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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단상 ㅣ 동문선 현대신서 178
롤랑 바르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동문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롤랑 바르트(Roland Gerard Barthes, 1915 ~ 1980)의 <사랑의 단상 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은 사랑, 정확하게는 젊은 연인(戀人)들간의 사랑 이야기다. 사랑을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사랑의 단상>에서 묘사되는 사랑의 모습은 '욕망'에 다름아니다. 내가 느끼는 '욕망'과 이를 채워주지 못하는 ''현실'. 이를 인식하는 '결핍한 욕망의 주체'로서 나와 이를 채워주는 상대로서의 ''난 널 사랑해 Je-t-aime'의 '너', 그리고 욕망을 매개하는 언어(sinifiant). 이들의 관계가 <사랑의 단상>의 배경이 된다.
마음은 욕망의 기관이다. 마치 상상계의 영역 안에 사로잡혀 마술에 걸린 것처럼, 사람들은 혹은 그 사람은 내 욕망을 가지고 무엇을 하려는 걸까? 바로 거기에 마음의 모든 움직임이, 마음의 모든 '문제점'이 집결되는 불안이 있다.(p85)... 내가 실제로 충족될까 하는 것은 별로 중요치 않다.(그럴 가망이 전혀 없다 해도 괜찮다). 오직 파괴될 수 없는 충족에의 의지만이 찬연히 빛난다.(p89) <사랑의 단상> 中
욕구불만의 문형은 현존일 것이다.(p34)... 그런데 부재는 결핍의 문형이다. 나는 동시에 욕망하며 욕구한다. 욕망(desir)이 욕구(besoin)에 짓눌린다. 바로 거기에 사랑의 감정의 집요한 사실이 있다.(p35) <사랑의 단상> 中
사랑을 욕망의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사랑하는 나'는 '욕망의 주체'가 될 것이고, 상대는 '욕망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욕망의 주체와 대상은 <사랑의 단상>에서 언어(言語)를 통해 연결된다. 그리고, 사랑의 감정이 담긴 언어 행위를 통해 사랑은 이루어지기도, 깨어지기도 한다.
모든 것은 다음과 같은 원칙에서 출발하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단순히 어떤 증세가 있는 환자로 환원시켜서는 안되며, 오히려 우리는 그의 목소리에서 비실제적인 것, 다시 말하면 다루기 힘든(intraitalbe) 것을 들어야 한다는 원칙 말이다. 이렇게 하여 사례를 들지 않고 오로지 일차 언어의(메타 언어가 아닌) 행위에만 의존하는 '극적인' 방법이 선택되었다.(p13) <사랑의 단상> 中
이런 담론의 파편들을 우리는 문형(fingure)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보다 생동감 넘치는, 즉 휴식을 취하는 상태가 아닌 행동하는 상태에서 포착된 몸짓이다.(p14)... 우리를 스쳐가는 담론 속에서 우리가 알아차릴 수 있는 어떤 것, 즉 언젠가 읽고 듣고 느꼈던 것에 의해 문형은 차려진다... 문형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감정이라는 안내자 외에는 그 무엇도 필요치 않다.(p15) <사랑의 단상> 中
언어의 힘, 나는 내 언어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으나, 내 몸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내가 내 언어로 감추는 것을 몸은 말해 버린다. 메시지는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지만, 목소리는 그럴 수 없다. 내 목소리가 무엇을 말하든간에, 그 사람은 내 목소리에서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p74) <사랑의 단상> 中
<사랑의 단상>에서 낱말이 중요하지 않다. 낱말과 낱말이 모여 만들어낸 문장. 그리고, 문장을 통해 이루어지는 언어 행위의 시간 속에서 오가는 감정을 저자는 세밀하게 분석한다. 그리고, 이러한 저자의 분석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 등과 같은 고전의 지지를 받는다.
