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데트 드 크레시의 이미지가 그의 모든 몽상을 흡수해서는, 그 몽상이 그녀의 추억과 더 이상 분리되지만 않는다면 그때 그녀의 육체적인 결함이나 그녀 육체가 다른 여인보다 스완의 취향에 더 어울리는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육체는 그가 사랑하는 여인의 육체이므로 이제부터는 오로지 그 육체만이 그에게 기쁨과 고뇌를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p29)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中
마르셀 프루스트(Valentin Louis Georges Eugene Marcel Proust, 1871 ~ 1922)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 스완네 집 쪽으로 2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 Du Cote de chez Swann>는 2부 스완의 사랑과 3부 고장의 이름 - 이름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품 속에서 우리는 음악으로 표현된 사교계의 명사인 스완과 화류계 여성인 오데트의 사랑을 만나게 된다.
아마도 우리가 듣는 음은 그 높이와 부피에 따라 우리 눈앞에 있는 다양한 차원의 표면을 감싸고 아라베스크 무늬를 그리며 우리에게 넓이, 미묘함, 안정감, 변화에 대한 감각을 주려고 한다. 그러나 그 음은 뒤이어 또는 동시에 나타나는 음이 불러일으키는 감각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이들 감각이 우리 마음속에 충분히 형성되기도 전에 사라져 버린다. 절들의 복사본을 만들어 그것들을 다음에 오는 악절들과 대조하고 구별하게 하도록 해 주지 않는다면, 그 '액체성'과 '뒤섞임'으로 계속 모티프들을 감쌀 것이고 그리하여 모티프들은 거의 식별할 수 없는 상태로 이따금 솟아오르다가 이내 가라앉고 사라지면서 그것이 주는 특별한 기쁨에 의해서만 지각될 뿐 묘사할 수도 기억할 수도 명명할 수도 없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된다.(p46)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中
음악은 스완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사교의 공간인 살롱에서 연주되는 피아노 소리는 밀려드는 바닷가의 파도처럼 스완의 귓가를 밀려들고, 스완의 감정은 이로인해 요동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에서 음악은 감정을 자극하는 수단으로 작용하는데, 이러한 음악의 기능을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 ~ 1831)의 <헤겔미학 Vorlesungen uber die Asthetik> 에서 확인할 수 있다.
(회화의) 예술작품들은 스스로 존재하는 객체로 머물며, 우리는 그것들을 관조하는 상태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러나 음악에서는 이러한 구분이 없어진다. 음악의 내용은 즉자적이며 주관적이고 또한 공간 속에서 지속되는 객관성으로 외화되지 않고 부단히 자유로이 진동함으로써 그 자체가 하나의 전달이 된다.... 따라서 음은 외적으로 외화되더라도 바로 그것이 외화되기 때문에 곧 다시 사라진다. 즉, 귀가 음을 포착하자마자 그 음은 다시 침묵하고 만다. 이때 생기는 인상은 곧 내면화된다. 음은 그 이념적인 주관성 속에서 포착되고 움직이는 가장 깊은 영혼 속에서만 여운을 남긴다.(p349) <헤겔미학 3> 中
다른 예술 표현과 구분되는 음악(音樂)의 특징은 일회성의 예술 또는 순간 예술이라 하겠다. 물론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음악을 저장할 수 있게된 지금은 또 달라졌지만, 헤겔이나 프루스트가 살던 시기의 음악은 연주되는 순간 휘발(揮發)성이 강한 예술이었다. 헤겔의 설명에 따르면 청자(聽者)에게 들리는 그 음은 바로 내면화되며, 이로서 음악은 청중의 감정에 보다 잘 접근하는 수단이 된다.
