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뽕나무를 심고, 그것으로 누에를 치고, 누에고치에서 생사를 뽑는 일까지만 조선에서 했다. 질 좋은 원료를 값싸게 확보한 그들은 일본에서 비단을 짜가지고 서양과의 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남기고 있었다. 군산항에서 주로 쌀을 실어내는 것처럼 목포항에 집결시켜 실어가는 목화도 이익 많이 남기는 장사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총독부에서는 뽕나무 심기와 목화씨 뿌리기를 해가 갈수록 더 다그치고 있었다._조정래, <아리랑 5>, p203/247
조정래(趙廷來, 1943 ~ )의 <아리랑 5>에서는 본격적인 일제의 식민수탈이 그려진다. 군산이 쌀 수출항이었다면, 목포는 목화(면화) 수출항이었다. 쌀은 노동자들의 식량으로, 목화는 제조원재료로서 식민본국의 산업화를 뒷받침했다. 스벤 베커트 (Sven Beckert)이 <면화의 제국 The empire of cotton>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면화는 제국시대에 글로벌 상품으로 기능하고 있었으며, 이로부터 일본은 착실히 서구제국의 길을 따라갔음을 생각하게 된다.
여전히 규모도 작고 기술적으로도 뒤처진 유럽 면산업의 기반을 잡아준 것은 바로 제국의 팽창, 노예제, 토지 약탈로 요약되는 전쟁자본주의였다. 전쟁자본주의 덕분에 유럽의 면산업은 역동적인 시장을 얻었고, 기술력과 필수 원료에 접근할 수 있었다. 또한 전쟁자본주의는 자본 형성에도 중요한 추진 장치가 되었다._스벤 베커트, <면화의 제국>, p104
전쟁자본주의는 세계를 '내부'와 '외부'로 가를 수 있는 부유하고 강력한 유럽인들의 역량에 의지했다. '내부'는 모국의 법과 제도와 관습을 포괄했고, 국가가 부과한 질서의 지배를 받았다. 반대로 '외부'를 특징지은 것은 제국의 지배, 방대한 지역의 수탈, 원주민 학살, 자원 약탈, 노예화, 그리고 멀리 떨어진 국가의 효율적인 감시를 벗어난 민간 자본가들의 방대한 토지 지배였다._스벤 베커트, <면화의 제국>, p85
1910년대 토지조사사업으로 막대한 양의 토지를 강탈한 것은 제국주의 일본에게 막대한 농경지의 확보와 함께 저임금 노동자들을 동원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 자본주의는 1910년대 착실히 성장하고,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경제 호황을 맞이했음을 역사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임금을 주어 엄청난 수의 노동자들을 동원하고 그들의 작업을 감시하며 그들이 기술과 열정을 쏟게 하는 동안 새로운 딜레마가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공장을 벗어난 노동자들의 가정과 거주 지역에서 고용주의 권한은 훨씬 더 멀어졌다. 노동자들을 모집하고 규율을 시행하기가 어려웠던 이유는 노동조건이 끔찍했기 때문이다._스벤 베커트, <면화의 제국>, p307
군산과 목포에 지어진 근대식 항만, 신의주에 부설된 철도 등 SOC 설비가 제국의 '내부-외부'를 연결하는 통로였고, 이를 통해 수탈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아리랑 5>를 통해 다시 떠올리게 된다. 누군가는 이로부터 '근대화'의 징후를 발견하기도 하지만, '일본-조선'의 관계가 제국주의 '본국-식민지' 관계의 전형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식민 지배 기간 이루어진 조선의 발전이 '의도치 않은 낙수 효과'인지 아닌지 여부를 알기 위해서는 단순 증가율로 분석할 것이 아니라, 같은 기간의 일본과 조선 경제를 비교 분석해야 하지 않을까. 양국간에 이루어진 수출입 품목, 조건, 경제 성장률 비교 등 다방면에 걸친 분석을 통해 '경제성장'이라는 과실을 누가 가져갔는가를 볼 필요가 있다 여겨진다. 이는 전문적인 내용이 죌 것이니만큼 깊은 내용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살펴 보도록 하자.
신의주야말로 이름 그대로 일본사람들이 제멋대로 만들어낸 '새로운 의주'였다. 경의선 종착역을 땅 넓은 압록강변에 만들면서 그들이 지어 붙인 이름이 '신의주'였다. 그러니 역 뿐만이 아니라 도시 전체가 왜색인 것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p88/247)... 별로 볼품이 없었던 군산은 일본세상이 되면서 개명도시로 바뀌더니 느닷없이 부로 승격했고, 어느새 부윤자리가 12개의 부 중에서 세 번째로 좋은 벼슬자리로 꼽히고 있었다. 그건 순전히 일본으로 실려나가는 쌀이 만들어낸 힘이었다._조정래, <아리랑 5>, p90/247
한편, <아리랑 5>에서는 오랜 기간 중심도시였던 전주, 의주 등을 대신하여 군산, 신의주, 목포 등 이른바 신도시들이 일제 시대에 새롭게 떠오르는 모습이 그려진다. 시대가 변하면서 이러한 변화로 새롭게 떠오르는 이들이 생기는 것도 당연하고, 이들이 자신들에게 부와 권력을 안겨주는 새로운 조국 일본을 따르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라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친일'이 옳은 길이라고 말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국가'나 '민족'이라는 이데올로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주변 사람들의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의 발로 때문일까. 쉽게 단정짓기 어려운 문제라 여겨진다...
양치성이 그 가위눌리는 충격 속에서 느낀 것은 조선사람이라는 창피스러움과 부끄러움이었다. 그건 곧 일본사람들에 대한 부러움과 흠모로 이어졌다. 일본사람들이 왜 조선사람들을 그렇게 무시하고 얕잡아보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고, 그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_조정래, <아리랑 5>, p81/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