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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9 - 법과 정의 ㅣ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9
프리츠 로스 외 지음, 오토 브루너 외 엮음, 엄현아 옮김,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기획 / 푸른역사 / 2021년 1월
평점 :
정의에 대한 법의 의존성과 관련되는 다양한 견해들은 법의 이해와 적용에 핵심적인 두 분야, 즉 법원론 法源論 Rechtsquellenlehre과 법 적용론 Rechtsanwendungslehre에 영향을 남겼다. 1)번 관점에서 볼 때 독립적 자연법은 구체적인(실증적인) 규정에서 직접적인 법원(法源, Rechtsquelle)이 된다. 이에 반하는 실정법은 무효이며, 더욱이 실정법의 흠결은 자연법으로 메울 수 있다. 따라서 실증적 규정을 해석하거나 적용할 때에는 자연법 원칙이 우선이다. 두 번째로 언급되는 법실증주의적 입장에서는 자연법을 법원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법을 적용하는 데에 초실증적인 원칙은 본래 중요하지 않는데, 다만 모든 법에는 해석이 필요하고 정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법을 적용할 때 주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_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9 : 법과 정의>, P14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 1923 ~ 2006)의 개념사 사전 19번째 주제는 법과 정의(Recht, Gerechtigkeit)다. 본문에서는 고대 그리스 이래 '정의'라는 이상을 구현하기 위한 현실적인 방법으로 '법' - 특히, 실정법 - 의 변천이 다루어진다. 거칠게 요약해서 '정의 正義'는 보다 높은 단계의 '이상 理想'이라면, '법 法'은 사회를 규정하는 강제력으로 표현될 수 있겠다.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법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이 안에 담기는 내용인 '정의'에 대한 인식도 시대에 따라 달라졌는데, 이 부분이 개인적으로 눈에 띈다. 특히, 사회주의 이론의 등장 이후 '정의'에 '(경제적인) 평등'의 내용이 추가되면서 근대 이후 '정의'에 대한 큰 개념 변화가 일어났다.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s는 '정의'를 미덕이라고 보는 점에서 플라톤을 따랐고, 이로써 근대에까지 이르는 확고한 전통을 마련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것을 행한다"라는 플라톤의 정의가 사회적인 관계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며 비판했다. 정의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미덕이다. 정의가 가장 완벽한 미덕인 이유는 인간이 정의를 자신에게 행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행하기 때문이다._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9 : 법과 정의>, P25
하버마스 Habermas의 "실용적 담론 paraktischer Diskurs" 이론은 독일에서, 그리고 롤스 Rawls의 "정의 이론 Theorie de Gerechtigkeit"은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롤스는 칸트와 사회 계약설을 인용해 두 가지 정의의 원칙을 세운다. 1) 모든 사람은 동일한 시스템에서 누구에게나 적용 가능한 평등한 기본적 자유가 보장되는 가장 포괄적인 시스템에 관하여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 2)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불평등은 (a) 그것이 모든 이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도록, (b) 모든 이들에게 개방된 지위 및 공직과 결부될 수 있게 생성되어야 한다. '실정법'과 '정의'의 관계는 저항권을 둘러싼 논쟁을 통해 다시 담론화되기 시작했다.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9 : 법과 정의>, P143
상대적으로, '법'의 개념은 '정의'에 비해 오히려 안정적으로 비춰진다. 이는 스토아 학파 이후 정착된 '영원법 - 자연법 - 인정법'의 구도가 근대 이후에도 유지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세계 법칙인 '영원법'은 기독교의 '신(神)'의 의지와 결합되며, 절대적인 법칙으로 자리매김하며, '자연법'은 신의 의지의 현실로의 적용, '인정법'은 '실정법'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구도를 만든 이가 아우구스티누스(Sanctus Aurelius Augustinus Hipponensis, 354~430)인데, 이를 <삼위일체론>에 의 구도에 맞춰본다면, '영원법'은 성부(聖父), '자연법'은 성자(聖子), '인정법'은 성령(聖靈)에 해당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소피스트들은 '자연'과 '제정법'을 엄격하게 구별했지만 그 후 스토아학파들은 우주적 관찰 방법을 통해 '법'과 '정의'의 관계를 더욱 발전시키게 될 특색 있는 추론 관계인 세계법칙(영원법 lex aeterna) - 자연법(lex naturalis) - 인정법(lex humana)을 탄생시켰다. 영원법은 이성의 규범으로서 모든 현세의 존재를 규정하며, 세계의 이성이다. 이는 동시에 인간 본성의 법칙(자연법 lex naturalis), 인간 본성의 올바른 이성을 구성한다._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9 : 법과 정의>, P30
영원법 lex aeterna은 하나님의 의지에서 나온 것이다. 그 내용은 하나님의 불변의 창조 질서로, 스토아의 세계법칙을 대신한다. 자연법은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주관적인 것으로 전환된다. 즉 자연법은 영원법을 인간의 정신 속에 옮겨놓은 것으로, 주관적인 원칙이며 정의가 본래 타고난 형상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연법의 원칙으로 다음 속담을 언급했다. "자신이 겪기를 원하지 않는 것은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 Nemini faciant, quod pati nolunt."_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9 : 법과 정의>, P40
영원법과 자연법이 이와 같이 주어진 것이라면, 근대 이후 법에 대한 논의는 실정법에 집중된다. 영원법이 신의 의지와 연관된다면, 실정법은 인간의 자유 의지와 연계된다. 특히,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 ~ 1778)는 사회 계약을 통한 일반의지의 결합이 '국가'임을 밝혔는데, 근대 이후 실정법의 주제는 '국가'와 이에 대한 '저항권'의 논의로 넘어가게 된다...