처음에 그는 악기에서 흘러 나오는 음의 물질적인 질감밖에 음미하지 못했다. 그러다 가느다랗고 끈질기고 조밀하며 곡을 끌어가는 바이올린의 가냘픈 선율 아래서, 갑자기 피아노의 거대한 물결이 출렁거리며 마치 달빛에 흘려 반음을 내린 연보랏빛 물결처럼, 다양한 형태로 분리되지 않은 채 잔잔하게 부딪치며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을 때 커다란 기쁨을 느꼈다.(p45)... "사물이 밝아지는 것이 더 잘 보이도록 <월광> 소타나는 어둠 속에서 연주해야 합니다. 어떤 불빛도 없어야 합니다."(p171)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中
작품 속에서 스완은 처음에 음악에 쉽게 동화되지 못했으나, 일단 음악이 마음으로 들어오자, 그는 음악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다. 작품 속에서 스완과 오데트의 사랑은 음악을 매개로 표현되는데, 이는 스완의 오데트에 대한 사랑이 순간적이고 감정적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지만, 스완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오데트 자신이 아니었다.
우리가 바라보는 예술픔으로 우리를 향하게 하는 이 막연한 공감은 이제 이드로 딸의 관능적인 원형을 알게 되자 욕망이 되었고, 오데트의 육체가 처음에 불러일으키지 못했던 욕망을 대신했다. 그는 보티첼리의 그림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서 그림보다 더 아름답게 여겨지는 자신의 보티첼리를 생각했고, 또 제포라의 사진을 몸 가까이로 끌어당기며 마치 오데트를 품에 안은 것처럼 생각했다.(p72)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中
그는 이드로 딸의 복제화를 마치 오데트의 사진인 양 자신의 책상 위에 놓아두었다. 그는 커다란 눈이며 불완전한 피부를 짐작케 하는 섬세한 얼굴이며, 피로한 뺨을 따라 흘러내린 머리카락의 그 멋진 웨이브를 찬미했다. 그리고 그는 이제까지 미학적인 방식으로 아름답다고 여겨 오던 것을 한 살아있는 여인에게 적용해 육체적인 장점으로 변형했고, 그리하여 자신이 소유할 수 있는 존재와 결합된 것을 보고는 기뻐했다.(p72)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中
[그림]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출처 : en.wikipedia.org/wiki/The_Birth_of_Venus]
스완이 사랑한 것은 현실의 오데트가 아닌 그가 이상(idea)으로 생각한 보티첼리 그림의 현현(顯現)으로서의 오데트였다. 스완은 오데트 보다 그녀의 복제화를 바라보기를 더 좋아했으며, 이를 소유했다는 사실에서 기쁨을 느꼈다. 이러한 스완의 사랑을 오데트에 대한 사랑이라고 볼 수 있을까.
(스완의 철학은) 그들이 열망하는 대상을 객관화하는 대신, 흘러가 버린 세월로부터 어떤 습관이나 정열의 굳어 버린 잔재를 추출하여, 그 습관이나 정열을 그들 불변의 성격으로 간주하고는, 그들이 택하는 생활 방식에서 만족할 수 있도록 다른 무엇보다도 주의하는 철학이었다.(p165)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中
이제까지 '내가 행복했던 시절' '내가 사랑받던 시절'이라는 추상적인 표현을 쓰면서도 별로 괴로워하지 않았던 것은 그의 지성이, 소위 과거의 본질이라고 부르면서도 실은 과거 그 어떤 것도 보존하지 않고 단지 요약된 부분만을 가두어 놓았기 때문이었는데, 그는 이 잃어버린 행복의 특별하고도 증발하기 쉬운 본질을 영원히 고정해 놓은 것들을 모두 되찾을 수 있었다.(p270)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中
스완의 사랑은 오데트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바라는 상(像)에 대한 사랑이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깎여나가지 않는 것을 불변의 요소(elements)로 생각하고 이를 열망하는 스완의 모습에서 <헤겔미학> 속의 '회화(繪畵)'의 특성을 유추할 수 있다.
우선적으로 고려할 점은 회화는 삼차원의 공간적 총체성을 축소시킨다는 점이다. 이 축소가 완전히 이루어질 때 서로 곁에 서 있는 것 같은 불안(Unruhe-in-sich)이 일 수도 있다. 이처럼 시종일관 부정(否定)되어 가면서 생기는 것이 바로 음악이다. 그에 반해서 회화는 공간적인 것은 아직 존재하게 놓아두고 단지 삼차원 가운데 한 차원만을 제거하여 평면으로 축소하여 이를 표현요소로 삼는다. 이처럼 삼차원이 평면으로 축소되는 것은 내면화 원리(Prinzip des Innerlich-werdens) 안에 이미 들어 있다. 이는 공간 속에서 외면성을 외적인 총체성으로 존속하지 못하게 하고 이를 제약함으로써만 표현해낼 수 있다.(p249) <헤겔미학 3> 中
3차원의 공간을 2차원의 평면으로 차원 축소를 한 예술이 회화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시간의 차원에서 물질의 특성을 깎아내고, 현실에서 이상의 요소를 끌어내려한 스완의 사랑을 연결짓는 것이 그리 무리한 작업만은 아니라 여겨진다.
