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와 보수의 12가지 이념 From Ideologies to Public Philosophies>에서 폴 슈메이커 (Paul Schumaker)는 다양한 정치사상을 12가지로 구분하여 존재론, 인간론, 사회론, 인식론 등의 철학적 가정과 정치 공동체, 시민권, 사회구조, 권력의 보유자, 정부의 권위, 정의, 변화 등 정치적 원리에 대해 살펴본다. 4가지 철학적 가정과 7가지의 정치적 원리를 더해 11가지 주제에 대해 12개 사상의 입장을 제시되기에 도합 132개의 항목으로 구분된다. 때문에, 페이지 수는 많지만 내용의 깊이는 깊지 않아 이 책은 방대한 양의 입문서(入門書)라 볼 수 있다. 단적으로 '정치사상의 애니어그램(Enneagram)'이라고 느껴지는 책이다.


 책의 서두에서 이 책은 19세기의 주요 정치 이념인 고전적 자유주의, 전통적 보수주의, 아나키즘, 마르크스 주의가 제시되는데, 이들은 20세기 이후 다른 사상들의 원류(原流)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특히, 고전적 자유주의와 전통적 보수주의는 우리에게 프랑스 혁명을 둘러싼 토머스 페인(Thomas Paine, 1737 ~ 1809)과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 1729 ~ 1797)의 논쟁으로 특히 주목을 받는다. 이들의 논쟁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페인의 <인권 Rights of Man>과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 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의 리뷰에서 살펴볼 예정이지만, 이번 페이퍼에서는 이들의 논쟁과 관련하여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폴 슈메이커에 의하면 전통적 보수주의는 종교(宗敎 religion)에 기원을 둔다. 특히 기독교 신(神)의 절대성에 의존한 사상으로, 절대선이며 완전한 신의 질서가 사회에서 구현되는 것을 우선에 두는 사상이다. 때문에, 전통적 보수주의에서는 강력한 종교(교회)제도와 정치제도의 권위, 사회 안정 추구를 강조한다.


 전통적 보수주의자 Conservatism들은 이성과 과학만으로는 신, 영혼, 도덕의식, 정치 공동체의 여러 미묘한 측면과 같은 문제를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궁극적 실재(존재)나 인간 본성 그리고 사회 등의 문제에 대해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이 제시한 이른바 과학적 구성 방식보다 전통적 이해 방식이 나라를 다스리는 좀 더 훌륭한 방법이라고 보았다... 보수주의자들은 사회를 공익을 위한 방향으로 인도하려면 강력한 정치/종교적 권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가장 일반론적으로 말해, 전통과 사회 관습을 존중하는 풍토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p104) <진보와 보수의 12가지 이념> 中


 이에 반해, 고전적 자유주의는 이성(理性 reason)에 기반한 정치사상으로 권위보다는 민주 자본주의를 강조하는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그 결과 전통적인 교회 등의 전통적 권위보다 추상적인 개념인 자유, 평등, 형제애 등의 이념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고전적 자유주의 classical Liberalism는 '정치의 과학'을 개척하려 했던 계몽주의의 산물이었다. 당시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전통이나 종교적 신앙에 기댄 채 정치사상을 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p97)... 고전적 자유주의자는 신이 존재한다거나 신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신이 이 세상을 완전히 좌지우지한다고는 보지 않았다.(p97)... 자유주의 사상은 17세기부터 19세기 사이에 그 당시 유럽이 직면한 여러 문제들에 대응하기 위해 발전되었다. 특히 사업가와 상인, 정치적 권리와 자유의 옹호자, 계몽주의 지성인들이 진보적이고 과학적이며 산업화된 유럽 사회를 지향했다.(p97) <진보와 보수의 12가지 이념> 中


 페인과 버크의 논쟁은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 1790년 버크의 비판 이후 1791년과 1792년 페인의 두 차례 반박으로 진행되었다. 보수주의자인 버크는 신의 뜻에 따라 영국의 입헌군주제는 잘 작동하는데 반해, 프랑스 혁명과 이들이 추구하는 (국민회의의) 민주정이 잘못된 정체임을 비판한다. 이에 반해, 페인은 세습군주제야 말로 자연의 법칙에 들어맞지 않은 제도이며, 프랑스 혁명은 공화정을 추구하는 자연법칙에 맞는 사건임을 말하며 버크의 주장에 반박한다. 이들의 대립의 단면을 살펴보자.


 이들의 대립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 버크는 헌법(constitution)이 종교의 기반 위에 만들어진 것이며, 종교는 신의 권위를 대변하는 것이니만큼 이 권위를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에 따라 왕/귀족/성직자에 의한 지배를 거부하는 프랑스 혁명은 말 그대로 하늘의 뜻(天命)에 거역하는 사건이다. 역성혁명(易姓革命) 불가. 버크의 주장을 이렇게 요약해본다.


  우리 헌법 전체가 종교와 신앙심의 후원 아래 만들어졌으며, 그 재가를 얻어 확실해졌다. 그 전체가 우리 국민성의 단순성에서 연유했으며, 우리의 분별력에서 보이는 일종의 태생적인 담백함과 솔직함에서 연유했다. 오랫동안 그러한 성격이 우리 사이에서 연속해서 권위를 얻은 인물들의 특성이 되어왔다. 우리는 종교가 문명 사회 civil society의 기반이며 모든 선과 모든 안락의 근원임을 알고 있다.(p162)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 中


