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부산 출장을 마치고 밤늦게 운전하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때마침 내리는 많은 비로 잠시 쉬어가게 된 경부고속도로 언양휴게소. 매장 한 편에서 반구대 암각화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비가 오는 늦은 밤. 갈 길을 멀었지만 잠시 커피를 마시면서 반구대 암각화 자료를 감상했습니다. 비록, 실제 자료의 모사품이었지만, VOD 자료까지 갖추고 있어 암각화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번 페이퍼는 '반구대 암각화'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한국 미술의 역사>에서 찾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사진] 언양 휴게소 반구대 암각화 1


[사진] 언양 휴게소 반구대 암각화 2

 

 선사시대의 미술 중에서 회화적인 표현체로서 먼저 주목되는 것은 바위의 표면에 새겨서 나타낸 암각화(岩刻畵), 즉 바위그림이라 하겠다... 1970년에서 1972년에 걸쳐 경남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川田里)와 언양면 대곡리 반구대(般龜臺)의 태화천 냇가 두 군데 암벽에서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바위그림이 발견되었다.(p31)... 대곡리 반구대에 있는 바위 그림에는 각종 동물, 사람, 배 등이 새겨져 있어서 이곳이 어로사냥과 관련된 제사 장소였음이 분명하며, 성격은 시베리아에서 발견되는 선사시대 바위그림과 같다. 반구대 그림은 크게 좌/우 두 부분으로 갈라지는데, 왼쪽 부분은 고래, 돌고래 등 바다짐승의 전체 모습을 쪼아서 나타낸 실루엣 그림인데 비해 오른쪽 부분은 호랑이, 사슴, 멧돼지, 개, 곰, 산양, 여우 등 짐승을 선각화(線刻畵)로 나타낸 것이어서 이곳 주민들이 바다 짐승 사냥에서 들짐승 사냥으로 옮겨갔고, 그림 양식이 영화(影畵)에서 선각화로 바뀌어 갔음을 알 수 있다... 청동기 시대에는 신석기시대 이래의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이며 상징적인 전통과 함께 새로이 사실적 경향의 미술이 등장하여 두 가지 계보를 이루며 병존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p32) <한국 미술의 역사> 中


 반구대 암각화에 나타난 그림에서 사냥감이 바다 동물에서 육상 동물로 바뀌었다고 보는 근거는 심리학 측면과 미술사 측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심리적으로 '왼쪽'에 대한 부정적 원형(原形)이 심리학 측면의 근거라 여겨집니다.

 

 Left 왼쪽 : 보통 왼쪽은 사물의 불길함, 어둠, 서출 庶出, 달이 의미하는 내향적인 면을 뜻하며 과거를 나타낸다... 크리스트교에서 최후의 심판 때 어린양들은 신의 오른쪽에 있고, 염소는 왼쪽에 서 있다... 중국에서는 반대로 왼쪽은 약함과 음(陰)이며, 명예로운 쪽이다. 그래서 오른쪽은 양과 강함을 나타내며, 폭력적인 경향이 있어 자멸하는 경향을 나타낸다.(p194) <그림으로 보는 세계문화상징사전> 中


 고대 중국의 노자(老子)를 제외하고 일반적으로 왼편을 부정적, 과거의 것으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왼편을 과거로, 오른편을 그 이후라고 보는 추론이 가능할 것입니다.  사냥감의 종류가 바다 동물에서 육상 동물로 바뀌었다는 사실은 우연히도, 왼편의 고래의 진화가 육지에서 바다로 이루어졌다는 것과 반대로 이루어져 작은 발견의 즐거움(?)을 가져 봅니다.

 

 내가 가장 흔히 받는 질문은 고래가 왜 물로 들어갔느냐는 것이다... 고래는 매우 정교하게 완성된, 육상생활에 적응된 몸을 가지고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약 800만 년 만에, 대양에 완벽하게 조율된 몸으로 바꾸었다... 작은 너구리만 한 우제류들이 꽃과 이파리를 뜯어먹다가, 위험을 피해 물속에 숨었다. 이들의 후손들은 포식자로서 물속에 숨어 먹잇감을 정찰하며, 물속에 머물렀다. 뒤이은 후손들이 빠르게 헤엄치는 법을 알아냈고, 새로운 먹잇감을 쫓았고, 땅 위에서 돌아다니는 능력을 조금씩 잃어버렸다. 다양한 방식의 헤엄을 실험한 뒤, 이들은 마침내 자신의 몸을 미끈한 유선형으로 바꾸었다. 따라서 육지에 대한 모든 유대가 끊어졌다.(p266) <걷는 고래> 中


  보다 정밀한 시대 구분은 미술 기법의 차이를 통해서 잘 뒷받침됩니다. 왼편의 그림들보다 오른편 그림들이 보다 정밀한 기법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추론 이상의 명백한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기왕 선각화 기법이 나왔기에, 조금 더 나아가 선각화의 특징이 잘 담겨진 '농경문청동기'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반구대의 암각화에 보이는 선각화의 전통은 뒤에 청동기 편에서 소개할 농경문 청동기를 비롯한 일부 청동기 문양에서도 볼 수 있다.(p32) <한국 미술의 역사> 中


[사진] 농경문 청동기(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농경문청동기 農耕紋 靑銅器는 외곽선을 따라 거치문 鋸齒紋을 새겨서 전체적인 틀을 만들고 가운데에 격자무늬 기둥을 세워 좌우로 공간을 마련했는데, 왼쪽 공간에는 머리에 깃을 꽂은 인물이 새를 잡는 장면이 그려져 있고 그 앞에는 배부분이 볼록하고 몸 전체에 그물모양의 무늬가 새겨진 그릇이 놓여있다.... 제사 의식에 쓰였을 것으로 생각되는 청동기의 일부로, 윗면이 기와집의 지붕 모양을 닮았다. 윗 부분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여섯 개의 구멍이 뚫어져 있는데 아마도 끈을 꿰어 다른 기물과 연결하여 사용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p26) <회화 1> 中


 "반구대 암각화"와 "농경문 청동기"는 기법상으로 선각화의 방식으로 만들어졌다는 점 외에 등장 인물에 있어서도 공통점을 가지는데, 바로 벌거벗은 남자 무당의 모습을 통해서 입니다.


