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실천이성비판 - 개정판 ㅣ 대우고전총서 5
임마누엘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 / 아카넷 / 200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A226 V125 최고선을 위해 전제되어야만 하는 것인 한에서, 자연의 최상 원인은 지성과 의지에 의해 자연의 원인(따라서 창시자)인 존재자, 다시 말해 신이다. 따라서 최고의 파생적 선(즉 최선의 세계)의 가능성의 요청은 동시에 최고의 근원적 선의 현실성, 곧 신의 실존의 요청이다. 무릇 최고선을 촉진함은 우리의 의무였다. 그러니까 이 최고선의 가능성을 전제하는 것은 우리의 권한일 뿐만 아니라 요구인 의무와 결합된 필연성이다. 최고선은 오로지 신이 현존한다는 조건 아래서만 생기므로, 그것은 신이 현존한다는 그 전제를 의무와 불가분리적으로 결합한다. 다시 말해 신의 현존을 상정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필연적이다.(p221) <실천 이성 비판> 中
<실천 이성 비판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 >에서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는 '인간이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 하는 물음을 던지고, 이에 대해 선(善)을 행하는 것이라고 답한다. 뒤이어, '선을 행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실천해야하는가'라는 다음 질문이 따라나오게 되는데, <실천 이성 비판>은 이 두 번째 질문에 대해 논리적으로 답을 한다. 본문에서 칸트는 덕과 행복이 일치된 최고선이 성취된 곳을 '신의 나라 Reich Gottes'라고 부른다. 신의 나라를 현실에서 이룩하도록 노력하는 것. 이것이 칸트가 생각한 인간의 길이고, 물음에 대한 답이다. 이를 먼저 확인하고 이번 리뷰에서는 실천 원칙으로부터 우리가 행해야할 바를 순차적으로 따라가 보도록 하자.
A35 V19 실천 원칙들은 의지의 보편적인 규정을 함유하는 명제들로서, 그 아래에 다수의 실천 규칙들을 갖는다. 이 원칙들은, 그 조건이 주관에 의해서 단지 주관이 의지에 대해서만 타당한 것으로 간주될 때는, 주관적이다. 즉 준칙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 조건이 객관적인 것으로, 다시 말해 모든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에 타당한 것으로 인식되면, 객관적이다. 즉 실천 법칙들이다.(p73) <실천 이성 비판> 中
칸트는 실천 원칙들이 법칙이 되기 위해서는 객관적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객관성을 결여한 실천 원칙들은 준칙에 불과하며, 이것은 도덕의 실천 원칙에서도 마찬가지 때문에, 도덕법칙을 세우기 위해서는 객관성을 충족시키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만 인식할 수 있고, 이는 법칙을 세우는데 장애요소가 된다.
A38 V21 욕구 능력의 객관(질료)을 의지의 규정 근거로 전제하는 모든 실천 원리들은 모조리 경험적인 것이며, 어떠한 실천 법칙도 제공할 수가 없다.(p76)... A41 V23 모든 질료적인 실천적 규칙들은 의지의 규정 근거를 하위의 욕구 능력에 둔다. 그리고 의지를 충분하게 규정하는 순전히 형식적인 법칙이 전혀 없다면, 어떠한 상위의 욕구 능력도 인정될 수 없을 것이다.(p78) <실천 이성 비판> 中
A71 V42 에피쿠로스의 행복설에서 열거된 원리들은 모두 질료적이다. 둘째로, 그것들은 가능한 모든 질료적 원리들을 포괄하고 있다. 이로부터 마지막 결론이 나온다. 질료적 원리들은 최상의 도덕법칙으로는 아주 부적합하기 때문에, 그에 준거해서 우리의 준칙들에 의한 가능한 보편적 법칙 수립의 순전한 형식이 의지의 최상의 직접적인 규정 근거를 이뤄야만 하는 순수 이성의 형식적 실천 원리가 유일하게 가능한 원리이며, 이것은 정언 명령들, 다시 말해 (행위들을 의무로 만드는) 실천 법칙들로 적합하고, 판정할 때나 인간의지를 규정함에 있어서 그에 적용할 때 윤리성의 원리로 적합하다.(p107) <실천 이성 비판> 中
또한, 우리가 욕구하는 모든 것은 경험적인 것이기에, 우리는 경험으로부터 객관적인 법칙을 가져올 수 없게 된다. 때문에, 칸트는 도덕의 법칙이 '정언 명령'의 형태로 선험적으로 주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라 결론 내린다.
A55 V31 순수 실천 이성의 원칙 :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p91)... A56 순수 이성은 그 자체만으로 실천적이고, 우리가 윤리 법칙이라고 부르는 보편적 법칙을 (인간에게)준다.(p93) <실천 이성 비판> 中
A52 V29 실천 법칙의 질료, 다시 말해 준칙의 객관은 결단코 경험적으로밖에는 주어질 수 없고, 그러나 자유의지는 경험적인 (다시 말해, 감성 세계에 속하는) 조건들에 대해 독립적으로 규정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므로, 자유의지는 법칙의 질료에 대해 독립적으로, 그러면서도 법칙 안에서 규정 근거를 발견해야만 한다. 그런데 법칙의 질료를 제외하면 법칙 안에는 법칙 수립적 형식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함유되어 있지 않다.(p88)... 자유와 무조건적인 실천 법칙은 상호 의거한다...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의식되는 것은 도덕법칙이다. 도덕 법칙은 우리에게 맨 처음에 주어지는 것이다.(p89) <실천 이성 비판> 中
'자유'는 이성 체계에 있어 가장 기초가 되는 개념이다. 이에 반해, '자율'은 의무에 대한 유일한 원리다. '신의 나라'에서 이성은 자유에 기초하지만, 시공간의 제약을 안고 경험적으로 물자체를 인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도덕 법칙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때문에, 우리가 알아야 할 개념들은 도덕법칙에 의해 간접적으로 규정되어지기에, 우리가 선(善)을 행하기 위해서는 이에 복종해야 한다.