 이에 반해, 페인의 입장은 다르다. 과거 사건의 결과 만들어진 제도와 정체가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후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 다른 시대에 맞는 제도를 선책할 권리가 각자에게 있다는 것을 페인은 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기반 위에서 앙시앙 레짐(Ancien Regime)을 극복한 프랑스 혁명은 이성의 승리로 추앙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페인은 아마 이런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후손을 영원히 구속하고 제약할 수 있거나, 세계를 누가 어떻게 통치해야 하는가를 영원히 주관할 수 있는 권리와 권력을 갖는 의회나 인간이나 세대는 지금껏 어느 나라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런 존재는 있을 수 없다.(p94)... 세상의 상황은 계속해서 변하고, 인간의 생각도 변한다. 그리고 국가는 산 자를 위한 것이지 죽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니므로 오직 산 자 만이 그 안에서 권리를 가진다.(p99) <인권> 中


 이들의 의견은 이외에도 곳곳에서 부딪히지만, 최근(2019년) 우리의 경우, 사법부와 관련된 내용이 정치현안으로 뜨겁기에 이에 해당하는 내용을 추려본다. 먼저 보수주의자 버크의 사법부에 대한 의견을 살펴보자. 버크는 사법부의 독립성을 강조하며,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행정권인 왕권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갖춰야 함을 말한다. 이를 위해 비록 사법부의 세습제가 일정 부분 부작용이 있을지라도 전통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고등법원의 구조는 하나의 근본적인 탁월성을 지녔는데, 독립성이 그것이다. 그 기관에서 가장 불신되는 사안인 관직매매도 독립성에 기여했는데, 그 직책은 종신제였다. 실상 세습된다고도 말할 수 있다. 국왕이 임명하지만, 거의 국왕 권한 밖에 있다고 여겨졌다. 고등법원들은 자의적 변혁에 저항하는 구조를 지녀 항구적 정치조직을 구성했다... 국가에서 최고권력은 사법권을 가능한 한 그 권력에 의존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어느 형태든 그와 균형을 이루도록 구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최고 권력은 사법부에 대해, 자신의 권력에 의해서 침해되지 않을 보증을 제공해야 한다. 사법부를 마치 국가 외부에 있는 것처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p323)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 中


 그렇지만, 페인의 입장은 명확하다. 세습제는 자연 법칙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습제가 전통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수용할 것인가? 세습제는 인민을 개, 돼지와 같이 재산으로 간주하는 개념이기에 철폐해야 할 것으로 페인은 해석한다.


 모든 세습적 국가는 그 본질이 전제에 있다. 세습 왕관, 세습 왕위, 또는 그 밖의 어떤 허황된 이름으로 불려지든, 인류를 세습할 수 있는 재산으로 간주한다는 것 외의 다른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지 않는다. 국가를 세습한다는 것은 마치 가축을 세습하는 것처럼 인민을 세습하는 것이다.(p250)... 만일 미덕과 지혜가 변함없이 세습적 계승의 특성이 되는 것이 자연법칙이 되고 하늘의 명령으로 등록되어 사람들이 그것을 알 수 있다면 세습제에 대한 반대도 없어지리라. 그러나 자연은 세습제를 용납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우롱하는 듯 작용한다.(p251) <상식, 인권> 中


 이외에도 많으 논의가 두 권의 책에서 이루어지지만, 페이퍼에 옮기기에는 한계가 있어 여기에서 그친다. 조금 들어간 내용은 각각의 리뷰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우리나라 사법기관의 문제점에 대해 생각해보자.


 오늘날 사법개혁이 요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이 역시 세습제의 문제로 귀결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나라 대표적 사법기관인 사법부와 검찰은 선출되지 않는 권력임에도 견제없이 자신들의 권한을 행사해오고 있다. 그들만의 리그 안에서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며 보이지 않는 권력을 유지하고, 교체없이 그 권력을 자신의 후계자들에게 물려준다는 점에서 세습권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세습권력의 문제점은 오늘날 사법부의 문제로 고스란히 나타나 사법개혁이 요구되고 있는 실정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현실문제를 우리는 각자의 정치사상의 기반 위에서 바라본다. 사회가 과거보다 복잡해지면서 보다 다양한 사상 기반이 등장했고, 이 사안을 보는 우리의 입장도 단순하지는 않지만, 사법개혁과 관련하여 큰 틀에서는 페인과 버크의 입장 중 어느 한 편에 속하리라 생각된다. 그런 면에서 페인과 버크의 논쟁을 지금 다시 살펴보는 것은 나름의 의미가 있으며, 이들의 논쟁은 오늘날까지도 유효하다고 생각된다. 


 자본주의 사회는 자신의 재생산 문제에서, 즉 사회통합과 체계통합 사이의 협정 문제에서, 다른 모든 사회들과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사회에 해당하는 이 근본문제를 논리적으로 서로 배제하는 두 가지 해결방식을 동시에 취하는 식으로, 즉 생산의 분화 내지 사유화를 통하여 그리고 동시에 생산의 사회화 내지 정치화를 통하여 처리한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두 전략은 서로를 방해하고 마비시킨다... 노동, 생산, 분배 영역의 정치적 중립화는 강화되면서 동시에 철회된다... 두 명령은 특히 정치적 공론장에서 서로 충돌한다.(p533) <의사소통행위이론 2> 中


  위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 1929 ~ )는 <의사소통행위이론 Theories des kommunikativen Handelns>에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해소될 수 없는 긴장관계가 공론장(public sphere)에서 충돌함을 말하고 있다.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들은 공론장에서 사회적 합의(social consensus)를 도출하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 것인가.


 만약, 자신이 보수주의자라면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아야할 것이다. 만약, 자신이 자유주의자라면 자신이 바꾸고자 하는 방향이 무엇인지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기반 위에 토론이 이루어졌을 때, 우리는 슈마커가 말한 '다원적 공공 정치철학'을 도출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도달해야하는 사법 개혁 뿐 아니라 정치를 바라보는 공동체 의식이라 생각하며 이번 페이퍼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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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4 14: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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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4 16: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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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8 13: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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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8 16: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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