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3 - 로꼬꼬, 고전주의, 낭만주의, 개정판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3
아르놀트 하우저 지음, 백낙청 외 옮김 / 창비 / 199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로꼬꼬

18세기 사회발전의 고유한 특징은 여러 상이한 신분과 계급을 가르는 경계선들이 아무리 강조되더라도 결국 문화적 평준화 과정은 멈춰질 수 없었고 사람들이 외면적으로는 서로 상대방과 구별되려고 안달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점점 더 닯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이며, 그리하여 마침내 단지 두 개의 커다란 집단, 즉 일반 민중과 그 민중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의 집단만 존재하게 된 사실이다. 귀족과 상층 부르즈와지는 단 하나의 문화계층으로 용해되었고, 그리하여 이전에 문화를 담당했던 사람들은 주는 자(창작자)이면서 동시에 받는 자(향수자)가 되었다.(p21)

로꼬꼬는 실로 르네쌍스와 함께 시작된 발전의 마직막 국면을 대변하면, 이 발전과정의 시초가 되었고 정적(靜的)/구속적/규점적 원리와 계속 싸워야만 했던 동적(動的)/해방적 원리에 승리를 안겨줌으로써 이 과정을 총결산한다. 로꼬꼬에 이르러 비로소 르네쌍스의 예술적 목표는 최종적으로 달성되며, 또한 로꼬꼬와 더불어 사물의 객관적 묘사는 근대 자연주의가 추구하던 정확성과 자연스러움을 확보한다... 부르즈와 예술과 더불어 민주주의 사상과 주관주의에 근거하는, 그리고 발전사적으로 보아 분명 르네쌍스/바로끄/로꼬꼬의 엘리뜨 문화와 직접 관련되면서도 그것들과 원리적으로 대립되는 오늘 우리 자신의 문화시대가 시작된다.(p51)

소설은 17세기에만 해도 그 대중적 인기에도 불구하고 저급한, 어떤 점에서 아직 후진적인 문학형태를 대변했으나 18세기에 들어오면서 주도적인 장르가 된다. 가장 중요한 문학작품들이 이 장르에서 나타난 뿐만 아니라 진정한 진보라고 할 만한 의미있는 발전이 이 분야에서 일어난다.(p45)

계몽시대의 예술

로꼬꼬와의 결별은 이 세기의 후반에 일어나는바, 상류계층의 예술과 중간계층의 예술 사이에는 명백한 간격이 있는 것이다.(p56)

로꼬꼬가 극복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1780년 이후, 특히 다비드 등장 이후이다.대략 1780 ~ 1800년의 기간에 걸친 혁명 시대의 예술과 함께 고전주의의 새로운 단계가 시작된다. 혁명은 자기에게 가장 적합한 양식으로서 고전주의를 택했다. 그러나 이 선택에서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것은 취미나 형식의 문제라든가 혹은 중세 말기와 초기 르네쌍스의 시민적 예술이상에서 나온 내면성과 친밀성의 원칙이 아니라, 현존하는 여러 경향을 중에서 어떤 것이 가장 효과적으로 애국적/영웅적 이상과 로마적 시민덕목과 공화주의적 자유이념 등을 포함하는 혁명의 에토스를 표현하는 데 적합한가하는 관점이었다.(p191)

시민계급은 음악의 주된 고객이 되었고, 또 음악은 다른 어느 장르에서보다 시민계급의 정서생활이 더 직접적으로 자유롭게 표현될 수 있는 애호받는 예술이 되었다... 새로운 주관주의의 결과 생겨난 이러한 갈등의 가장 유명하고 극단적인 예는 모짜르트와 그의 패트런인 잘츠부르크(Salzburg) 대주교와의 불화이다. 고용된 음악가와 자유롭게 창작하는 예술가 사이에 나타난 대립의 특징을 무엇보다 잘 보여주는 것은 연주가와 작곡가, 일반 악단원과 악단 지휘자의 분화이다.(p107)

