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도(于山島) 독도의 옛 명칭은 우산도다. 1454(단종 2년)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 '강원도 삼척도호부 울진현'조에는 "우산(于山)과 무릉(武陵) 두 섬의 현의 정동(正東) 해중(海中)에 있다. 두 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여,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 于山武陵二島 在縣正東海中 [二島相去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1900년에 반포한 '대한제국 칙령 41호'에는 관할 구역을 "울릉 전도(全島)와 죽도,석도(石島)"라고 하였다. '죽도'는 울릉도 동북쪽 가까이에 붙어 있는 죽도이고, '석도'는 우산도로서 순우리말로 '독섬', '돌섬' 등으로 부르던 독도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_최선운, 민병준, <해설 대동여지도>, p180
정병준(鄭秉峻, 1965 ~ )의 <독도 1947>은 독도에 대한 한일 양국의 주장이 1951년 일본과 연합국 사이에 맺어진 평화조약,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Treaty of San Francisco)를 전후로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상세하게 다룬 책이다. 독자들은 본문을 통해 한국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역사'에 근거한 반면,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국제법'에 근거한 주장이라는 사실과 이를 바라보는 국제사회의 입장도 함께 알 수 있다. <독도 1947>에서는 조약 초안 작성 단계에서는 독도를 한국령으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움직임은 패전국이었던 일본에 대한 배상책임을 보다 명확히 하려는 미국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했다.
1947년 1월 30일 로버트 피어리가 제출한 제1장 영토조항을 다룬 초안(Draft), 비망록, 지도 가운데 초안이 남아 있다. 비망록과 지도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문서의 제목은 "초안(Draft)"으로 되어 있다. 피어리가 만든 매우 간단한 2쪽짜리 문서는 이후 1947~1949년 국무부 대일평화 조약 초안 영토 조항의 원천이자 핵심이 되었다. 피어리는 대일평화조약의 영토조항 초안을 처음 작성할 때부터 제주도, 거문도, 울등도와 함께 독도(리앙쿠르암)를 "한국 근해의 모든 작은 섬들"에 포함시켰다는 사실이다. 또한 피어리의 영토조항 초안은 1947년부터 1949년까지 독도(리앙쿠르암)를 한국령으로 표시한 미국측 초안으로 이어졌다. 특히 피어리가 일본통이며, 일본에 우호적인 입장이었음에 비추어볼 때 독도가 한국령으로 명확히 규정된 것은 매우 중요하고 특별한 의미가 있다._ 정병준, <독도 1947>, p389
그렇지만, 1949년 일본에 '매료된' 미국인 시볼드가 등장하면서, 조약의 내용은 일본에게 유리하게 변경된다. '반공주의'와 '친일'을 가장 우선시한 시볼드에게 공산주의자인 재일한국인들'이 전후 일본의 불안요소라는 요시다 시게루(吉田 茂, 1878 ~ 1967)의 주장은 매우 의미심장했을 것이다. 이로 인해, 독도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 주장이 미국 내에서 받아들여지게 되고, 더 나아가 한국이 샌프란시스코 강화회담에 초청받지 못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독도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사건이 이 시점에 발생했다. 국교가 수립되지 않은 일본에서 미 국무부의 대표이자 주일정치고문이었던 시볼드(William J. Sebald)는 초안에 대한 검토의견서에 독도가 1905년 일본령이 된 이후 단 한 차례도 한국의 이의제기를 받지 않아 일본 영토라는 주장을 폈다... 미 국무부는 현지공관의 의견을 그대로 수용해서 1949년 12월 조약 초안을 수정했다. 여기에는 한일 주재 두 대사의 의견이 반영되어 한국의 대일평화협상 참가, 독도는 일본령이라는 조항이 새로 추가되었으나 조약 초안에는 전반적으로 시볼드의 친일적 견해가 대폭 반영되었다. 미 국무부가 독도를 일본령으로 잘못 표기한 이 초안의 존재는 이후 일본이 주장하는 독도의 일본 영유권, 대일평화조약에서 독도가 일본령으로 확인되었다는 주장의 가장 강력한 근거가 되었다._ 정병준, <독도 1947>, p375
