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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성에 관하여 ㅣ 비트겐슈타인 선집 6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지음, 이영철 옮김 / 책세상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59. 여기서 "나는 안다"는 하나의 논리적 통찰이다. 다만, 실재주의가 그것에 의해서 증명될 수는 없다... 60. 이것이 한 조각의 종이라는 '가설'이 나중에 경험을 통해 확증되거나 반증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 그리고 "나는 그것이 한 조각의 종이임을 안다"에서 "나는 안다"가 그러한 가설에, 또는 논리적 규정에 관계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낱말이 우리의 언어에 최초로 통합될 때 우리가 배워 익히는 것이기 때문이다.(p31) <확실성에 관하여> 中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 ~ 1951)의 <확실성에 관하여 On Certainty>를 통해 우리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이라는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 ~ 1650)의 유명한 명제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더이상 회의(懷疑)할 수 없는 1명제인 '자신이 생각한다'는 사실로부터 자신의 실재를 주장한 데카르트. 그런 데카르트의 명제와 논리를 비트겐슈타인은 동의하지 않는다.
115. 모든 것을 의심하려는 사람은 의심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의심하는 놀이 자체는 이미 확실성을 전제한다.(p42) <확실성에 관하여> 中
130. 그러나 그렇게 판단하도록, 즉 그렇게 판단하는 것이 옳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경험이 아닌가?... 우리는 그것을 경험에서 끄집어내라고 우리에게 충고하지 않는다. 경험이 우리에게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라면, 우리는 이것을 근거라고 간주할 근거를 또다시 갖고 있지 않다.(p45) <확실성에 관하여> 中
174. 나는 충분한 확실성을 가지고 행위한다. 그러나 이 확실성은 나 자신의 것이다... 177. 내가 아는 것을, 나는 믿는다.(p55) <확실성에 관하여> 中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의심하는 것 자체가 이미 확실성(certainty)를 전제로 한다. 그렇지만,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경험에 의해 지지되고, 주관적이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는 ''[나는 생각한다]라고 알고 있다(확신한다).'로 바꿀 수 있다. 이것은 내가 확신한다는 것을 보여줄 수는 있으나, 그것이 생각한다는 것을 보장할 수는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자신의 확신은 사실을 보증하지 못하고, 실재 또한 마찬가지다.
90. "나는 안다"는 "나는 본다"와 비슷하고 근친적인 원초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나는 안다"는, 나와 어떤 한 명제의 뜻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어떤 한 사실 사이의 관계를 표현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 사실이 나의 의식 속에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그 경우 앎의 이미지는 외적 과정을 있는 그대로 눈과 의식에 투영하는 시선을 통해 지각한다는 것일 것이다.(p36) <확실성에 관하여> 中
284. 사람들은 항상 경험에서 배워 왔다. 그리고 그들의 행위에서 우리들은 그들이 어떤 것을 확고하게 믿는다는 것을 - 그들이 이 믿음을 언표하든 언표하지 않든 - 알아챌 수 있다. 이로써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물론, 인간이 그렇게 행위해야 마땅하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은 그렇게 행위한다는 것이다.(p75) <확실성에 관하여> 中
65. 언어놀이들이 변하면 개념들이 변화하며, 또 개념들과 더불어 낱말들의 의미들도 변화한다.(p31) <확실성에 관하여> 中
'자신이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논증하는 축(軸) 명제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경험적으로 뒷받침된 삶의 형태로 존재한다. 이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동되는 것이며, 언어의 기초가 되기는 하지만, 의심할 수 없는 불변의 제1명제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 비트켄슈타인의 주장이다. 이에 비해 수리적 명제들은 선험적(a priori)으로 주어진 명제들이다.
651. 12*12=144라는 것에 관해서 내가 오류를 범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제 우리들은 수학적 확실함을 경험 명제들의 상대적 불확실함과 대비시킬 수는 없다. 왜냐하면 수학적 명제는 그 밖의 삶의 행위들과 어떤 방식으로도 구별되지 않는, 그리고 망각과 간과와 미혹에 같은 정도로 내맡겨져 있는 일련의 행위들을 획득되었기 때문이다.(p155) <확실성에 관하여> 中
45. 계산한다는 것의 본질을 우리는 계산하는 법을 배울 적에 알게 되었다.(p27)... 46. 그러나 우리는 계산의 신뢰성을 어떻게 확인하는지는 결국 기술될 수 있지 않은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거기서 규칙이 등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p27) <확실성에 관하여> 中
결국, <확실성에 관하여>에서 비트겐슈타인의 논리는 선험적 수학 세계에서의 확실함과 경험적 언어 세계에서의 확실함이 같지 않음을 지적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그 차이를 거의 인지하지 못하는데, 이것이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447. 나는 이렇게 말하고자 한다 : 물리적 놀이는 산수 놀이와 마찬가지로 확실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될 수 있다. 내 소견은 논리적인 것이지, 심리적인 것이 아니다.(p110)... 455. 모든 언어놀이는 낱말들과 대상들이 재인식된다는 점에 의거하고 있다.우리는 이것이 의자라는 것을 2*2=4라는 것과 동일한 엄격성을 가지고 배운다.(p111) <확실성에 관하여> 中
410. 우리의 앎은 하나의 커다란 체계를 형성한다. 그리고 오직 이 체계 내에서만, 개별적인 것은 우리가 그것에 부여하는 가치를 지닌다.(p100) <확실성에 관하여> 中
무한(無限)에 매우 가깝지만, 엄밀하게는 유한(有限). 이것이 축의 명제가 가진 한계이자, 인간 언어 활동이 가진 한계가 아닐까. <확실성에 관하여>를 통해 미제스가 <경제과학의 궁극적 기초>를 통해 표현한 선험적인 '인간행동학'과 경험적인 '역사학'를 떠올리며 리뷰를 마무리한다...
PS. 수리논리학에서 자연수 체계를 설명하는 페아노 공리계(Peano's axioms)에서 1은 근본원리(Primitive notion)에 속한다. 별다른 정의없이 사용되는 1의 존재를 통해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라는 신학(神學)요소를 확인함과 함께 선험적이라는 수리세계의 실체( substance) 역시 경험의 연장(extension)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