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시간은 셋인데 과거에 대한 현재, 현재에 대한 현재, 미래에 대한 현재라고 하는 편이 적절하다. 이 셋은 영혼 속에 존재하는 무엇이고 다른 곳에서는 이것들이 안 보이며, 과거에 대한 현재는 기억(記憶)이고 현재에 대한 현재는 주시(注視)이며, 미래에 대한 현재는 기대(期待)다.(11권 20,26)...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기대에 해당하는 영역은 짦아지고 기억에 해당하는 영역은 길게 연장된다.(11권 28.38) <고백록> 


 아우구스티누스(Sanctus Aurelius Augustinus Hipponensis, 354 ~ 430)에게 '시간'은 인간의 개념이다. 하느님(神)의 시간은 영원이며 불변이다. '시간'과 '공간'마저 창조된 것이기 때문에, '창조 이전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고, 시간은 인간에게 있어, '현재'로 존재한다. 우리는 영혼 안에서 시간을 가지고, '미래->현재-> 과거'라는 일련의 흐름으로 통해, 생명의 확장이 일어나게 된다. 이처럼 끊임없는 시간의  확장을 통해 하느님께  영혼이 흘러간다는 것이 아우구스투스의 '시간론'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시간을 연속적으로 바라본다면,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 1905 ~ 1997)에게 시간은 연속적이되 각자 의미를 가진 독특한 상황들로 정리된다. 프랭클은 <의미를 향한 소리없는 절규>에서 (의미있는) 시간이 가진 '카이로스'의 특성에 주목한다.


 상황들은 각자 독특하고 유일한 것이고, 의미도 각자 독특하고 유일한 것이기 때문에 이제 "상황에 대응해 뭔가를 할 가능성"도 각자가 역시 독특하고 유일한 것이다. 그것은 "카이로스 Kairos"의 특성을 갖고 있다.... 상황이 부여한 가능성을 실현하기만 한다면, 상황이 붙들고 있는 의미를 채우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 가능성을 현실로 전환시킬 수 있다. 그렇게 한번 하기만 한다면 '영원히' 지속되고, 더 이상 일시성에 시달리지 않게 된다.(p61) <의미를 향한 소리 없는 절규> 中


 카이로스는 주관의 시간이며, 기회(機會)다. 빅터 프랭클의 말은 이 기회를 잘 살려 적절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순간을 사는 것이 아닌, 영원을 살 수 있다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카이로스에서 흐로노스로의 전환. 이것은 순간의 영원으로의 전환이며, 주관의 시간이 객관의 시간으로 흐름을 의미한다. <한국인이 캐낸 그리스 문명>에서 흐로노스(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의 차이를 살펴보면서 다음으로 넘어가자.


 '흐로노스 chronos"는 우리가 잘 아는 베테랑 할아버지, 시간의 아버지 Father Time, 즉 누구나 인식할 수 있는 객관적인 시간을 의미한다. 반면, "카이로스 Kairos"는 완전히 반대의 예측 불가능한 주관적인 시간이다. 객관적인 시간이라는 것은 바로 아이작 뉴턴이 얘기하는 시간의 특징 aquabiliter fluit - 즉, 강의 물이 항상 일정하게 흐르듯 영원히 고정된 시간이 바로 흐로노스이다.(p35)... 그에 반해서 주관적인 시간 "카이로스"는 흔히 "기회 opportunity"라고 번역되기도 하는데, 이는 일정하게 아주 "적절한 때 right timing"을 의미한다. 흐로노스가 신적인 우주의 영원한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인간세상의 찰나, 즉 짤막한 현재의 시간이다.(p37)' <한국인이 캐낸 그리스 문명> 中


 빅터 프랭클은 각 시간이 나름의 의미가 있지만, 과거에 우리의 지나간 삶이 담긴 저장소라 해석한다. 그런 면에서 '과거에 대한 현재는 기억'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연속적 시간론을 떠올리게 된다. 


 지나간 시간(과거) 속에서는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고, 아무것도 잃어버릴 게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이 과거에 영원히 저장된다. 사람들은 대부분 일시성의 그루터기가 가득한 황야만 본다... 의미들은 독특하고 유일하기 때문에 영원히 변한다. 그러나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다. 삶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다.(p62) <의미를 향한 소리 없는 절규> 中


 반면,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 ~ 1995)의 시간론은 철저한 분리를 전제 한다. 레비나스 초기 철학에서 자아는 현재에서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는 작업을 '홀로서기(hypostase)'는 말로 표현하면서, 연속적인 흐름보다는 관계성(關係性)에 주목한다. 이는 레비나스 철학 중 '타자와의 대면'으로도 연결되겠지만, 리뷰 몫으로 넘기도록 하자.

 

 지금, 곧 현재는 과거와의 단절을 전제한다. 현재라는 순간에 사람은 홀로 선다. 현재는 언제나 지나가기 때문에 홀로서기를 우리는 언제나 확인해야 한다. 홀로서기는 과거를 통해 설명될 수 없다. 현재는 항상 새로운 시작이고, 그렇기 때문에 현재는 과거와 미래 사이의 한 순간이기 이전에 자기 자신을 새로운 시작으로 긍정하는 그 무엇, 곧 자아(自我)와 관계한다. 자아는 현재 이 순간에 그 무엇, 곧 자아(自我)와 관계한다.(p128) <시간과 타자, 해설> 中


 과거와의 관계를 끊음으로서 새롭게 생명을 얻는 자아(自我). 이러한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레비나스의 시간론은 단속적(斷續的)이라는 면에서 아우구스티누스, 프랭클의 연속적(連續的) 시간론과 차이가 있음을 발견한다.


 현재는 자기하고만 관계한다. 자유를 가지고 현재를 눈부시게 해야만 했던 이 관계는, 그러나 현재를 동일화 속에 가두어버린다. 과거에 관해 자유로우나 그 자신의 포로가 되어 있는 현재는, 현재가 연루되어 있는 존재의 무게를 생생하게 나타낸다. 현재가 과거와 단절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력은 현재의 한가운데에 있다. 현재를 으스러뜨리는 숙명은 현재를 [과거로부터] 상속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 숙명은 현재를 [과거로부터] 상속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 숙명은 현재에게 강요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현재는 탄생을 선택하지 않고 태어났기 때문이다.(p133) <존재에서 존재자로> 中


 이처럼 레비나스와 프랭클의 시간론은 다소 다르지만, 이들은 모두 독일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가진 삶과 죽음의 극한(極限)을 봤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사선(死線)을 넘어서 레비나스가 '존재와 존재자'를 발견했다면, 프랭클은 '의미'를 찾는다. 같은 경험에서 나온 다른 깨달음. 이제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 <존재에서 존재자로>로 넘어갈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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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5 17: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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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5 18: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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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5 22: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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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5 22: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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