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년 2 - 사건과 목격자들 3.1운동 100주년 총서 2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원래 2021년 3.1절을 맞이해서 나름의 계획이 있었다. <3.1운동 100주년 총서>를 통해 3.1 독립항쟁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살펴보려 했던 당초 계획은 예정에 없던 일들로 인해 다소 밀리게 되었다. 비록 100주년으로부터도 몇 년이 지났고, 2021년 3.1절도 지났지만 읽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 때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늦은 계획을 시작한다. 총서 중 1권은 메타 역사로서 사건에 대한 해석에 대한 서술을 담고 있기에, <3.1운동 100년 2 사건과 목격자들>부터 들여다 보자. 


 '고종의 독살설'은 조선인이라면 누구나 일제에 대한 민족적 저항감을 고취할 수 있는 소문이었고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그러나 3.1운동의 정신은 고종에 대한 충군의식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p59)... 국권 피탈의 현실 속에서 민중의 눈에 비친 조선 왕실의 모습은 더 이상 민족의 구심점이 될 수 없었다. 당시 일제가 수집한 민심 동향 중에 '고종이 자살을 했다고 한다면 그건 한국병합 당시에 했어야 한다'는 지적을 그러한 조선 민중의 정서를 잘 보여주고 있다. 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2 사건과 목격자들>, p61


  <3.1운동 100년 2 사건과 목격자들>에서 제기하는 새로운 해석들은 평화운동으로만 인식되었던 3.1 독립항쟁을 다시 보게 만든다. 고종(高宗, 1852 ~ 1919)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독살설이 민중의 분노를 자아내고, 이를 촉매로 만세 시위로 이어졌다는 기존의 해석과는 달리, 본문에서는 마지막 황제의 죽음이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과거'와의 단절로 일반에게 받아들여졌다는 점이 언급된다. 개인적으로 이 지점에서 새로운 시대를 갈망했던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 1894)을 연상케 된다. 또한, 1925년 일왕의 항복선언으로 무조건 전쟁을 중단하고 항복한 일본제국의 신민들에 비해, 1919년 당시 황제의 사망을 과거의 단절로 인식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한 우리 선조들의 의식을 비교해 볼 때, 과연 어느편이 더 진정한 근대인(近代人)의 모습에 가까운 것인가.


 보통 '네이션(nation)'은 '국민' 혹은 '민족'으로 번역되지만, 윌슨은 공통의 언어와 문화 등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에스닉(ethnic) 집단이라는 뜻에서 그 단어를 사용한 것은 아니다. 윌슨은 네이션을 역사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윌슨은 '네이션'과 '피플(people)'이라는 말을 구별해 사용하고 있다. 네이션에는 해당하지 않지만, 장래 독립을 원하는 특정 민족집단을 언급하는 경우 피플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요컨대 조선에 민족자결이 적용되기 위해서는 윌슨에게 조선 민족이 피플이 아니라 네이션이라고 인정될 필요가 있었다. 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2 사건과 목격자들>, p73


 또한, 본문에서는 3.1 항쟁 이전 2.8 독립선언의 의의에 대해서도 살핀다. 동시에, 2.8 독립선언에 담긴 내용이 얼마나 전략적이었던가를 조명한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독립선언서에 담긴 내용이 단순히 울분을 토하는 수준이 아니었고, 열강들을 움직이기 위한 논리체계가 담긴 치밀한 전략의 산물임을 새롭게 배우게 된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네이션'이 아닌 '피플'로 대우받게 되었을 때, 독립투사들의 선택이 사회주의로 흐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 아니었을까. 제국주의 열강들의 모임인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서는 (헤이그)특사로 받아들여지지도 못한 반면, 코민테른에는 대표를 파견할 수 있었던 당시 상황에서 바라본다면,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당사자 이자, 일본의 우방 미국 보다 혁명 러시아가 더 가깝게 느꼈던 것은 이념을 떠나 너무도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특히 여운형의 청원서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문명 민족으로서 오랜 역사를 가졌고 민주주의를 달성할 수 있다는, 조선 민족이 네이션이라는 근거를 제시한 뒤 윌슨의 말을 인용하며 독립을 간청하는 구성이다. 일방적으로 민족자결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그 민족자결의 대상인 네이션을 인정받기 위한 필요조건을 분석한 뒤 전략적으로 작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2 사건과 목격자들>, p77


 또한, 3.1 항쟁 이후 제암리에서 이루어진 학살과 제노사이드(genocide)의 관계를 살피는 본문의 내용을 통해 우리는 1920년대 일제의 소위 문화통치(文化統治) 역시 민족문화말살이라는 거대 전략의 일부였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거대한 제노사이드 상황에서 평화시위로 시작된 3.1 항쟁이 1920년대 이후 간도 지역에서 무장 투쟁으로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변모라 할 것이다.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 법학자 라파엘 렘킨(Raphael Lemkin, 1900 ~ 1959)이 정의한 제노사이드란 어떤 행위를 일컫는가? "국민 집단의 생명의 본질적 기초를, 그 집단 자체를 절멸시킬 의도로, 파괴하려고 하는 갖가지 행위가 연결된 기도(企圖)이다. 그 기도의 목적은 국민 집단의 문화와 언어, 국민감정, 종교, 경제의 존재를 해체하거나 그 집단에 속하는 개인의 인신의 안전, 자유, 건강, 존엄과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다. 제노사이드는 통일체로서의 국민 집단을 향해 벌어지며, 그 행위가 개인에게 향해지는 것은 그 개인의 특성으로 인함이 아니고 그 국민 집단의 일원인 것으로 인한다." 이것이 렘킨이 정의한 제노사이드의 첫 형태였다. 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2 사건과 목격자들>, p156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른바 '민족대표 33인'을 기준으로 3.1 항쟁이 천도교와 개신교 지도부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졌다는 단편의 기억을 갖지만, 책에서는 유림(儒林)의 역할에도 주목한다. 통신수단이 오늘날처럼 발달하지 못한 시기, 서울과 이북 6개 도시에서 시작된 항쟁이 빠른 시기에 전국으로 확대될 수 있었던 것에는 보수적인 유림의 역할이 컸다는 것이다. 우리는 3.1 항쟁 속의 유림의 역할을 통해 진정한 보수의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유림(儒林)은 일반적으로 3.1운동에 관한 주요 담론에서 배제되어왔다. 그들의 동선은 3.1운동의 '혁명성'과 '근대성'에 몰두하는 연구자들에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유림은 3.1운동을 가까이에서 목격했고 지방 만세시위에 지도력을 발휘한 주요 토착세력이었다. 그들은 고종의 급서 소식을 접하자 깊은 충격에 빠졌고, 인산을 지켜보기 위해 무리를 지어 상경했으며, 2월 말과 3월 초 경성에 대규모 인파를 형성한 장본인이었다. 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2 사건과 목격자들>, p249


 이처럼 <3.1운동 100주년 총서 : 2 사건과 목격자들>은 우리에게 3.1 항쟁의 새로운 의미를 일깨운다. 나라를 잃은 임금의 죽음을 슬퍼하던 이들의 분노에 찬 감정 표현이 아닌, 1919년 베르사이유 평화조약을 전후한 국제정세 속에서 평화롭게 독립을 쟁취하고자 노력한 깨어있는 민중들의 모습을 우리는 본문을 통해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