시볼드의 권고 이후 국무부의 조약 초안 중 영토문제와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사항 두 가지가 사라졌다. 첫째 일본의 영토를 명백히 특정하는, 경계선을 긋는 표시방법, 둘째 일본의 영토범위를 명확히 보여주는 첨부지도가 그것이었다. 이는 일본 외무성이 가장 바라 마지않던 바였다._ 정병준, <독도 1947>, p467
사실, 한국의 조약 참가 반대 국가는 미국이 아닌 영국과 일본이었다. 일찍이 러시아를 상대로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에서 우정을 나눈 두 국가는 단결하여 한국의 조약 참여를 반대했고, 이들의 반대에 한국의 참여를 주장하던 미국도 결국은 이들의 손을 들어주게 되었다. 이로써 구한말 이후 거의 50여년 이상 일본의 침탈에 시달리던 최대 피해자는 조약 당사국이 되지 못하면서, 강화조약의 한계를 드러냈다.
회의에서 한국의 (대일)조약 참가희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정되었다.
"원래 (극동위원회) 11개국 이외 다른 국가들의 견해가 요청될 시점에 만약 한국 정부가 존재한다면, 한국정부의 대표가 한국측 견해가 피력할 기회를 부여받게 될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만약 의견수렴을 하는 그 시점에 한국정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미국대표단에 자문역 한 명 혹은 여러 명을 참가시킬 수 있을 것이다."
1947년 8~9월은 한국에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파국으로 치닫는 마지막 순간이었으며, 언제 한국정부가 수립될지 가늠할 수 없는 시점이었다... 영국은 대일평화조약에 한국이 참가하는 것을 최후까지 극렬하게 반대한 국가였다._ 정병준, <독도 1947>, p394
이와 함께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은 샌프란시스코 강화회담의 성격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한 해 전인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의 수립과 함께 한국전쟁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미국의 경계심을 커졌으며, 이로 인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일본에 대한 배상책임이 아닌, 공산주의 진영에 대한 전진기지로서 일본의 위상을 강화하는 조약으로 성격이 바뀐다.
한국전쟁의 발발은 일본의 지정학적/전략적 위상을 제고시켰다... 덜레스의 개인적 신념과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변화는 새로운 조약 초안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는 1947년 이래 미 국무부가 준비해왔던 대일징벌적 조약 초안과는 완전히 성격을 달리하는 새로운 조약 초안이었다. 덜레스의 요구는 첫째 간단한 초안일 것, 둘째 평화조약에 초점을 둘 것 등 두 가지였다. 국무부가 준비한 상세하고 복잡하며, 일본의 전쟁책임과 배상, 조약 발효 후 감시체제 등을 강조한 이전의 조약 초안들은 책상 위에서 치워졌다._ 정병준, <독도 1947>, p503
포츠담 선언의 정신은 일본령에 포함될 섬들을 구체적으로 특정하는 방식이었다. 이에 따라 1947년 이후 작성된 미 국무부의 대일평화조약 초안들에는 모두 일본령을 구체적으로 특정하고, 이를 표현하는 부속지도를 첨부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이는 1951년 4월 영국 외무성의 조약 초안과 부속지도에서도 마찬가지로 표현되는 방식이었으며, 기본적으로 포츠담 선언의 대일영토규정에 따랐던 것이었다. 그런데 1949년 11월 주일미정치고문 대리 시볼드가 일본의 심리적 불이익을 이유로 내세운 이래 일본령에 포함될 섬들을 특정하는 데 대한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반대가 제시되었다. 그 배경은 미소냉전의 격화였으며, 결정적 계기는 한국전쟁의 발발과 중공군의 참전이었다. 이러한 과정의 중간 결과물이 바로 1951년 3월 조약 초안이었다. 이는 일본령에 포함될 섬들과 일본령에서 배제될 섬들에 대해 구체적인 특정을 회피한 조약 초안이라고 할 수 있다._ 정병준, <독도 1947>, p521