당시의 문학은 전유럽적 문학이었고, 또 중세 이후 한번도 체험해보자 못했던 서구 정신공동체의 표현이었다. 중세의 문학은 그 보편성을 라띤어에 힘입고 있었다면, 바로끄나 로꼬꼬 문학은 그 보편성을 프랑스어에 힘입고 있었다. 그리고 중세의 문학이 교양있는 성직자 그룹에 제한되어 있었다면, 바로끄나 로꼬꼬 문학은 궁정적 귀족그룹에 한정되어 있었다.(p168)

고전비극은 인간을 고립적인 존재로 보고, 물질적 현실과는 단지 외면적으로만 접촉할 뿐 거기에서 아무런 내면적인 영향도 받지 않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정신적 실체로 묘사한다. 이에 비하여 시민극은 인간을 사회적 환경의 일부이자 그 함수로 파악하고, 과거 비극에서처럼 객관적 현실을 지배하는 존재가 아니라 도리어 그것의 지배를 받고 거기에 흡수된 존재로 그린다.(p124)

두 경향 사이의 긴장이 완전히 종식되고 궁정적이라 지칭할 수 있는 어떠한 요소도 더이상 시민문학에 대항하지 못하는 상태에까지 이른다. 물론 그렇다고 일체의 긴장이 없어진 것은 아니며, 단 하나의 단일한 취미가 문학을 지배한 것도 결코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새로운 대립, 즉 교양있는 소수자의 문학과 일반 독자층의 문학 사이의 긴장이 서서히 발전되며, 후일 통속문학의 약점들을 이미 찾아볼 수 있는 취미의 타락이 눈에 띄게 나타난다.(p67)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Wilhelm Meisters Lehrjahre>에 열광한 뒤에야 비로소 괴테는 독일 문학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낭만주의자들이 이처럼 괴테를 지지했던 것은 그들 사이에 놓인 일체의 개인적/세계관적인 대립에도 불구하고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뿐만 아니라 질풍노도 이후의 전 독일 문화를 하나로 묶는 불가침의 깊은 이해공동체가 형성되었음을 말해주는 가장 두드러진 징표이다... 쉴러에 의하면 미적 교육은 루쏘가 이미 인식한 바의 숙명적 악으로부터 인류를 구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고, 괴테는 이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술은 "전체의 파괴적인 힘에 대하여 자기를 지키기 위한" 개인의 노력이라고까지 주장하기에 이른다. 여기에 이르면 예술적 체험은 지금까지 오로지 종교만이 할 수 있었던 기능을 획득하게 된다.(p164)

낭만주의

낭만주의 운동에서 특징적인 것은 이 운동이 혁명적 세계관 아니면 반혁명적 세계관을 대변하느냐 혹은 진보적 세계관 아니면 반동적 세계관을 대변하느냐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경우든 비현실적/비합리적/비변증법적 길을 통하여 그런 관점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p215)

낭만주의 이전의 예술가와 시인들이 무조건 이러한 감상자 그룹의 요구와 소망에 부응하려고 노력했었다면, 낭만주의 시대와 낭만주의 이후의 예술가들은 이제 더이상 어떠한 집단적 그룹의 취미와 요구에 종속되지 않으며 어느 한 그룹의 호응을 받지 못하면 언제든지 다른 그룹의 감상자층에 호소하려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p203)

낭만주의 혁명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시적 언어의 혁신이다. 프랑스의 문학적 언어는 17세기와 18세기를 지나는 동안 허용될 수 있는 표현방식이나 정확하다고 인정되는 스타일에 대해 너무 엄격한 규제를 가했기 때문에 빈약하고 무미건조하게 되었다. .. 단순하고 자연스러우며 일상대화에 많이 쓰이는 표현들은 고상하고 세련된 '시적'어휘나 기교적인 풀어쓰기에 의해 대체되어야만 했다.(p255)

형식해체에 음악이 대처했던 음악 고유의 성향, 예컨대 내용의 비합리성과 표현수단의 독자적 과시 등을 보면 왜 음악이 근대 예술장르중에서도 으뜸가는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고전주의에서는 문학이 주도적인 예술이었다면 초기 낭만주의는 부분적으로 회화에 근거를 두었다. 그러나 후기 낭만주의는 완전히 음악에 의존하고 있다.(p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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