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사회는 중세의 산업 계급처럼 상업과 각종 예술과 더불어 전개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술은 상업이 그렇듯 자유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로마 인들은 상인도, 예술가도 아니었습니다. 예속 국가들에 대한 그들의 입장은 오늘날 우리의 정부의 그것과는 매우 달랐죠. 세계의 정복자였던 그들에게 로마적이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어야 했습니다.(p138)... 그리스의 건축은 옷을 벗은 사람에 비하면 가장 좋을 것입니다. 그의 신체의 부분들은 오직 유기적 구조, 그의 욕구, 그의 뼈대의 결과물이며 그의 근육의 기능들일 뿐이지요. 반면 로마의 건축은 옷을 입은 사람에 비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있고, 의복이 있습니다. 그 의복은 좋거나 나쁠 수도, 원단의 가격이 높거나 낮을 수도, 재단이 잘 되었거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체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p144) <건축 강의 1> 中
외젠 비올레르뒤크 (Eugene Emmanuel Viollet-le-Duc, 1814 ~ 1897)는 <건축 강의 1 Lectures on Architecture 1>에서 그리스와 로마 건축, 나아가 문명(문화)에 대해 위와 같이 비교한다. 책 전반에서 자유로운 그리스 사회에 비해 로마는 철저하게 제도화된 사회였기에 이들간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번 페이퍼에서는 이러한 <건축 강의 1>의 내용을 우리나라 임석재 교수의 서양건축사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비올레르뒤크는 그리스 건축에서 특히 '이성 理性'을 강조한다. 그리스 철학의 이성은 자연에 대한 끊임없는 관찰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이성은 이분법(二分法)으로 대립되는 두 개념의 균형을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부분적으로 서도 다른 두 개념이 전체적으로 이성 안에서 이루는 균형. 이는 두 저자가 바라보는 그리스 건축의 특징이다.
[사진] 그리스 건축물(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Ancient_Greek_architecture)
그리스 신전의 모든 부분을 분리해서 보고, 그것들이 전체와 맺는 관계는 물론 그 각각을 개별적으로 연구한다면 우리는 예술의 존재를 입증하는 그러한 현명하고 섬세한 관찰들의 영향을 항상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술의 존재라는 것은 모든 형태를 이성에 종속시키는 세련된 감정으로서, 이때의 이성은 기하학자의 건조하고 현학적인 이성이 아니라 감각과 자연법칙에 대한 관찰에 의해 인도되는 이성입니다.(p102) <건축 강의 1> 中
그리스 건축은 서양문명사의 흐름을 구성하는 대표적 쌍개념들이 하나로 통합되면서 탄생했다. 이러한 쌍개념들로는 자연과 인공, 정신과 육체, 전체주의와 개인주의, 규범과 자유정신,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단순성과 다양성, 원형성과 가변성, 남방문화와 북방문화, 전쟁문화와 상업문화 등을 들 수 있다.(p114)... 그리스 건축에서 관찰되는 장점은 균형감각이다. 많은 내용들이 하나로 합쳐지면서도 혼란스럽거나 극단으로 흐르지 않고 중용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점이 그리스 문화의 힘인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 건축에서의 종합화가 단순 합이 아닌 정제 精製의 의미에서의 추상작업이었기 때문이다.(p115) <임석재 서양 건축사 1 : 땅과 인간> 中
그리스 인은 이성의 규칙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성은 추론하고, 논쟁하며, 구속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로마의 입법 정신에 들어맞지 않지요. 대칭을 예술의 첫 번째 법칙 중 하나로 선언함으로써 로마 인은 끝없는 문제와 불확실성을 피해 갔습니다.(p182) <건축 강의 1> 中
로마의 정치 체제에 대해 이해하지 않고서는 로마 미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미 맣한 것처럼 로마 인들은 정치적인 민족이고, 그런 그들에게 예술은 그리스 인들에게서와 같은 향락이 아니라 도구이고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로마 인은 자신의 방대한 조직 체계에 편입되지 않는 모든 것을 거부합니다. 특정한 예술 형식이 그 예술의 원리들과 조화를 이루는지의 여부를 아는 것은 그의 안중에 없습니다.(p133) <건축 강의 1> 中
그렇지만, 로마 건축에 대해서는 두 저자의 입장이 다르다. <건축 강의 1> 에서 비올레르뒤크는 자유로운 그리스 문화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반면, 규격화된 로마 문화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다. 로마의 건축에는 서로 다른 사상과 건축 기법이 기술적으로만 결합했을 뿐 여기에는 로마인만의 철학이 들어갈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 비올레르뒤크의 주된 비판 내용이다.
