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장소 - 초근대성의 인류학 입문 인문과 지혜 4
마르크 오제, 이윤영 외 옮김 / 아카넷 / 201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장소가 정체성과 관련되며 관계적이고 역사적인 것으로서 규정될 수 있다면, 정체성과 관련되지 않고 관계적이지도 않으며 역사적인 것으로 정의될 수 없는 공간은 비장소로 규정될 것이다. 여기서 내가 주장하는 가설은 초근대성이 비장소들을 생산한다는 것, 다시 말해 그 자체로 인류학적인 장소가 아니며 보들레르식 근대성과는 대조적으로 예전의 장소들을 통합하지 않는 공간들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기억의 장소'로 목록화되고 분류되고 승격된 이 예전의 장소들은 초근대성 속에서 제한적이고 특수한 자리를 차지한다(p98)... 비장소의 공간은 독자적 정체성도 관계도 아닌, 고독과 유사성을 창조한다. 비장소의 공간은 역사에도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의 현재성과 긴급성이 비장소의 공간을 지배한다.(p125) <비장소> 中 


 마르크 오제(Marc Auge, 1935 ~ )의 <비장소 Non-Lieux>에서 초근대성이 만들어내는 공간을 '비(非)장소'로 말하고 근대의 시간, 공간과는 다른 또다른 세계를 규정한다. 주변과 통합되지 않으며, 과거와 연관되지 않는 시공간(Space-Time)인 비장소. 비장소의 세계는 고전물리학(古典物理學)의 법칙이 통용되지 않는 양자물리학(量子物理學)의 세계처럼 기존 민족학의 틀로는 해석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초근대시대의 시공간의 왜곡은 어디에서 오는가. 저자는 이를 '과잉 surabondance' 또는 '과도함'에서 찾는다.


 초근대성의 관점에서 시간을 사유하기 어려운 이유는, 동시대의 세계의 사건의 과잉 때문이지 오래전부터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진보의 이념이 몰락했기 때문이 아니다. 임박한 역사라는 테마, 바로 발뒤꿈치에서 우리를 따라오는 역사라는 테마는, 역사가 의미를 갖고 있는가 아닌가라는 테마의 전제조건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현재 전체를 이해하고자 하는 우리 자신의 요구로 인해 우리가 가까운 과거에 의미를 부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p44) <비장소> 中


 초근대성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과도함의 두 번째 형상은 모두 공간과 관련된다. 공간의 과도함은 우선, 여기서 약간은 역설적으로, 지구가 축소되었다는 사실의 귀결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우주 공간에 내딛은 인류의 첫 걸음 때문에 우리의 공간은 극도로 작은 점으로 축소되었고, 위성 사진은 우리의 공간에 정확한 척도를 제공해준다. 이와 동시에 세계가 우리에게 열리게 된다.(p44) <비장소> 中


 강력한 중력이 블랙홀(black hole)을 만들듯이, 지나친 과잉으로 우리의 시공간은 극도로 압축되었다. 강력한 중력이 시공간의 왜곡을 불러오듯, 초근대사회에서 표준화된 인간을 가정한 연구 방법으로는 더이상 분석할 수 없는 한계를 갖는다. 초근대 시대의 개인은 모두가 특수한 개인이다.


 민족학은 오랫동안 의미 있는 공간들, 스스로를 온전한 전체로 생각하는 문화에 동일시된 사회들, 즉 의미의 세계를, 세계 속에서 분리시켜 파악하려고 전념해 왔다. 이 의미의 세계 안에서 그 표현에 불과한 개인과 집단들은 동일한 기준, 동일한 가치, 동일한 해석과정에 의해 규정된다.(p47)... 마르셀 모스 Marcel Mausss는 심리학과 사회학의 관계를 논하면서 민족학적 연구에 정당화될 수 있는 개인성의 정의에 중대한 한계를 설정했다. 그는 사실상 사회학자들이 연구한 인간이 근대의 엘리트처럼 분할되고 억제되고 통제된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총체로 규정될 수 있는 평범한 인간 또는 시대에 뒤떨어진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생각한 개인성은 한 문화를 대표하는 개인성, 전형적 개인성이다.(p31) <비장소> 中