결국, 미국 국무부 친일파 관료의 등장과 한국전쟁 등의 외부 요인으로 샌프란시스코 회담에서 한국은 초청받지 못했고, 강화조약 역시 일본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여기에 더해 이승만 정부의 적절치 못한 대응 역시 한국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불리하게 만들었다. 즉, 이승만 정부는 '대마도 對馬島'의 한국 귀속을 주장하면서 '대마도-파랑도-독도'등 3개섬에 대한 영유권을 함께 주장한 것이다. 한국이 말한 3개 섬 중 대마도에 대한 주장은 실효 지배 중인 영토에 대한 정치적인 주장으로, 파랑도에 대한 주장은 위치를 특정할 수 없는 섬에 대한 허무맹랑한 주장으로 국제사회에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독도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는 이들은 대마도, 파랑도에 대한 주장과 마찬가지로 독도에 대한 한국의 주장 역시 근거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진 부분은 외교적으로 분명 아쉬운 부분이다.
한국정부가 가장 절박하게 생각했던 문제는 귀속재산 처리였으며, 영토문제에 있어서 대마도를 기각한 대신 새로 독도, 파랑도를 요구했던 것이다. 즉, 독도문제는 대마도 요구가 기각된 다음에 제기되었으며, 요구될 때에는 파랑도와 함께 제시되었던 것이다.(p750)... 한국정부는 정치적 주장이었던 대마도 반환 요청이 기각된 이후 영토문제를 중시하지 않ㄴ았다는 인상이 강했다. 파랑도를 주장한 데서 드러나듯이 정부 스스로 명확한 확증근거를 갖지 못한 지역을 한번 주장해보자는 정도의 결의를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_ 정병준, <독도 1947>, p763
이처럼, <독도 1947>에서는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을 전후한 외교문서 분석을 통해 한국과 일본의 주장과 국제 사회의 입장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는 한 국가에 있어 중요한 영토 문제가 협상 당시의 국제 정세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과 함께 국력의 크기에 따라 자신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참여하지 못할 수 있다는 냉엄한 현실을 독도 문제를 통해 확인하게 된다.
1947년 독도 조사대의 귀환 이후 울릉도/독도 조사활동의 결과는 다양한 방법으로 공개되었다. 이를 통해 독도는 재발견되었고, 대중적 관심의 표적이 되었으며, 독도에 대한 사회적/문화적 관심과 인식이 제고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조사대에 참석했던 학자들에 의해 이후 한국의 독도 인식/정책과 관련한 주요 학설과 논리, 증거/관련 자료의 발굴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_ 정병준, <독도 1947>, p142
저자는 글을 1947년부터 시작한다. 이는 비록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이후에도 독도와 관련한 첨예한 대립이 있어왔지만, 우리가 독도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은 1947년 독도 조사대의 탐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어서 였을까. 1947년 독도 조사 이후 국토의 막내 독도에 대한 관심이 대중적으로 퍼져 나간 것이 국제법의 한계를 이겨내고, 우리 국토를 지켜낸 힘이라는 것을 저자가 이 책의 제목을 <독도 1947>로 지으면서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독도문제가 한일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한미/미일 관계에서도 폭발성을 지닌 문제임이 확인되자 미 국무부는 이 문제에서 자국의 위치를 결정자에서 중립자로 조정하기 시작했다. 덜레스가 애써 미국의 입장을 중립적 위치로 강조했음에도 미 행정부 내에서 한국을 비난하고 일본을 옹호하는 목소리는 잦아들지 않았다. 이는 1960년대까지 지속되었다._ 정병준, <독도 1947>, p9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