[사진] 로마 상수도관( 출처 : https://www.ancient.eu/Roman_Architecture/)
에트루리아 인들로부터 로마인 들은 석재들을 건식 쌓기(joined stone / pierre appareillee)한 원형 아치를 받아들였습니다. 캄파니아 인들에게서는 종교 건축의 일반 계획, 그리스식 주범, 주거의 배치와 장식을 배웠지요. 따라서 그들은 별개의 두 원천에서 각각 이런 것들을 빌려다 쓴 셈입니다. 그들은 정반대의 두 원리, 즉 그리스식 인방과 에트루리아식 아치를 결합하려고 했습니다.(p129) <건축 강의 1> 中
반면, <임석재 서양 건축사 1>에서 로마 건축에 대해 긍정적이다. 저자에 따르면 로마 건축술의 결합은 당연한 것이었다. 테베레 강(fiume Tevere)의 작은 도시 국가가 서쪽으로는 에스파냐, 북쪽으로는 라인강, 동쪽으로는 이집트, 남쪽으로는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대제국으로 성장하면서 로마 시민의 의식은 크게 높아졌다. 반면,이를 건축으로 표현하기에는 기존 건축술이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건축술의 결합은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다. 마치 콘크리트와 철근이 결합하여 철근콘크리트가 탄생한 것처럼.
로마만의 독립적 문명이 시작되면서 로마 고유의 건축도 완성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집단주의와 팽창주의라는 공화적을 대표하는 두 가지 건축적 정체성이 형성되었다. 로마 건축의 집단성은 공화정이라는 정치체제에 의해 최초로 형성되었다. 공화정기 때 집단의식을 형성한 가치관은 로마 민족의 우수성이었다. 집단의식은 건축에도 반영되어 화려한 과시욕의 표출로 나타났다.(p250)... 로마만의 건축을 창출해내기에 이전의 건축술은 역부족이었다. 새로운 건축술의 발명을 포함한 산업기술 체제의 실속 있는 정비가 필요했다. 건축행위를 유발시키는 동기 또한 상식적 수준을 뛰어넘는 비상한 요구가 필요했다. 이 모든 것을 만족시킨 것이 팽창주의였다.... 이 두 가지 상황이 함께 작용하면서 로마 건축은 발전했다.(p252) <임석재 서양 건축사 1 : 땅과 인간> 中
이처럼, 로마 시대 건축을 바라보는 두 저자의 입장은 조금 다르다. 그렇다면, 이러한 입장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개인적으로 이에 대한 해답은 <건축 강의 1>에서는 다루어지지 않은 헬레니즘(Hellenism)으로부터 찾아야 할 것이라 여겨진다.
[사진] 헬레니즘 시대 건축물(출처 : https://fineartamerica.com/art/hellenistic+architecture)
기원전 2세기에 나타난 헬레니즘화와 구조기술의 발전은 공화정건축뿐 아니라 로마 건축 전체를 대표하는 특징이었다. 전자는 신전으로 상징되는 고급건축을, 후자는 토목 인프라로 상징되는 실용건축을 각각 대표했다.(p255)... 헬레니즘화는 로마 건축에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의 양면적 영향을 끼쳤다. 구조기술의 발전은 이 가운데 부정적 측면에 대한 치유적 성격을 가지면서 로마 건축만의 특징으로 자리잡았다. 헬레니즘화가 끼쳤던 긍정적 영향은, 로마 공화정 건축의 본격적인 출발을 촉발시키면서 양식의 수준을 처음부터 일정하게 유지시켜 준 것이었다... 헬레니즘화에는 부정적 측면도 있었다. 로마 건축은 헬레니즘 건축을 모방하면서 자신만의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헬레니즘 건축의 아류에 머무는 한계를 갖게 되었다.(p256) <임석재 서양 건축사 1 : 땅과 인간> 中
신라 석굴암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여겨지는 헬레니즘 문화는 고대 그리스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III Magnus, BC 356 ~ BC 323)이 만들어낸 제국 안에서 그리스와 페르시아, 이집트, 인도 등 여러 문명(文明 Civilization)이 통합되면서 탄생한 헬레니즘이라는 제국 문명이 이미 존재하였기 때문에, 로마는 새로이 만들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여기에 숟가락만 올린 것은 아니었을까. 로마인들 특유의 실용성을 생각한다면, 그리 무리한 추정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스의 건축은 언제나 수직, 수평선들과 표면들의 조합으로 진행됩니다. 로마의 건축은 이 두 가지 원리들에 아치와 궁륭, 즉 곡선과 오목면을 추가합니다. 공화국 시대부터 우리는 로마 건축이 이 새로운 요소를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그것은 곧 지배적인 원리가 되고, 결국은 앞의 두 원리들을 지배하게 됩니다.(p179) <건축 강의 1> 中
시간이 흘러 로마 제국 전성기가 지나고 비잔틴 시대에 들어서면서, 제국의 중심은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과 인근 그리스 지역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지리적으로 비잔틴 제국은 그리스에 위치했지만, 비잔틴 시대의 건축은 이전 그리스 건축과는 달랐다. 제국 말기 로마의 국교로 공인된 기독교(基督敎)와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비잔틴 문화라는 독특한 양식이 출현하게 된다.
