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의 자유라는 맥락에서 투명성은 강력하게 요구되고 있다. 오늘날 부정성의 사회는 소멸하고 그 자리를 대신하는 새로운 사회는 긍정성을 위해 부정성을 해체해가는 중이다. 그리하여 투명사회의 일차적 모습은 긍정사회 Positivgesellschaft로 나타난다.(p13) <투명사회>中
한병철(Han Byung-Chul)은 <투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규정되는 현대 사회를 투명사회, 긍정사회로 규정한다. 저자에 따르면 정보화를 통해 모든 것이 시각화되면서 우리 삶의 공간은 개인적 공간이 아닌 공공 영역으로 탈바꿈하게 되고, 우리의 모든 것은 개인 정보가 아닌 공공 정보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정보의 자유는 개인의 자유가 아닌 개인의 속박, 억압과 감시로 이어지게 된다.
투명성은 2차 계몽주의의 구호다. 데이터는 투명한 매체다. 2차 계몽주의의 명령은 다음과 같다. 모든 것이 데이터와 정보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데이터 전체주의, 데이터 물신주의가 2차 계몽주의의 영혼을 이룬다.(p81) <심리정치> 中
완전 조명 Ausleuchtung은 곧 착취 Ausbeutung다. 한 개인에 대한 과다 조명은 경제적 효율성을 극대화한다. 투명한 고객은 오늘날의 새로운 수감자, 디지털 파놉티콘의 호모 사케르 Homo Sacer이다.(p100) <투명사회>中
자유는 결국 에피소드로 끝날 것이다. 자유의 감정은 일정한 삶의 형태에서 다른 삶의 형태로 넘어가는 이행기에 나타나 이 새로운 삶의 형태 자체가 강제의 형식임이 밝혀지기 전까지만 지속될 뿐이다. 그리하여 해방 뒤에 새로운 예속이 온다. 그것이 주체의 운명이다. 주체, 서브젝트 subjerkt는 문자 그대로 예속되어 있는 자인 것이다.(p9) <심리정치> 中
그렇다면, 정보화 시대의 자유는 누구의 자유가 될 것인가? 저자는 정보의 자유는 결국 '자본의 자유'로 귀결된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이를 가능하게 하는 구체적 수단이 신자유주의임을 <심리정치>를 통해 보여준다.
개인의 자유를 통해 실현되는 것은 자본의 자유다. 그리하여 자유로운 개인은 자본의 성기로 전락한다. 개인의 자유는 자본에 "자동적인" 주체성을 부여하며 이로써 자본의 능동적 번식을 추동한다.(p13) <심리정치> 中
자본주의의 변이체인 신자유주의는 노동자를 경영자로 만든다. 오늘날은 모두가 자기 자신의 기업에 고용되어 스스로를 착취하는 노동자다. 모두가 주인인 동시에 노예다. 계급투쟁 역시 자기 자신과의 내적 투쟁으로 탈바꿈한다.(p15)... 신자유주의는 시민을 소비자로 만든다. 시민의 자유는 소비자의 수동성으로 대체된다.(p22) <심리정치> 中
모티베이션, 프로젝트, 경쟁, 최적화, 자발성은 모두 신자유주의 체제의 심리정치적 통치술에 속한다. 뱀은 무엇보다도 죄, 즉 신자유주의 체제가 지배 수단으로 사용하는 채무를 상징한다.(p34) <심리정치> 中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노동자, 경영자, 소비자라는 삼위일체(三位一體)의 모습을 통해 체제를 뒷받침한다. 노동자로서 개인은 저임금으로 착취당하고, 소비자로서 개인은 마케팅에 의해 끊임없이 신상품을 소비하게 되며, 경영자로서 개인은 계속적인 개선과 높은 목표 달성을 강요받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착취가 이루어지는 공간이 바로 디지털 정보화 사회다. 저자에 따르면 디지털 정보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실상(實像)과 결별하고 허상(虛像)을 받아들이는 일종의 매트릭스(Matrix)안에서의 삶을 강요받게 된다.
오늘의 세계는 행위와 감정이 재현되고 읽히는 극장이 아니라 내밀함이 전시되고 판매되고 소비되는 시장이다. 극장이 재현의 장소라면, 시장은 전시의 장소다. 그리하여 오늘날 연극적 재현은 포르노적 전시에 밀려난다.(p73) <투명사회>中
이미지와 정보의 빠른 교체는 눈 감기를, 사색적 결론을 불가능하게 한다. 모든 이성적인 것이 결론이라면, 빅데이터의 시대는 이성이 없는 시대인 셈이다.(p101) <심리정치> 中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의 효율성과 편리함 때문에 우리는 점차 진짜 인간과의 직접적인 접촉, 실재와의 접촉 자체를 피하게 된다. 디지털 매체로 인해 진짜 상대방을 마주하는 일은 점점 더 드물어진다. 디지털 매체는 실재를 저항으로 받아들인다... 디지털은 실재계를 해체하고 모든 것을 상상계로 만든다.(p146) <무리속에서> 中
그렇다면, 이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일까? 저자는 정량(定量), 빅데이터(Big Data)로 정의되는 현대 정보화 사회가 데이터 분석을 통해 추세(trend)와 상관관계(Corelation)를 유추할 수 있어도 이것이 미래를 결정짓는 변수가 될 수는 없음을 지적한다. 높은 확률은 결코 미래를 결정지을 수 없다. 대신,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철학(哲學, phlilosophy)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철학이 바보 노릇을 하기 때문이다.
데이터 마이닝이 드러내는 상관관계는 통계적 개연성의 표현이다. 그것은 통계적 평균치를 계산해낸다. 따라서 빅데이터는 유일무이한 것에 접근하지 못한다. 빅데이터는 사건을 보지 못한다. 역사를, 인류의 미래를 규정하는 것은 통계적 개연성이 아니라 개연적이지 않은 것, 유일한 것, 사건이다. 따라서 빅데이터는 미래도 보지 못한다.(p107) <심리정치> 中
철학의 기능은 바보 노릇하기에 달려있다. 새로운 표현 방식, 새로운 언어, 새로운 사유를 창조하는 모든 철학자는 본래 바보였음에 틀림없다. 오직 바보만이 완전히 다른 것에 접근할 수 있다. 백치 상태 속에서 사유는 모든 예속화와 심리화에서 이탈하는 사건과 유일무이한 것으로 이루어진 내재성의 장으로 들어갈 수 있다.(p111) <심리정치> 中
5G, AI(인공지능), 사물인터넷, 자율주행자동차 등 IT기술의 발전에 따라 <투명사회>와 <피로사회>에서 저자가 지적하는 문제는 심각성을 더해가고 있는 요즘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의 말처럼 '바보 노릇'이 우리 삶의 구원자(Messiah)가 될 수 있다는 말에 한층 공감하게 된다. 거창한 철학이 아니어도, 바보처럼 가던 길을 가는 우직함, 항상 웃을 수 있는 천진함이 다른 어떤 덕목보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며,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