  "반구대 암각화"의 왼쪽 맨 윗부분에는 발기한 성기를 노출하고 합장하고 있는 남자 무당 그림도 있다. 일본에서는 산으로 사냥하러 들어갈 때 산신 앞에 벌거벗고 제사지내는 풍습이 현재까지 남아 있어 우리나라에서는 없어진 고대수렵의식의 표현임을 알 수 있다.(p32) <한국 미술의 역사> 中


 인물은 간략한 선으로 골격만을 묘사하였는데, 순간적인 동작을 포착하여 묘사한 상징적인 표현이 매우 뛰어나다. 인물의 성기를 노출시킨 점이나 몸 속까지 투과하여 표현하는 X-레이 기법을 사용한 점에서는 대곡리 암각화와 기법상 유사함을 엿볼 수 있다.(p26) <회화 1> 中


 수렵 시대(狩獵時代)에 많은 사냥감을 얻기를 기원하며 하늘에 그 뜻을 올리는 남자  무당의 모습을 통해 고대 무녀(巫女) 역시 함께 떠올리게 됩니다. 고대 문명에서 땅에서의 소원을 하늘에 알리는(誥)역할을 남자 무당이 했다면, 하늘의 뜻을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수행하는 역할을 여자 무당이 수행한 것은 아닐까. 양(陽)의 기운을 가진 하늘에 대한 기도는 남성(陽)을 통해서, 음(陰)의 기운을 가진 땅에 대한 답은 여성(陰)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을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이러한 이유로 현대에도 제례(際禮)를 주관하는 이가 대부분 남성인데 반해, 미래를 점(占)치는 이들은 여성임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하고 연관도 지어봅니다. 동시에 가톨릭에서 사제직 계승이 남성 중심으로 이어진 것은 이러한 고대의 전통에 기반한 것일까하는 몇 가지 질문을 암각화 안의 인물을 통해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의 기원은 예술로 발전하여 오늘날에 이르게 되는데, 간절한 자신과 공동체의 표현이 어떻게 후대의 '예술(藝術 art)' 로 발전했는가는 <건축 강의 Lectures on Architecture 1>에서 잘 설명됩니다.

 

 예술들은 기운에 있어 자연적 욕구들로, 만족을 얻기 위해 인간 영혼의 특정한 본능들에 종속되는 형식을 취합니다. 그런데 이 본능들은 오랜 관찰에 의해 규칙들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진작부터 말과 기호들이 그의 영혼이 가진 모든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충분치 않음을 인식했습니다... 인간은 예견하고 희망하고 기억하며, 인간의 음성은 그의 의지에 따라 그가 자신의 동류와 소통하고자 하는 감정들을 표현합니다.(p32)... 예술은 전적이고 완전하게 존재합니다. 우리의 원시 영웅이 죽자 그의 가족은 바위에 그의 유해를 보관할 감실을 파내고 그 위에 사자와 싸우는 남자의 모습을 새깁니다. 남자의 형상은 거대하고 사자는 왜소할 것입니다. 망자의 친지들은 행인들이 재현된 그들의 아버지 혹은 남편을 보고 그가 막강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았으면 하기 때문입니다.(p34) <건축 강의 1> 中


 우리는 예술 작품에서 감동(感動)을 기대합니다. 큰 울림을 주는 예술작품을 걸작(傑作)이라 부르고, 위대한 예술가를 존경하는 것은 예술의 기원 자체가 간절한 기도(祈禱 pray)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며,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 합니다...

 

 종교의 실천적 요구와 종교적 경험은 개인들을 초월하여 그 사람에게 끊임없이 연속적 형태로 그와 그의 관념들에게 친근한 광대한 힘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통해 충분하게 충족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사실이 요구하는 모든 것은, 그 힘이 우리가 의식하는 자아들보다 더 광대하고 다른 존재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다음 단계로 향한 충분한 신뢰를 주기에 충분할 만큼 더 광대한 존재라면, 어떤 것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것은 무한할 필요도 없고 유일할 필요도 없다. 상상컨대, 단지 더 광대하고 더 신 같은 자아이다. 그 자아의 현실적 자아는 다각적 표현일 따름이다.(p614)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中


 PS. 윌리엄 제임스의 글 속에서 스피노자의 향기를 느낀다면 너무 예민한 것은 아닐까 모르겠습니다... 유리 렌즈 냄새같지는 않지만, '영원의 상(相)'의 모습이 이것과 비슷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PS2. 암각화 속의 고래 사냥을 보니, 최근 일본에서 고래 조업을 다시 시작한다는 기사가 생각납니다. 이와 함께 한국에서 호랑이가 멸종된 것도 일제(日帝)시대였다는 것도 떠올린다면, <축소 지향의 일본인>에서 말하는 넓은 공간 또는 큰 것에 대한 일본인들의 공포가 호랑이와 고래 등의 남획으로 이어진 것은 아닌가 여겨집니다...


[관련기사] https://www.bbc.com/korean/international-4882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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