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용황이 이 말을 좇았다. 그래서 고소의 아버지 고을불리(高乙弗利)의 묘를 발굴하여 그 시체를 싣고, 그 부고에 있는 여러 세대를 거쳐서 쌓아 온 보물을 거두고, 남자와 여자 5만여 명을 포로로 잡고, 그들의 궁실을 불 지르고 환도성을 파괴하고 돌아왔다.(21/103) - P21
"옛날에는 열에 하나를 세(稅)로 내게 하였는데, 천하에서 공정하고 올바른 것이었습니다. 위(魏)와 진(晉)시대에 내려와서 어진 정치가 쇠퇴하고 야박해져도 관전(官田)과 관우(官牛)를 빌린 사람도 그 세는 불과 10분의 6이었고, 스스로 소를 갖고 있는 사람이 이것을 반으로 나누었으니, 오히려 그 가운데 7~8을 빼앗지는 않았습니다."(37/103) - P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