비잔티움의 그리스 인들은 포착할 수 없는 추상들, 철학적/종교적 교의들에 대해 토론하면서 한편으로는 조형 미술에 이교적 형태를 부여할 것은 주장합니다. 그것은 이 민족의 본능과 정신 사이에 존재하는 독특한 모순입니다.(p335)... 아시아와 서양의 중간에 위치한 이 나라는 이중적인 능력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리스는 예술의 아름다움, 불변의 아름다움을 소중하게, 때로는 완고하다시피 보존합니다. 반면 그들은 과학과 변증법의 방대한 범위에서, 그리고 도덕적 영역의 엄격한 탐구에서 앞장서며 현대인들조차 이끌어 갑니다.(p336) <건축 강의 1> 中
[사진] 성소피아 성당(출처 : https://www.flickr.com/photos/24467253@N04/5890779855)
비잔틴 교회, 넓게는 비잔틴 건축의 특징은 중앙집중형으로 대표된다. 비잔틴 건축은 중앙집중형 공간의 보고이다. 비잔틴 건축은 90퍼센트 이상이 중앙집중형 공간으로 구성된다. 통사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도 비잔틴 건축은 중앙집중형 공간이 가장 발전한 시기였다. 중앙집중형 공간의 역사에서 비잔틴 건축은 가장 발전한 구성기법과 가장 풍부한 예를 남긴 시기였다. 비잔틴 건축은 르네상스나 바로크 등과 같이 이후 시기에 중앙집중형 공가을 추구하는 경향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p338) <임석재 서양 건축사 2 : 기독교와 인간> 中
<건축 강의 1>에서 비올레르뒤크는 그리스 문화와 로마 문화를 건축학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그는 로마 문명은 이질적인 문화의 단순한 결합으로 규정하고 비판을, 그리스 문명은 자유와 이성을 바탕으로 한 우수한 문화로 칭찬을 아끼지 않는데, 저자의 이런 관점은 '작은 사회 = 자유로운 사회'라는 생각 위에 놓인 듯하다.
민족성(nation / nationalites)의 역사를 근대적 관념들에 따라 판단하려고 하는 것은 오류입니다. 아테네 인들의 애국심은 로마 시민들이나 19세기 파리 인들의 애국심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민족성보다는 이런 사회(association / societe)의 상태가 예술의 발전에 현저하게 유리합니다. 그들에게 애국심이란 로마나 근대 유럽 국가들에게서 발전된 감정보다는 한 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에 존재하는 연대에 가까웠습니다.(p116) <건축 강의 1> 中
그렇지만, 이러한 비올레르뒤크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건축사 측면에서 당대 우수한 고대 문명의 결정체인 헬레니즘을 서방 세계 곳곳에 전파시켰다는 것만으로도 로마 문명은 충분히 제 할 일을 한 것이 아닐까. 모두가 창업을 할 수 없고, 창업(創業) 이후에 수성(守城)이 어렵다는 말도 생각해본다면, 로마 문명 나름의 역할을 잘 수행한 것이 아니었을까. 또한, 로마 문명은 처음으로 세계 종교인 기독교를 탄생시켜 비잔틴 예술을 만들어냈다는 점도 고려한다면, 로마 예술이 헬레니즘의 아류라는 비판도 지나친 면이 있다 생각된다. <건축 강의 1>과 <임석재 서양건축사>를 통해 로마 건축과 로마 문명의 의의에 대해 생각하면서 이번 페이퍼를 마무리 한다.
PS. 그리고, 무엇보다도 로마 시대에 이루어진 가장 큰 변화는 개인 생활(private life)의 등장이 아닐까 생각된다. 전체주의 도시 공동체의 부분으로 느끼는 개인의 자유와 거대한 제국의 보호 아래 느끼는 개인의 평온함. 서로 다른 이들 가치 중에서 우열을 가리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도시에서는 개인 주택 규모와 장식이 극히 소박했다. 모든 웅장함과 사치는 공공 분야, 즉 도시만이 누릴 수 있다고 생각되었으며, 그리고 이러한 도시 자체가 개인과 공동체의 융해,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합치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여기서 개인은 자신이 정치적 공동체에 속하고 있다는 사실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었다... 헬레니즘 시대에 들어서면 고전 시대의 도시가 위기에 처하면서 변화가 초래되는데, 한마디로 공적인 영역이 줄어드는 대신 사적인 영역이 괄목할 만큼 확대된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주택이 점점 사치스러워지고 개인 소장품이 증대되는 동시에 예술 작품이 상품으로 자리잡게 되는 현상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p462) <사생활의 역사 1>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