존재만으로 이미 진실하고 정당한 국가 의지 Staatswille로 나아가는 길을 루소는 "volonte generale", 일반 의지 Gemeinwille에서 발견한다. 일반 의지는 사회적 결합을 위한 토대이다. 일반 의지는 개별 이익이 서로 일치하여, 단순한 "특수 이익 Sonderinteresse"이 아닌 전체 이익의 일부로 등장하는 경우에만 형성된다. 개별 의지의 총합은 만인의 의지 der Wille aller이다. 개별적인 특수 이익만을 목적으로 하는 개인 의지는 서로 상반되기 쉽고, 조정 과정에서 서로를 무력화시킨다고 루소는 생각한다. 결국 남는 것은 개별 의지 중에서 모두에게 공통된 부분인 "일반 의지"이다. 일반 의지가 무엇인지는 다수에 의해서 결정된다.(p88)... 전체 국민의 자유로운 합의에서 나온 모든 법은 그것이 일반 의지에도 상응한다면 모두의 개별 이익을 가능한 한 많이 반영하기 때문에 공정하다. 따라서 모든 국법은 공정하다._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9 : 법과 정의>, P88
개념어 사전에서는 플라톤(Platon, BC 428 ~ BC 348)이 <폴리테이아 Politeia>에서
'정의'를 정체를 유지한 주요 덕목으로 정의한 이후, 이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법'의 변천사를 보여준다. 그리고, 독자들은 고대 그리스 시대에서도 '정의'와 '법'에 대한 통일된 정의가 내려지지 않아 오랜 기간 이들 사이에 좁힐 수 없는 차이가 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법원들, 특히 연방헌법재판소는 국가사회주의 불법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라드브루흐 공식 Radbruchsche Formel"을 적용했는데, 이에 따르면 부당한 실정법도 원칙적으로 구속력을 유지하지만, "실정법과 정의 사이의 모순의 정도가 너무 지나쳐서 해당 법이 '부당한 법으로서 정의에서 벗어나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않다" 는 내용이다.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9 : 법과 정의>, P142
개인적으로 과거 '영원법'으로 규정된 영원불변한 가치로서 '정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과연, '불변의 가치'로서 '정의'는 존재하는 것일까? 과거의 정의와 오늘날의 정의가 다른 의미를 갖는다면, 과거 제정일치 시대의 정의가 담겨있는 종교 율법이 오늘날 우리 삶을 구속할 수 있는 것일까? 등등. 쉽게 답할 수 없는 물음이기에 이에 대해서는 천천히 생각하기로 하되, 개념사 사전을 통해 근대 법전의 법리(法理)에 대해 생각해 봤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이번 리뷰를 갈무리하자...
전통 자연법 이론에서 논란이 되었던 전제인 존재 Sein에서 당위 sollen를 이끌어 낸 방식을 처음으로 단호하게 비판한 이가 흄 Hume이었다... 흄은 인간 행위의 최종 목적을 규정할 능력이 이성에게는 없다고 보았다(p106)... 칸트는 법과 도덕의 내용적 관련성, 즉 윤리와 법의 기본 원칙이 동일하다고 굳게 믿는다. "그러니까 법 이론과 선 이론은 서로의 의무가 다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무에서 발생하는 의무적인 행위"를 요구하는 윤리학과는 달리 법은 - 그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 외적으로 합법적인 행위라면 만족한다는 점에서 "다르다는 말은 틀리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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