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蜀)은 용을 얻었고, 오(吳)는 호랑이를 얻었으며, 위(魏)는 개를 얻었다." 형제간인 제갈량(諸葛亮, 181 ~ 234), 제갈근(諸葛瑾, 174 ~ 241) 그리고 사촌인 제갈탄(諸葛誕, ? ~ 258)이 각각 서로 다른 삼국(三國)에 종사한 것을 두고 말한 사람들의 평이다.


 <자치통감 資治通鑑> 70권에는 유명한 제갈량의 남만(南蠻)정벌과 출사표(出師表)가 나온다. 실력으로는 천하의 8할을 차지한 위나라에서도 출세할 수 있었건만, 유비를 따라 세상으로 나와 결국은 오장원(五丈原)의 별이 된 제갈량. <삼국지연의 三國志演義> 속에서 신출귀몰한 재주를 가졌으면서도, 끝까지 유비(漢 烈祖 昭烈皇帝 劉備, 161 ~ 223)에게 충성을 한 모습이 후세의 귀감이 되었다면, 오늘의 기준에서도 그 모습을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까.


 신은 본래 포의(布衣)로 몸소 남양(南陽, 하남성 南陽市)에서 밭을 갈며 진실로 난세 속에서 생명을 온전히 보존하려는 것이었기에, 제후들에게 저에 대한 소식이 전달되기를 구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먼저 돌아가신 황제께서는 신을 낮고 천하다고 생각하지 아니하시고 진실로 스스로를 굽히시고 저의 초막으로 세 번이나 돌아보아 주시어 신에게 당세에 해야 할 일을 자문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감격하여 드디어 먼저 돌아가신 황제에게 달려가겠다고 허락하였던 것입니다. 뒤에 상황이 기울어지고 넘어지는 때를 당하고, 패배한 군사가 되었을 때에 책임을 맡았으며, 위험하고 어려운 가운데 명령을 받들어온 지 21년이나 되었습니다. 먼저 돌아가신 황제께서는 신이 삼가면서도 신중하다는 것을 잘 아셔서 붕어하실 때 신에게 큰일을 맡기셨습니다._사마광, <자치통감 70>. p32/60


 오늘날의 기준에서는 대기업에서 촉망받는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탄탄대로를 갈 인재를 중소기업 사장이 데려다가 열정페이를 지급하면서 죽도록 혹사시킨 것으로 비춰질 수 있을 것인데, 그런 상황에서도 제갈량의 모습을 아름답게 볼 수 있다면, 그것은 '한결같음'이 아닐런지... 정사 <삼국지 三國志>에 실린 실제 역사가 대의(大義)의 역사는 아니었을지라도, 역사에 남겨진 어쩌면 바보같은 우직함이 우리가 <출사표>를 읽었을 때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이제 밝으신 공께서 정치를 하시면서 마침내 몸소 스스로 부서(簿書)를 대조하시며 종일토록 땀을 흘리게 되시니 역시 어찌 수고롭지 않겠습니까?"사마광, <자치통감 70>. p15/60


 제갈량은 세상을 다스리는 이치를 터득한 뛰어난 인재로서 관중, 소하와 비교할 만하다. 그러나 해마다 군대를 움직이고도 성공하지 못한 것은 아마 임기응변의 지략이 그의 장점이 아니었기 때문인 듯하다._진수, <삼국지 : 촉서> <제갈량전>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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