 마르크 오제에게 비장소는 과잉의 공간이며, 단절의 공간이다. 근대의 공간이 과거의 역사인 시간이 녹아져 있는 곳이라면, 비장소는 '장소'와 '장소'를 연결시키는 선(線)이다. 수많은 선들이 우리 공간을 갈라놓으며 개인은 고독을 느낀다. 그리고, 짧은 시간 이용하며 다른 장소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는 비장소에서 개인은 디지털(digital) 정보로 취급되며, 익명의 존재로 전락된다. 이러한 사실은 디지털 정보 자체가 2진법 체계의 단속적 정보라는 사실과 함께 불연속의 연장으로 다가온다.


[사진] Non-Places(출처 : http://www.sarahpetersphotography.com/non-places)


 공간적 과잉은 규모의 변화로, 이미지화된 가상적인 준거 reference의 증가로, 이동수단의 괄목할 만한 가속화로 표현된다. 이 과잉은 구체적으로는 엄청난 물리적 변화로 귀결된다. 도시 집중, 주민의 집단 이주, 우리가 '비장소'라고 부르게 될 것의 증가가 그것이다. 비장소는, 마르셀 모스 및 온갖 민족학적 전통이 시공간 속에 구체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문화 개념에 결부시킨 '장소'라는 사회학적 개념과 대립한다. 비장소는 승객 및 재화의 가속화된 순환에 필요한 설비일 뿐만 아니라 교통수단 그 자체, 또는 거대한 쇼핑센터, 그리고 지구상의 난민을 몰아넣은 임시 난민 수용소이기도 하다.(p48)...앙드레 말로 이후 우리가 사는 도시는 박물관으로 바뀌고 있지만, 우회로, 고속도로, 고속철도, 초고속철도는 이로부터 우리를 갈라놓는다.(p93) <비장소> 中 <비장소> 中


 그렇지만, 비장소와 장소의 관계는 단절로 그치지 않는다. 비장소는 장소를 나누지만 또한 장소를 만들어낸다. 비장소에서 이루어지는 말과 행동은 장소에서도 이루어지며, 장소에서 만들어진 시간이 우리에게 역사(歷史)로 만들어지고, 이렇게 만들어진 역사가 큰 틀에서 익명의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장소의 세계는 비장소의 개인의 방향을 정한다. 이들이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을 이루는 서로 다른 부분인 것이다. 마치 태극(太極)을 음(陰)과 양(陽)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처럼.


 오늘날 세계의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장소와 공간, 장소와 비장소는 서로 얽혀 있으며 서로에게 침투한다. 비장소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장소는 그 어디에도 없다.(p129)... 말의 씀씀이는 핵심적인데,그것이 습관들의 씨실을 짜고 시선을 가르치며 경관에 관한 정보를 주기에 그렇다.(p130)... 비장소를 경유하는 말과 이미지들은 사람들이 열심히 일상생활의 일부를 구축해가는, 아직까지도 다양한 장소들에 다시 뿌리 내린다.(p131)...  장소와 비장소는 명확히 잡히지 않는 양극성에 가깝다. 전자는 결코 완전히 지워지지 않으며 후자는 결코 전적으로 실현되지 않는다. 이들은 정체성과 관계의 뒤얽힌 게임이 끊임없이 다시 기입되는 양피지들이다.(p98) <비장소> 中


 우리는 마르크 오제의 <비장소>에서 외롭고 단절된 개인과 단절된 사회 공간인 비장소를 만나게 된다. 현대사회의 과잉이 가져온 시간과 공간의 과잉. 넘쳐나는 정보로 인해 지금 이순간에 집중할 수 밖에 없는 현대인. 그리고 이로부터 오는 단절된 시간과 비장소. 우리는 <비장소>를 통해 우리가 외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동시에, 외로움을 넘어선 연결(connection)의 희망도 발견하게 된다. 현대 사회의 과잉과 이로부터 생겨나는 고독. 이를 해결하기 위한 연결. 이것이 <비장소>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아닐까 생각하며 리뷰를 마무리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