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주제는 놀이와 문화의 관계이므로, 놀이의 모든 형태를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놀이가 사회적으로 어떻게 구체화하는지 그것을 주로 다루기로 한다. 무엇보다도 모든 놀이는 자발적 행위이다. 명령에 의한 놀이는 더 이상 놀이가 아니다.(p41)... 놀이의 두 번째 특징은 '일상적인; 혹은 '실제' 생활에서 벗어난 행위라는 점이다. 놀이는 '실제' 생활에서 벗어나 그 나름의 성향을 가진 일시적 행위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p42)...  또한 놀이는 시간과 공간의 특정한 한계 속에서 "놀아진다(played out)". 놀이는 그 나름의 방향과 의미를 갖고 있다.(p45) <호모 루덴스> 中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 1872 ~ 1945)는 <호모 루덴스 Homo Ludens>에서 인류 문화의 기원을 '놀이'에서 찾는다. 놀이가 단순한 심심풀이가 아니라 '문화 文化'  자체라는 하위징아는 <호모 루덴스>에서 놀이의 특성을 위와 같이 자발성, 비일상성, 한계성으로 규정한다. 오랫만에 <호모 루덴스>를 꺼내든 것은 작은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고, 이번 페이퍼에서는 이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지난 한주 동안 외부 출장이 있어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한동안 아빠 얼굴을 못봐서였을까. 딸아이가 지난 주말 내내 함께 놀자고 졸랐다. 주말을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출장 정리를 하려고 밤에 책상에 앉으니, 조용히 들어와 그림 한장을 내민다.


[그림] 아빠, 놀아주세요(by 연의)


 일요일 밤이라 할 일이 있어 내 마음도 울고 있었지만, 얼마나 함께 놀고 싶으면 이런 편지까지 쓸까 싶어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밤늦게 놀고 일을 마무리 한 후 아이와 놀이, 그리고 가족에 대해 생각한다. 


 가족과 놀이. 프랑스 역사 학자 필리프 아리에스(Philippe Aries, 1914 ~ 1984)는 <아동의 탄생 L'enfant et la vie familiale sous l'ancien regime> 에서 근대 유럽 교육제도의 발달이 가져온 가족 내 아이들과 어른들의 분화를 지적한다.

 

 가족과 학교는 함께 어른들의 세계로부터 아이들을 분리시켰다. 학교는 이제까지는 방만했던 아동기를 점점 더 엄격해진 규율 체제속에 가두었다. 이 규율 체제는 18~19세기에 아동기를 완전히 기숙사에 감금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p648)... 근대의 가족은 공동체 생활로부터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 대부분의 시간과 관심사를 박탈했다. 그것은 사생활과 정체성에 대한 갈망을 충족시켜주었다. 가족 구성원들은 감성, 습관, 그리고 생활양식에 의해 결합되었다.(p649)... 새로운 사회는 각자가 전용 공간 속에서 각자의 생활양식을 누리는 것을 보장했으며, 그 공간 속에서 주요한 특징들은 존중되어야 했다. 그리고 각자는 관습적인 모델, 이상적인 유형을 따라 했으며, 결코 축출이라는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러한 모델에서 일탈하려 하지 않았다.(p651) <아동의 탄생> 中


  산업화와 민주화로 대표되는 근대세계는 개인에게 사생활(私生活)을 가져다 주었지만, 가족 내 구성원들을 각자의 생각을 가지고 가족 내 다른 사람들과 느슨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아리에스의 진단이다. 전문화된 '학교(學校)'에서 또래집단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부모와는 단절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 자녀들의 현실이라면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까. 이에 대한 답은 도올 김용옥(檮杌 金容沃, 1948 ~) 의 <효경 孝經 한글역주>에서 찾아본다.

 

 어찌하여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만이 효가 될 수 있는가? 앞서 말했듯이 <예운> 편에서 말하는 십의(十義)는 어디까지나 쌍방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효의 원초적 본질을 아래로부터 위에로의 방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아래로의 방향에 있는 것이다. 효의 가장 원초적인 사실은 자식에 대한 보호본능과 관련된 것이다. (p156)... 그러나 그 효가 도덕적 차원으로 발전하면 할수록 그 핵심에 있는 것은 부모의 자애이지 자식의 효도가 아니다. 부모의 자애 때문에 자식의 효도는 마땅한 당위로 인식될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리적 코딩(coding)을 넘어서는 도덕적 "베품"이기 때문이다. 이 "베품"의 전제가 없이 아랫사람의 복종이나 희생, 헌신을 요구하는 것은 권위주의적 강탈이요, 복종주의적 강압이다.(p157) <효경역주> 中


 <효경한글역주>에서는 효(孝)의 본질이 내리사랑임을 밝힌다. 갓난 아이가 엄마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며 손을 내밀 때, 이에 대한 대답이 '효'라면, 딸아이가 부모에게 함께 해달라고 조를 때 함께 해주는 것. 이것 역시 효의 실천이 아닐까. 한편으로 노는 것을 너무 진지하게 바라본 것은 아닐까 여겨지기도 하지만, 하위징아의 놀이해석에 따르면 아이들과의 놀이가 어떤 교육보다도 중요한 의식임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종합하면 자녀와의 놀이는 효의 표현이자, 무엇보다 중요한 교육 수단이다.


 긴장의 요소는 놀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긴장은 불확실성과 우연성을 의미한다. 문제를 파악하여 그것을 해결하는 노력을 가져온다. 그는 자신의 노력이 성공을 거두기를 바란다. 이들은 뭔가 어려운 일을 착수하고 성공하여 긴장을 끝내기를 바란다... 놀이 그 자체는 선과 악을 초월하지만, 놀이에 내재된 긴장의 요소는 놀이하는 사람의 심성 즉 용기, 지구력, 총명함, 정신력, 공정함 등을 시험하는 수단이 되므로 특정한 윤리적 가치를 부여한다. 그는 경쟁에서 이기고 싶은 강렬한 욕망에도 불구하고 게임의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p47) <호모 루덴스> 中


 늦은 밤, 뒤늦게 일을 마무리 하느라 조금 피곤하기는 하지만, 놀이가 시간적/공간적 한계성을 가지는 것처럼, 효 역시 시간적/공간적 한계성이 있음도 생각해 본다. 나이들어 부모님에게 효도를 하려고 하나 기다려주실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자녀들 역시 우리가 여유를 가지고 함께 하려고 할 때에는 이미 우리 품안에 떠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작은 것을 함께 나누려는 마음이 나중의 그 어느 순간보다 필요하고 중요함을 깨닫는다. 비록,  그것이 유치하게 보이는 놀이일지라도.


 아이의 작은 그림 편지를 보면서, 가족과 효, 그리고 부모의 역할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것을 보면 양육(養育)은 부모와 자녀를 함께 성장시키는 상호작용임을 다시 생각하며,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 한다. 

 

PS. 개인적으로 아이들과 놀이의 최고단계는 '역할놀이'라 생각한다. 아이의 생각과 배경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5분을 넘기기 힘든 놀이가 역할놀이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역할 놀이를 잘 해 주는 아빠들을 보면 마음 깊이 존경심이 우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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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8 16: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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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8 18: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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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8 22: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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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9 05: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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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9 14: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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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9 15: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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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9 15: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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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9 15: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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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5 12: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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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5 14: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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