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3월 1일 경성의 경우는 1만여 명의 학생이 중견이 되어 독립만세를 외치고 시위운동을 했는데 돌 하나 던지는 자가 없어 우리 경계대도 이에 대해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던 상태였다. 만약 그들이 폭동적 행위를 보였다면 우리 관헌의 손으로 그들을 모조리 체포할 수 있는 많은 수단과 방법이 있었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여학생을 선도로 하여 단지 만세를 연호하며 행진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 고압 수단을 취하면 오히려 위험해질 것을 우려하여 자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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