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광은 결과론으로 진(秦)이 후에 이들 6국(楚, 燕, 齊, 韓, 魏, 趙)을 통일했기 때문에 진의 기년을 역사를 쓰는 기준으로 삼기로 하였다. 이 해는 소양왕 52년이기 때문에 사마광은 이 해 즉 소양왕 52년부터를 '진기(秦紀)'로 하고 역사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통감절요>를 쓴 강지는 아직 주 왕조의 끄트머리가 남아 있으므로 사마광의 <자치통감>처럼 <진기>로 쓸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직 주 왕실의 혈통이 비록 왕위에 있지는 않지만 동주군(東周君)으로 있기 때문이다._권중달, <평설 자치통감 6 : 진시대1> 中 우리에게 <자치통감>의 주요 내용을 간추려 정리한 것으로 알려진 <통감절요>. 그렇지만, 주요 내용을 꿴 실이 유가(儒家)의 사상임을 <평설 자치통감>에서는 강조한다. 역사의 사실을 어떻게 편집하는가를 리메이크 음악에서의 편곡(編曲), 영화에서 편집(編輯)에 비할 수 있을까. 수없이 존재하는 사건의 조각들을 역사가의 관점, '~게 해야 되는' 당위의 법칙으로 꿰어낸 역사책이라는 목걸이 속에서 다이아몬드가 이미테이션 보석으로 다르게 세공된 것은 아닌지를 독자들은 끊임없이 의심하며 읽어야 함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