그의 사랑은 육체적인 욕망의 영역 너머까지 확산되어 갔다. 그곳에서는 오데트라는 인간마저도 큰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p209)... 그녀는 그녀라는 이삼인칭 대명사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사랑이나 죽음과도 흡사하지만 막연한 닮음이라기보다는, 그 실재가 우리로부터 빠져나갈까 두려워 여러 번 되풀이해서 말하는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더 깊이 질문하게 하는 인격의 신비로움과도 같은 것이었다.(p210)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中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2부 스완의 사랑에서는 스완의 사랑과 함께 스완의 철학적 물음도 접하게 된다.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 ~ 1650)의 방법론적 회의 전통을 따라 전기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1889 ~ 1951)의 <논리-철학 논고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와 동일한 결론 -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 에 이른듯한 스완의 이야기 안에서 우리는 철학적 고민도 나눌 수 있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우리 앞에 존재하는 어떤 실제적인 물건에 대해 우리가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없듯, 예컨대 램프에 불이 켜져 방 안 물건이 완전히 변모하여 어둠의 기억마저 방에서 빠져나간다해도 우리가 그 불빛의 존재를 의심할 수 없듯이, 그 개념들을 알지 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p278)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中
난 내가 이미 아는 것밖에는 말하지 않소. 하지만 내가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안다오.(p298)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中
언표될 수 없는 대답에 대해서는 물음도 언표될 수 없다. 수수께끼는 존재하지 않는다.(6.5)... 의심이란 오직 물음이 존립하는 곳에서만 존립할 수 있고, 물음이란 대답이 존립할 수 있는 곳에서만 존립할 수 있으며, 또 이 대답이란 어떤 것이 말해질 수 있는 곳에서만 존립할 수 잇기 때문이다.(6.51)... 삶의 문제의 해결은 이 문제의 소멸에서 발견된다.(6.521)... 실로 언표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이것은 드러난다, 그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6.522)...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7) (p117) <논리-철학 논고> 中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2> 3부는 고장의 이름 - 이름이다. 사실, 이 부분은 아직 정리가 미처 되지 않아 올리기 주저했으나 몇 가지 고민을 일단 던져보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으려 한다. 3분에서는 '말-사물'의 관계와 '생명력'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이와 관련하여 먼저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 ~ 1984)의 <말과 사물 Les Mots et les Choses>를 먼저 살펴보자.
사물 자체가 언어처럼 수수께끼를 감추고 드러내기 때문에, 언어는 세계 속에 자리하고 세계의 일부분을 이룬다. 자연을 인식하기 위해 펼치고 한 자씩 더듬거리며 읽는 책이라는 주요한 은유는 언어를 세계 곁에, 가령 나무, 풀, 돌, 동물 사이에 존재하도록 속박하는 훨씬 더 심층적인 또 다른 전이(轉移 transfert)의 가시적 이면일 뿐이다.(p70) <말과 사물> 中
그 장소들은 그들만을 위해 존재하는 이름, 인명과도 같은 이름으로 지칭됨으로써 얼마나 많은 개별성을 획득했던가! 말은 사물에 대해 분명하고도 친숙한 이미지를 제시한다.(p341)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中
<말과 사물>에서 말은 사물을 명확하게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는 푸코의 주장을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2>에서도 확인하게 된다. 다만, 아직까지 이름과 관련한 내용을 이후 쉽게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다음 편으로 일단 넘긴다.
