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과 시간은 칸트에게는 결코 경험적 개념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도대체가 개념이 아닐 뿐더러 경험적 표상도 아니고 한낱 순수한 직관들이다... "직관은 개별 표상(repaesentatio singularis)"으로서 "대상과 직접적으로 관계 맺는다". 직관은 대상과 무매개적으로 또는 "곧바로(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다. 개별 표상이란 여러 대상들에 공통적인지 않은 표상, 그러니까 하나의 특정한 대상 내지는 단 하나의 대상에 대한 표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간/시간은 개별 표상이다... 공간/시간은 감각 경험으로부터 자유로운 "순수"하고 "선험적"인 직관이다.(p37) <순수이성비판 1> 中
<순수이성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ft>에서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는 시간과 공간을 경험으로 인식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닌 정신이 직관하는 대상으로, 사물은 정신에 의해 감지될 때에 시간과 공간 속에 나타나는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칸트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대강의 개념은 오늘날에도 받아들여진다. 예를 들어 시각(視覺)을 통한 정보 전달은 과학적으로 아래와 같이 뒷받침될 수 있다.
색과 관련된 현상은 부분적으로 물리적 세계의 특성에 따라 좌우된다. 그러나 색이라는 것은 결국 우리 눈이 받아들인 외부의 정보(빛)가 두뇌를 통해 재구성된 결과이다. 물리학은 눈으로 날아오는 빛의 성질을 규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빛이 일단 우리 눈으로 들어온 후에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들은 광화학과 신경학, 그리고 심리학적 과정에 더 가깝다.(35-1)... 눈의 경우에는 세 개의 층을 이루는 세포들이 복잡한 계산을 수행하여 색을 분석한 후, 그 결과과 시신경을 통해 두뇌로 전달된다. 망막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생리학적 과정들은 외부의 자극에 두뇌가 반응을 보이는 첫 단계인 셈이다.(36-2)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 1> 中
[그림] 망막( 출처 : 위키백과)
'본다'는 행위가 망막을 통해 '빛 light'으로 표현된 세상의 정보가 뇌에 전달되는 과정이라고 할 때, 우리가 오감(五感) 중에서 가장 신뢰하는 '시각(視覺) 정보' 는 대상과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직관인 '빛 light'을 통해 전달된다. 우리가 인식하는 정보의 약 70%가 '빛'이라 한다면. 칸트 철학에서 '빛'이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작지 않다 하겠다.
사실, 빛이 칸트 철학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고대 철학에서 로고스(logos)로 표현되는 '빛'의 중요성은 고대의 여러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빛에 밝음과 긍정적인 이미지를 부여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빛은 '선한 신'의 속성 또는 부분이 되었다.
프로메테우스는 물과 흙으로 인간들을 빚은 다음 제우스 몰래 회향풀의 줄기에 감춰두었던 불을 인간들에게 주었다.(7장 1, p47)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 中
이아페토스이 빼어난 아들은 그분을 속이고는 속이 빈 회향풀 줄기 속에다 감춰 지칠 줄 모르는 불의 멀리 보는 화광(火光)을 훔쳤다.(565 ~ 567, p71) <신들의 계보> 中
불에 대한 가치 부여의 가장 중요한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악취 제거(deodorisation)인 것 같다. 냄새란 더없이 위선적이고 성가시게 자신의 존재를 강요하는, 원초적이며 거역할 수 없는 측질이다. 불이 모든 것을 정화한다면 그것은 불이 무엇보다도 악취를 제거하기 때문이다.(p187) <불의 정신분석> 中
생명은 빛이었다.(요한복음 1:4)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이성적 존재들과 비이성적 존재들을 모두 살아있게 하는 그 생명이 아닙니다 .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말씀에 더해진 것으로서 첫 번째 말씀에 참여하게 돌 때 우리 안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존재하게 되면, 그 생명은 지식의 빛을 얻는 기초가 됩니다.(p98) - 오리게네스의 <요한복음 주해> 中 -
지혜가 여기에 있습니다. 눈먼 사람 앞에 지혜가 있지만 그의 눈에는 지혜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지혜가 그의 앞에 없어서가 아니라 그가 지혜 앞에 없기 때문입니다.(p99) - 아우구스티누스의 <요한 복음 강해> 中 - <교부들의 성경 주해> 中
이러한 빛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은 현대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받아들여지면서 시간(time)과 공간(space)이 시공간(space-time)으로 통합되었고, 빛의 속도는 '절대 속도'로 인정되는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과학의 천재들>은 기차 안에 두 개의 전구와 전구들 사이의 스크린이 놓예 상황에서 기차가 오른쪽으로 지난다고 했을 때 일어나는 경우를 예로 들며 상대성 이론의 개략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날아오는 두 빛이 속도가 달라야 한다... 아인슈타인의 가설대로라면 빛의 속도는 같기 때문에 오른쪽으로 날아가는 빛이 스크린이 스크린에 닿으려면 더 오래 걸려야 한다. 따라서 오른쪽으로 가는 빛을 내는 왼쪽의 전구는 오른쪽의 전구보다 더 먼저 켜졌어야 한다. 두 개의 전구를 켜는 일, 즉 두 사건이 제2관찰자에게 있어서는 동시에 일어난 일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동시성은 관찰자에 따라 상대적이다. 동시성에 대한 이 같은 불일치를 불어오는 핵심적인 이유는 두 관찰자가 왼쪽으로 날아가는 빛과 오른쪽으로 날아가는 빛이 둘 다 같은 속도를 가진다는 가정 때문이다.(p130) <과학의 천재들> 中
'엠씨스퀘어'로 표현되는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방정식은 에너지가 질량으로 변환될 수 있으며, 광속 이상의 속도를 내는 것이 불가능함을 직관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광속(光速)을 절대속도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현대에 와서도 빛을 절대적인 존재로 인식하는 태도는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에너지 E는 입자의 정지 질량과 같아진다. 이때 시간의 단위를 보통의 시간으로 바꾸면 다음 식이 얻어진다.