A111 V63 선악의 개념은 도덕법칙에 앞서서가 아니라, (얼핏 보면 심지어 이 개념이 도덕법칙의 기초에 놓여야 할 법하지만), 오히려 (여기서 보이는 바대로) 도덕법칙에[의] 따라서[뒤에] 그리고 도덕법칙에 의해서 규정될 수밖에 없다.(p138) <실천 이성 비판> 中
A5 V4 무릇 자유 개념은, 그것의 실재성이 실천이성의 명증적인 법치에 의해 증명되는 한에 있어서, 순수 이성의, 그러니까 사변 이성까지를 포함한, 체계 전체 건물의 마룻돌[宗石]을 이룬다. 그리고 아무런 받침대도 없이 순전한 이념들로 사변 이성에 남아 있는 (신이니 [영혼의] 불사성이니하는 등의) 여타의 모든 개념들은 이제 이 개념에 연결되어, 이 개념과 함께 그리고 이 개념을 통하여 존립하여 객관적 실재성을 얻는다.(p52) <실천 이성 비판> 中
A58 V33 의지의 자율은 모든 도덕법칙들과 그에 따르는 의무들의 유일한 원리이다. 이에 반해 의사의 모든 타율은 전혀 책무를 정초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책무 및 의지의 윤리성 원리에 맞서 있다. 즉 법칙의 일체의 질료(곧, 욕구된 객관들)로부터의 독립성과 동시에 준칙이 그에 부합해야 하는 순전히 보편적인 법칙 수립적 형식에 의한 의사의 규정에서 윤리성의 유일한 원리가 성립한다.(p95) <실천 이성 비판> 中
그렇다면, 도덕법칙의 근거가 무엇이기에 우리는 여기에 복종해야 하는가? 이는 도덕법칙이 '우리 안의 신(Deus in nobis)'에 의한 준엄한 명령이기 때문이다. 도덕법칙에 복종한다는 것은 이성이 인도하는 바에 따라 최고선에 한걸음씩 가까이 간다는 것이기에 우리는 도덕법칙에 복종해야 한다. 이러한 칸트의 주장은 정언명령을 깨달아, 끊임없이 실천해 최고선에 도달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것으로 정리되는데,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서 불교의 돈오점수(頓悟漸修)를 떠올리게 한다.
A145 V82 도덕법칙은 곧 최고 완전 존재자의 의지에 대해서는 신성성의 법칙이고, 그러나 모든 유한한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에 대해서는 의무의 법칙이자, 도덕적 강요의 법칙이며, 법칙에 대한 존경을 통해 그리고 자기 의무에 대한 외경에 의해 이성적 존재자의 행위들을 규정하는 법칙이다... 우리는 이성의 훈육 아래에 서 있는바, 우리는 우리의 모든 준칙들에서 이 훈육에서 아무것도 덜지 않도록 이에 복종할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p165) <실천 이성 비판> 中
A233 V129 도덕법칙은 순수 실천이성의 객관이자 궁극 목적인 최고선의 개념을 통해 종교에, 다시 말해 모든 의무들을 신의 지시명령[계명]들로 인식하는데에 이른다. [도덕법칙은 의무들을 곧] 남의 의지의 제재[制栽], 다시 말해 임의적인, 그 자신 우연적인 지령들로서가 아니라, 각자의 자유로운 의지 자신의 본질적인 법칙들로 인식하는 데에 이른다.(p226) <실천 이성 비판> 中
<실천 이성 비판>에서는 이와 같이 인간 인식의 한계로 최고선을 알 수는 없지만, 정언명령을 통해 최고선에 이르는 길이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데, 이로부터 예전의 경험을 떠올리게 된다.
예전 깊은 산중에서 너무도 짙은 어둠 속에 놓여 길을 잃었던 적이 있었다. 계속 같은 자리만 맴도는 듯한 느낌과 나무들에 둘러싸여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을 때, 들려오던 물소리.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기에 물소리를 따라 계곡을 내려가면 산 아래로 내려갈 수 있다는 생각은 지친 나를 일으켜 세웠고, 시간은 걸렸지만, 내려올 수 있었다. 칸트가 보여주려 한 희망이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칸트의 희망이 더 가슴 벅차게 다가오는 것은 희망의 소리가 밖이 아닌 내 안에 있다는 것 때문일 것이다. <실천 이성 비판>을 통해 희망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면서 이번 리뷰를 갈무리한다.
A237 V131 우리 인격의 인간성은 우리 자신에게 신성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이것은 이제 당연한 결론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도덕법칙의 주체요, 그러니까 그 자체로 신성한 것의 주체이며, 이 주체를 위하여 그리고 이 주체와 일치해서만 도대체 무엇인가가 신성하다고 말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도덕법칙이 자유의지인 인간 의지의 자율에 기초해 있고, 자유의지는 인간의 보편적 법칙들에 따라 반드시 그가 복종해야만 할 것에 동시에 일치할 수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p229) <실천 이성 비판>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