나무들은 계속해서 그 자체의 생명력만으로 살고 있어, 잎들이 이미 떨어지고 없어도 그 생명력은 나무줄기를 감싼 초록색 벨벳 나무껍질 위나, 포플러 나무 꼭대기 여기저기에 뿌려진 겨우살이의 구체(球體) -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 그려진 태양과 달처럼 동그란 -를 감싼 하얀 투명체 안에서 더욱 밝게 반짝였기 때문이다.(p401)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中
3분에서는 사물(또는 자연)의 생명력에 대한 이야기도 언급된다. 이에 대해서 베르그손(Henri-Louis Bergson, 1859 ~ 1941)의 엘란 비탈(Elan Vital))이 연상되지만. 명확하게 내용상으로 연결짓기에는 무리가 있어 본문에서 인용하지는 않는다. 다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에서의 '나무'의 이미지가 <말과 사물>의 '지식의 체계화'와 '생명력' 이라는 중의적 의미를 포함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표시하고 일단 넘어가도록 하자.
16세기 말엽이나 그다음 세기의 초반 몇 년 사이에 출현하는 백과사전의 기획은 이로부터 유래하는데, 이는 알고 있는 것을 언어는 중립적 요소에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질서 자체를 말의 연쇄와 그 공간적 배치로 재구성하려는 기획에 해당한다... 다수로 분기된 나무의 형태에 따라 지식을 공간화하기에 이르는 크리스토프 드 사비니에게서도 이러한 기획이 엿보이며...(p74) <말과 사물> 中
나는 주변 사물들의 무감각과 고독, 그리고 폐허 한가운데에서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우리 우정의 생명력과 미래에 좀 더 많은 믿음을 품게 되었다.(p359)... 나는 이 새로운 기쁨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할 줄 몰랐다. 그 기쁨은 내가 사랑하는 소녀로부터 그 소녀에 지나지 않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진정한 질베르트에 대한 추억도 확고한 마음도 가지지 못한 '또 다른 나'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p367)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中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를 통해서 스완의 사랑은 음악을 통해 감각적으로 진행되었지만, 그가 진정으로 사랑한 것은 오데트가 아닌 자신의 이상형이었으며, 그런 스완의 사랑은 회화적인 면이 있음을 발견한다. 또한, '말-사물' 속에서 언어와 언어가 지칭하는 대상 사이의 관계, 그리고 자연의 생명력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다음 권으로 넘어가본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매력에 점차 빠져들게 된다...
PS.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 ~ 1827)의 <월광(月光, Moonlight) 소나타>가 울리는 가운데, 진행된 스완의 사랑이지만 그의 사랑은 <月亮代表我的心> 같은 감미로움은 없는 듯하다.
?問我愛?有多深,我愛?有幾分。
당신은 나에게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물었습니다.
我的情也?,我的愛也?, 月亮代表我的心。
나의 마음도 진짜입니다. 나의 사랑도 진짜입니다.달빛이 내 마음을 대신합니다.
?問我愛?有多深,我愛?有幾分。
당신이 나에게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얼마나 사랑하는지 물었습니다.
我的情不移,我的愛不變,月亮代表我的心。
나의 마음은 떠나지 않습니다. 나의 사랑은 떠나지 않습니다. 달빛이 내 마음을 대신합니다.
輕輕的一個吻,已經打動我的心。
부드러운 입맞춤으로 이미 내 마음은 열렸습니다.
深深的一段情,叫我思念到如今。
깊고 깊은 마음에, 날 지금까지 그리워하게 만들었습니다.
?問我愛?有多深,我愛?有幾分。
당신은 나에게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물었습니다.
?去想一想,?去看一看,月亮代表我的心。
저 달빛을 보며 한 번 생각해보세요. 달이 내 마음을 보여줍니다.
輕輕的一個吻,已經打動我的心。
부드러운 입맞춤으로 이미 내 마음은 열렸습니다.
深深的一段情,叫我思念到如今。
깊고 깊은 마음에, 날 지금까지 그리워하게 만들었습니다.
?問我愛?有多深,我愛?有幾分。
당신은 나에게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물었습니다.
?去想一想,?去看一看,月亮代表我的心。
저 달빛을 보며 한 번 생각해보세요. 달이 내 마음을 보여줍니다.
?去想一想,?去看一看,月亮代表我的心。
저 달빛을 보며 한 번 생각해보세요. 달이 내 마음을 보여줍니다. [가사출처 :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