부재에는 항상 그 사람만의 부재만이 존재한다. 떠나는 것은 그 사람이며, 남아 있는 것은 나 자신이다. 그 사람은 끊임없이 출발, 여행의 상태에 있다.(p30)... 하나의 (고전적인) 단어가 육체로부터 우러나와 부재의 감동을 말해 준다. 즉 갈망한다(soupirer)란 단어가, 그런데 그것은 '육체의 현존을 갈망하는' 것을 뜻한다. 남여양성겸유자(androgyne)의 두 반쪽은 서로를 갈망한다. 그리스어에는 욕망에 대한 두 단어가 있다. 부재하는 이에 대한 욕망에는 '포토스(Pothos)'가, 현존하는 이에 대한 욕망에는 보다 격렬한 '히메로스(Hiimeros)'가.)(p33) <사랑의 단상> 中
육체의 모든 주름(plis)에 대해 나는 '근사하다'라고 말하고 싶다. 근사해란, 그것은 유일하기 때문에 내 욕망이야란 뜻이다... 그렇지만 내 욕망의 특이함을 느끼면 느낄 수록 이름짓기는 힘들어진다. 과녁의 정확함에 이름의 흔들림이 대응한다. 욕망의 속성은 부정확한 언표만을 만드는 데 있다.(p41) <사랑의 단상> 中
<사랑의 단상>은 연애와 관련한 여러 모습이 담겨 있다. 떠난 이에 대한 아쉬움, 사랑하는 이에 대한 감정과 상황. 만남에서 헤어짐에 이르기까지 연애의 과정에서 중심은 내 자신이며, 사랑은 '욕망'으로 표현된다. '욕망'을 통해 연애의 사랑을 쫓아가는 <사랑의 단상>의 접근법은 연애 경험이 있는 또는 연애중인 이들에게 추억과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면에서 <사랑의 단상>은 매우 훌륭한 책이다. 그렇지만, 만약<사랑의 단상>의 사랑에 대한 접근법에 동감하는가를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다.
나는 충족시키고(충족되고), 축적한다. 그러나 결핍을 채우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의 여분(trop)을 만들어 내며, 바로 이 여분 속에서 충족이 내도한다.(p87)... 모든 '만족감(satisfaction)'을 뒤로 한 채, 과음(soul)이나 포식도 하지 않은 채 나는 포만의 한계를 넘어서서, 역겨움, 구역질, 취기 대신에 일치(Coincidence)를 발견하게 된다. '지나침'이 나를 알맍은 것으로 인도한다.(p88) <사랑의 단상> 中
사랑하는 나에게는 새로운 것, 방해하는 것은 모두 사실의 범주가 아닌, 해석해야만 하는 기호로 받아들여진다. 사랑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사실은 이내 기호로 변형되며, 그리하여 결과론적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결과론적인 것은 사실이 아니라 기호이다.(p97) <사랑의 단상> 中
사랑을 기호학적으로 해석한다면, 다음과 같이 첫 고백 이후 모든 언어 행동은 무의미하다. 이미 '사랑'의 뜻은 전해졌으니까. 그렇지만, 반드시 그럴까.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상대에게 확인받고 싶기에, 항상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또한, 말을 하는 이 역시 '사랑해'라는 말을 통해 일종의 '자기 강화'를 한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언어를 단순한 수단으로 바라보는 저자의 관점은 동의하기 어렵다.
첫번 째 고백을 하고 난 후의 '난 널 사랑해 Je-t-aime'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것은 텅 빈 것처럼 보이기에 약간은 수수께끼 같은 과거의 메시지를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나는 그 말을 그것의 관여성(pertinence) 여부에는 개의치 않고 그저 되풀이할 따름이다. 그것은 언어에서 나와 어디로 배회할 것인지?(p214) <사랑의 단상> 中
사랑하면 할수록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사랑의 행위를 통해 내가 체득하게 되는 지혜는, 그 사람은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 그러나 그의 불투명함은 어떤 비밀의 장막이 아닌 외관과 실체의 유희가 파기되는 명백함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미지의 누군가를, 그리고 영원히 그렇게 남아 있을 누군가를 열광적으로 사랑하게 된다. 신비주의자적인 움직임 : 나는 알 수 없는 것의 앎에 도달한다.(p197) <사랑의 단상> 中
또한, 우리가 사랑할수록 더 모호함에 빠진다는 저자의 주장도 생각해보자. 연애를 하면서 우리는 상대에 대해 알아가지만, 또한 우리의 편견이 깨지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과정을 통해 연인의 이데아(idea)를 깨나가고,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비록 그 모습이 처음의 모습과는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 과정에서 보다 성숙해진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의 짝과 더 가까워지는 경험을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사랑할수록 자기 자신을 알아갈 수 있기 때문에 분명함에 빠진다고 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이의 연장선상에서 우리는 내면에 있는 비밀이 사랑을 통해 외부로 드러나는 체험을 한다. 비록 고통스러울 수도 있는 체험이겠지만.
