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가 남긴 유산 대부분을 우리는 아직도 사용한다... 우리가 우리 시대의 것인 것처럼 아직도 사용하는 중세의 발명품은 끝이 없다." - 움베르트 에코 -
<중세 Il Medioevo > 시리즈의 기획자 움베르트 에코(Umberto Eco, 1932 ~ 2016)는 우리가 중세을 알아야하는 이유에 대해 위와 같이 밝히고 있다. 먼 유럽의 오래전 중세가 과연 현재의 우리 삶과 얼마나 연관되어있을까. 연관되어 있다. 아주 밀접하게.
중세 후반기의 문명은 증거에 기초하는 공적 재판 형태에 대한 신뢰를 상실했다.(p238)... 로마 - 교회 재판과 같은 유형의 근본적 함의는 증거 심사의 비밀, 피고의 사전적 구금, 증거요인들의 사전 등급, 고발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리한 방어의 입장, 검찰 조직과 사법 조직의 혼란이었다. 이단 심문관은 재판을 진행하고 심문을 하고 판결을 내렸다. 자유를 상실한 피고는 은밀하게 진행되는 고발(밀고 indicia), 증거 documenta, 그리고 증언 문서의 작성과 수집이 이루어지는 예심 단계가 모두 종료된 다음에야 비로소 고발 사유와 자신에 관련된 증거를 통보받았다.(p241) <중세3 : 성, 상인, 시인의 시대> 中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부터 시작된 언론의 무차별적 보도, 청문회 개최 즈음부터 시작된 검찰의 전방위 압수수색 및 증거 없는 기소 등의 모습은 우리가 중세 시대를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기시감(旣視感, Déjà Vu) 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우리에게 보여지는 이들의 추태(醜態)는 사법개혁의 필요성을 우리에게 각인시킬 뿐이다.
재판권이 입법권과 집행권에서 분리되어 있지 않을 때도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재판권이 입법권에 결합되어 있다면 시민의 생명과 자유에 대한 권력은 자의적일 것이다. 왜냐하면 재판관이 곧 입법자일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재판권이 집행권에 결합되어 있다면 재판관은 압제자의 힘을 갖게 될 것이다.(p133) < 법의 정신> 中
몽테스키외(Charles-Louis de Secondat, Baron de La Brède et de Montesquieu, 1689 ~ 1755)가 <법의 정신 De l'esprit des lois>에서 말한 말을 살짝 바꾼다면, '검찰의 기소권과 수사권이 분리되어 있지 않을 때도 자유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정도가 되지 않을까. 조국 법무부 장관에 대한 언론의 보도와 검찰의 수사와 기소는 그들의 본모습을 유감없이 보이면서 왜 개혁이 필요한 것인지를 철저하게 알려주었을 뿐이다. 또한, 이 대목에서 중세 유럽에서 행해진 종교재판의 부당함이 가져온 근대 사법 제도의 개혁은 역사의 교훈임이 분명하다.
심문 수단으로서의 고문을 거부하고 고백의 증거적 가치를 비판하는 것은 이단심문에 대한 논쟁의 주된 주제였다. 논쟁은 로마-교회의 전형에 대치되는 처벌 절차에 대한 계몽주의적 관점을 통해 최고조에 이르게 될 것이었다. 즉 결백을 추정하는 원칙을 고수하고 양측의 형평성과 대립 구도, 재판의 공개성과 구두 진행, 재판관의 제3자적 입장과 공평성에 근거하는 보장성 유형이었다. 이 유형은 잉글랜드의 형사 재판에서도 중요한 경험주의적 관점을 가지게 될 것이었으며, 이후 유럽의 주요 국가들에서 사법 개혁을 가져왔다.(p241) <중세3 : 성, 상인, 시인의 시대> 中
법무부 장관 지명으로부터 40여일이 지난 지금까지 제대로 된 혐의, 의혹만 날리는 검찰과 이를 받아쓰는 언론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지치지만, 이들의 이러한 치졸한 모습이 조국 법무부 장관의 사퇴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이들의 작태에 분노를 거둘 수 없다. 만약에 그들이 원하는 바를 얻는다면, 얼마나 기고만장해질 것인가. 사법개혁과 언론개혁, 이제 더는 미룰 수 없고, 참을 수 없는 시대의 과제임이 분명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