 억울한 수많은 약자를 무자비하게 억압하고 비극으로 몰아넣은 전형적인 한 예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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