다시 말해서 질량과 에너지는 본질적으로 동등하며, 같은 것에 대한 서로 다른 표현인 것이다. 즉 물체의 질량은 상수가 아니가 아니고 에너지에 따라 달라진다. 또한 우리는 마지막 식으로부터 q가 1, 곧 광속에 접근함에 따라 E가 무한대로 발산함을 알 수 있다.(p107) <상대성이란 무엇인가> 中
이와 같은 수학적(또는 과학적)판단에 대해 우리는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받아들이는데, 이러한 판단의 근거를 우리는 <순수이성비판>안에서 찾을 수 있다.
수학만이 입증들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수학은 개념들로부터가 아니라, 개념들의 구성, 다시 말해 개념들에 대응해서 선험적으로 주어질 수 있는 직관으로부터 인식을 도출하니 말이다. 방정식에서 환산에 의해 증명과 함께 참값을 구해 내는 대수학자들의 수행방식조차도 비록 기하학적인 구성은 아니지만 기호에서 개념들을, 특히 양들의 관계에 대한 개념들을 직관에서 제시하는 아주 특별한 구성이다.(B762, p880) <순수이성비판 2> 中
그렇지만, 이와 같은 수학적 판단을 우리는 그대로 받아들여야하는 것일까? 수학적 진리를 선험적이라고 말한 칸트는 같은 책에서 수학적 종합의 한계 역시 지적한다. 수학적 연결이 계열 외의 것을 표현할 수 없다는 칸트의 말을 통해 우리는 '빛의 절대성'에 대해서도 의심할 수 있지 않을까.
현상들의 계열들의 수학적 연결에서 감성적 조건, 다시 말해 그 자신이 계열의 한 부분인 그러한 것 외에는 어떤 다른 조건도 들어올 수 없게 된다.(B558, p722) <순수이성비판 2> 中
'빛'은 고대로부터 지혜, 지식, 생명의 상징이었다. 이러한 상징에 우리는 수학이라는 이름으로 절대속도인 '광속'이라는 또다른 절대성을 부여한 것은 아닐런지... 문화와 떨어질 수 없는 우리의 인식이 부여한 빛의 절대성. 개인적으로 빛의 이러한 속성 함께 아직 입증되지 않은 입자 타키온(tachyon)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림] What is a Tachyon particle anyway?(출처 : https://www.1e.com/news-insights/blogs/what-is-a-tachyon-particle-anyway/)
타키온 tychyon 광속(光速)보다 빠른 입자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예측에서 그 입자에 대한 명칭.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광속보다 빠른 입자는 없으나,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는 상대성 이론의 방정식 해석 여하에 따라서는 광속을 넘어설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개인적으로 아직 실증되지 않았지만, 타키온의 의미는 과학에만 머무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사고(思考)가 우리 문화(文化)의 영향을 짙게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주어진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닐까. 특히, 그 근거가 구체적인 숫자로 제시되면서 과학(科學 science)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면 이를 논박하기 어려운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많은 것이 객관적으로 측정되고 정량화된 수많은 정보가 쏟아지는 현실안에서 어쩌면 우리는 과학이라는 이름의 비과학적 사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과학의 출발이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 ~ 1650)의 방법론적 회의(methodological skepticism) 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우리는 보다 많은 것에 의문을 던져야 하지 않을까.
현재 수학적으로 공인된 방정식에서 상수(常數 a constnant)로 가정되었던 항목이 변수(變數 variable)로 바뀔 때 혁명적 변화가 일어났었고, 이러한 패러다임(paradigm)의 변화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또한 비켜갈 수 없었다. 칸트 시대 당시 선험적이라 여겨졌던 뉴턴과 유클리드의 사상이 이제는 더이상 선험 지식이 아니라는 변화된 현실 속에서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비록 <순수 이성 비판>의 구체적 내용은 새로운 경험에 의해 바뀌었지만, 인식의 틀은 현대에도 유효하다는 사실 속에서 서양 철학에서 칸트가 차지하는 위상을 조금이나마 짐각하게 된다. 칸트의 사상이 워낙 큰 틀이었기에, 이러한 틀을 깨기보다는 보완하기 위한 방편으로 변증법(辯證法, dialectics)의 등장하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도 조심스럽게 해본다.
우리가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는 수학의 진리가 사실은 우리 인식(또는 문화)의 산물일 수도 있다는 사실과 열린 가능성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최근 읽은 책들 안에서 두서없이 나열하면서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PS. 시간여행에 대한 뜬금없는 생각
M이론에 따라 세상이 11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시간 여행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11개 차원이라는 이야기를 각 사건(event)마다 11개 좌표를 가진다는 의미로 본다면, 최대 4차원까지 통제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나머지 7개 차원의 7개 좌표를 통제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이 나오지 않는한 웜홀(wormhole)을 활용한다 하더라도 시간 여행을 불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