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하우스
스티븐 J. 굴드 지음, 이명희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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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경향이란 정해진 방향으로 나아가는 어떤 확고한 실체가 아니라 변이의 증가와 감소 결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며, <우수성의 확산> 혹은 <진보의 경향>이란 변이의 확장과 축소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정확함을 보일 것이다.(p31)... 이 책은 진보라는 관념은 네번째 프로이트적 혁명이 드러낸 단순 명료한 의미를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는 사회적 편견과 심리적 희망이 만들어 낸 망상임을 증명한다.(p38) <풀하우스> 中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 1941 ~ 2002)의 <풀하우스 Full House>는 진화(進化 evolution)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책이다. 생명의 진화가 단순 구조를 가진 종(種)에서 복잡한 구조를 가진 종으로 진보(進步)했다는 기존의 인식에 대해 저자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진보적 진화론자의 주장은 생물계(界) 전체가 아닌 일부에 적용되는 부분 모델에 불과하다. 


 진보의 추종자들은 최대값에만 초점을 맞추어 가장 복잡한 생물의 역사만을 살펴보았으며, 가장 복잡한 생물에서 나타나는 복잡성의 증가를 모든 생물의 진보라고 착각하는 우를 범했다. 이것은 비논리적인 주장이며 비판적인 독자들을 항상 혼란시켜왔다.(p232) <풀하우스> 中


 진화는 정교하고 복잡하게 갈라지는 가지[分枝]처럼 <분지 진화 cladogenesis>의 방식으로 진행된다. 경향이란 하나의 길을 따라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종 분화 사건에서 다음 종의 분화 사건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복잡한 전환 또는 옆길로 들어서는 과정이다.(p93) <풀하우스> 中


 저자는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초기 생태계에서부터 지금까지 멸종되지 않고 여전히 다수를 차지하는 박테리아(bacteria)를 든다. 진화가 진보를 의미한다면 오래 전 지구에 등장한 박테리아는 현재 복잡한 종에 밀려 멸종하는 것이 타당하겠지만, 현실에서 박테리아는 어느 종의 동식물보다 많은 개체가 존재한다. 이처럼 진보적 진화론은 현상을 충분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한계를 <풀하우스>에서 저자는 분포 곡선(distriubution curve)을 도입하여 새로운 설명을 시도한다.


 소수의 생물들은 변이가 열려 있는 쪽으로만 계속 복잡성을 진화시켜 왔다. 그러나 최빈값은 유구한 생명의 역사 기간 내내 박테리아였다. 박테리아는 어떤 기준에 비추어 보아도 태초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지구에서 가장 성공적인 생물일 것이다.(p62) <풀하우스> 中


 화석 기록이 서양 문명을 정당화하는 데 필요한 진보의 증거가 되지 못함을, 즉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생명이 복잡성이 증대되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음을 확증해 주는 분명한 증거가 될 수 없음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생명의 역사에서 단순한 형태는 언제나 그러했으며, 아직도 여전히 생명계 전체에서 가장 우세하다. 따라서 진보라는 관념은 기초적인 증거에서부터 이미 지지받을 수가 없다.(p231) <풀하우스> 中


 저자에 따르면 생명의 진화는 복잡성(또는 다양성)의 증가를 의미하지만, 이러한 증가가 생태계 구조 전반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규분포와는 달리 비대칭분포를 이루는 분포 곡선에서 시간의 흐름은 곡선의 꼬리(long tail)를 증가시키지만, 구조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않기 때문이다. 


[사진] 생명의 복잡성 빈도 분포 곡선(출처 : <풀하우스> p237)


 실제의 분포는 보통 비대칭적이다. 비대칭 분포에서는 변이가 어느 한쪽으로 기운다. 곡선이 기울어지는 방향에 따라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분포, 왼쪽으로 기울어진 분포라고 부른다. 곡선이 기울어지는 원인은 대단히 흥미로우며 자연의 시스템에 대한 커다란 깨달음을 준다. 기울어짐은 무작위성에서 벗어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p82) <풀하우스> 中


 한 시스템 내의 평균값은 언제나 일정하다. 방향성이란 그러한 시스템의 가장자리가 확장되거나 위축되는 변이의 한 극단에서 찾아낸 희귀한 대상에 근시안적 초점을 맞추는 것에서 비롯된다.(p55) <풀하우스> 中


 <풀하우스>에서 말하는 저자의 주장은 저자가 말하는 '다윈 혁명'에 잘 요약된다. 진화는 주류의 대체가 아닌 극한값의 확장(변이)이라는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볼 때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와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Homo neanderthalensis)의 공존이 설명된다. 개별 개체의 적응이 세대전승 또는 종(種)간 대체가 아니라, 생태계 차원에서 가능성의 확장을 의미한다는  굴드의 주장은 진화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한다.


 다윈 혁명이라는 지적 대변혁은 많은 의미를 가진다. 한편으로는 단순히 성스러운 창조 대신 진화가 인정된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호모 사피엔스가 유구한 역사를 가진 아름드리 계통수 한 구석에 최근에 돋아난 미미한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프로이트적 인식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다윈 혁명은 자연의 참모습을 파악하는 중심 범주를 본질 대신 변이로 대치한 것이다.(p67) <풀하우스> 中


 <풀하우스>는 이처럼 진화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일반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관점은 생물학을 넘어 다른 분야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생각된다. 우생학 (優生學)을 근거로 열등민족을 없애야 한다는 극우집단의 논리나 역사는 발전하는 방향으로 흐른다는 진보주의자의 주장 모두 새로운 관점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만, 이에 대한 논의는 책 리뷰의 범위를 넘기에 다음 과제로 잠시 접어 두고 리뷰를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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