정보 제공자는 나에게 별 대수롭지 않은 정보를 넘겨주면서 하나의 비밀을 드러나게 한다. 이 비밀은 심오한 것이 아닌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며, 나에게 감추어졌던 것도 바로 이 사람의 이 외부이다. 막은 거꾸로 열린다. 내밀한 장면이 아닌 관중석에서, 그 정보의 내용이 무엇이든간에 그것은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p203) <사랑의 단상> 中
사랑의 인내심은 그 출발부터 자체 부정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것은 어떤 기다림이나 자제력, 속임수, 용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 격심해도 닮지 않는 그런 불행이다.(p204) <사랑의 단상> 中
사랑이 아름답다면 그것은 사랑이 좋은 결실로 연결되었기 때문이 아닐것이다. 변하지 않고 바래지 않는 '영원한 다이아몬드' 같은 사랑을 욕망하고 그것을 얻지 못해 좌절하거나, 그것을 가질 수 있어서(욕망의 충족) 행복하다는 것은 말그대로 사랑의 단면(斷面)이라 여겨진다.
질투하는 사람으로서의 나는 네 번 괴로워하는 셈이다. 질투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질투한다는 사실에 대해 자신을 비난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내 질투가 그 사람을 아프게 할까 봐 괴로워하며, 통속적인 것의 노예가 된 자신에 대해 괴로워한다. 나는 자신이 배타적인, 공격적인, 미치광이 같은, 상투적인 사람이라는 데 대해 괴로워하는 것이다.(p213) <사랑의 단상> 中
나와 맞지 않은 사람과 이루어지지 않아 한 편의 추억으로 남길 수 있다면 그것 역시 사랑의 아름다움이 아닐까. 아니면, 지금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을 통해 더 좋은 사람과 연결될 수 있다면, 헤어짐 역시 완성된 사랑을 위한 과정이 아닐까.
나는 더 이상 해석을 믿지 않으려 한다. 나는 그 사람으로부터 오는 말은 모두 진실의 기호로 받아들여, 내가 말할 때 그가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일지 어떤지는 의문시하지 않으련다. 바로 여기서 선언의 중요성이 비롯된다... 무엇가가 알려지려면 말해야만 하고, 또 그것은 일단 말해진 이상 일시적이나마 진실이 되는 것이다.(p307) <사랑의 단상> 中
마지막으로, 내가 지금 말하는 '사랑해'라는 말은 검증되지 않는 약속이다. 이 말에 담겨진 상대에 대한 존중과 책임감의 무게는 현재가 아닌 미래(未來)에 가능하다는 점에서 바라본다면, 연인들이 말하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확신하기는 어렵다. 진정한 사랑을 알고 말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여겨진다. 유한한 인간 삶을 통해 궂은 일, 좋은 일을 함께 겪고 '영원(永遠)의 상' 아래에서 비로소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사랑의 단상>이 대상으로 하는 시간은 극히 짧은 시간이다.
[그림] Prince and princess(출처 : https://www.pinterest.co.kr/pin/50665564531992133/)
'왕자님과 공주님은 결혼해서 그 후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끝'
대부분의 동화가 위와 같은 말로 끝나지만, 현실은 '결혼식 이후'부터 시작된다. 아쉽게도 <사랑의 단상>은 사랑의 기나긴 여정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꿈과 환상이 가득한 세계에서의 사랑과 욕망. 이것이 이 책이 가진 범위의 한계라 여겨진다.
사람과 관련한 많은 예술 작품이 있지만, 그 안의 어느 작품도 온전하게 사랑을 담지 못하고, 담아낼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랑의 단상>에서 묘사하는 사랑 역시 그런 점에서 사랑의 일부일 수 있을 것이다.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에 대한 저자의 의견에 모두 동의하지 않지만, '사랑'에 대해 일관점 관점에서 논리를 전개시키고 오랜 추억으로부터 사랑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사랑의 단상>은 좋은 책임을 확인하며 이번 리뷰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