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퀴티데스(Thoukydides, BC 460 ? ~ BC 400 ?)는 그의 저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Ho Polemos ton Peloponnesion Kai Athenaion>를 통해 BC431 ~ BC404 사이에 발생한 펠로폰네소스(스파르테)인과 아테나이인들 사이의 전쟁을 서술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이 전쟁은 '헬라스(그리스)인들뿐아니라 일부 비(非)헬라스인들에게도, 아니 전 인류에게 일대 사변'(제1권 1.2)이었다. 이후 아테나이에서는 페리클레스(Pericles, BC 495 ~ BC 429)로 대표되는 50년간의 황금기가 막내리게 되었고, 스파르테는 페르시아에 의존한 패권(覇權)을 잠시 누리다가 이후 테바이에게 헬라스의 패권을 넘기는 등 두 강대국 모두 몰락의 길을 걷게 었다. 헬라스 전체로도 이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Alexander III of Macedon, BC 356 ~ BC 323)와 로마 제국의 지배 하에 들어가기에 이 전쟁은 헬라스인들에게는 진정으로 파멸적인 전쟁이었다. 


 이번 페이퍼에서는 30여년에 걸친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면서 '투퀴티데스(투키디데스) 함정'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투퀴티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주지만, 모든 것을 알려주지는 않기에 도널드 케이건(Donald Kagan) 예일대 교수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The Peloponnesian War>와 크세노폰(Xenophon, BC 430 ~ 354)의 <그리스 역사 Hellenica>를 통해 전쟁 전체를 조망해 보자.



[지도] 펠로폰네소스 전쟁( 출처 : http://m.blog.daum.net/picodrim/9873968)


 1. 펠로폰네소스 전쟁


 가. 전쟁의 배경 


 투퀴티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원인이 페르시아 전쟁(BC 499 ~ BC 450) 이후 해군력을 바탕으로 크게 성장한 아테나이 제국(델로스 동맹)에 대한 스파르테의 견제로 인해 발생했다고 기술한다. 그리고, 케이건 교수는 이와 관련한 공포, 명예, 이익이 현대 국제관계를 설명하는 기본동기라는 점에서 이 전쟁이 현대에도 의미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두 도시 사이의 대립은 페르시아 전쟁이 끝난 후 델로스 동맹이 성장하여 아테네가 성공적으로 부와 권력을 차지하고, 점차 제국적인 야심을 드러내면서 시작되었다.(p34)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도널드 케이건 中


 그러나 진정한 원인은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말하자면 아테나이의 세력 신장이 라케다이몬(스파르타)인들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켜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든 것이다. (1권 23, 6)<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투퀴티데스 中


아테나이의 국력이 누가 보아도 절정에 이르고 아테나이인들이 자신들의 동맹국들 권리를 침해하기 시작하자, 라케다이몬인들은 마침내 더는 참을 수가 없어 이번에는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있는 힘을 다해 공격하되 가능하면 아테나이의 세력을 말살하기로 작정했다. (1권 118, 6)<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투퀴티데스 中


투키티데스의 이 세 가지 설명 방식은 모두 국제관계를 지배하는 근본적인 동기에 대한 자신의 분석을 정당화한다. 공포, 명예, 이익이 바로 그것이다.(p71)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도널드 케이건 中


 이러한 배경하에서 일어난 전쟁에 임하는 두 나라가 해군(海軍) 중심의 아테나이와 육군(陸軍) 중심의 스파르테였기에 이들은 서로 다른 전략으로 전쟁에 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서로 결정적인 타격을 안겨줄 수 없었기에 이 전쟁은 장기전(長期戰)으로 돌입할 수 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전쟁 양상은 로마와 카르타고 간 발생한 포에니 전쟁(Bella Punica)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부분은 나중에 <몸젠의 로마사>에서 다루도록 하자.)


나.  아테나이의 전략 : 페리클레스 전략


 아테나이의 장점은 해군력과 스파르테를 압도하는 경제력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최대한 스파르테에 압박을 가한다면, 아테나이가 승리할 수 있다고 페리클레스는 판단했다. 페리클레스의 전략에 따라 전쟁을 수행했을 때 상황은 아테나이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지만, 여기에서 벗어났을 때 아테나이는 패배에 몰리게 되었다.


아테네의 핵심자원은 도시를 지키는 성벽, 바다를 장악한 함대, 해군을 부양할 돈을 공급하는 제국이었다. 이들 중 어느 하나라도 남겨둔 채로 거둔 승리의 가치는 제한적이었으므로 스파르타는 공격에 나서야 했다. (p83)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도널드 케이건 中


페리클레스는 전쟁이 터지고 2년 6개월을 더 살았고, 전쟁에 관한 그의 선견지명은 그가 죽은 뒤 더욱 널리 인정받았다. 왜냐하면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인들이 은인자중하며 함대를 증강하고, 전쟁동안에는 제국을 확장하려 하지 않고, 도시를 위험에 빠뜨릴 모험을 하지 않는다면 승리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테나이인들은 모든 점에서 정반대로 했으며, 분명 전쟁과 무관한 다른 업무에서도 개인적인 이익이나 야망에 이끌린 나머지 아테나이에게도 그 동맹국들에도 해로운 정책을 추구했다. (2권 65, 6)<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투퀴티데스 中


페리클레스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테네에서 계속 유지되었던 그 전략은 비록 어느 정도의 제한된 공격적 요소가 있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방어적이었다. (p77)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도널드 케이건 中


다. 스파르테 전략 


 반면, 헬라스 최고의 육군을 보유했던 스파르테는 이를 적극 활용하는 방향으로 전쟁을 전개하고자 했다. 그 결과 제1차 펠리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테의 군대는 조기에 아테나이를 포위하였으나, 아테나이인들은 도시를 둘러싼 성벽 뒤에 숨으면서 장기화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핵심은 펠로폰네소스인과 보이오티아인으로 구성된 그 찬란한 중무장 보병이었다. 이것은 아테네의 중무장 보병 팔랑크스보다 두세 배 더 컸고, 세계 최고의 군대라고 널리 인정되었다.(p85)... 플루타르코스는 기원전 431년에 아티카를 침공한 스파르타 군대가 6만 명이었다고 한다.(<페리클레스>33,4) 그 숫자는 너무 크지만, 분명히 스파르타의 군대는 아테네의 전투 중장 보병보다 2:1 또는 3:1 정도로 많았을 것이다. (p87)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도널드 케이건 中 


라. 시칠리아 원정 : 아테나이 파멸의 시작


 전쟁이 계속되면서 스파르테 군대에 의해 포위된 아테나이는 좁은 지역에 밀집하면서 발생한 흑사병(黑死病, Black Death)에 의해 인구가 격감하게 되고, 도시 밖 경제활동이 제약됨에 따라 주변 제국에 대한 세금을 올릴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포위의 결과 발생한 아테나이 내/외부의 불만이 고조됨에 따라 아테나이는 전황(戰況)을 변화시킬 필요가 생겼으며, 이 결과 시켈리아(시칠리아) 원정을 감행했다. 참담한 실패로 끝난 원정의 결과 아테나이는 파멸에 이를 정도의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시칠리아의 곡물이 펠로폰네소스에 도달하지 못하게 막겠다는 욕망은 상황의 변화를 반영하는 새로운 사태였다. 스파르타인의 아티카 유린의 기간과 강도는 어느 정도 침공군의 식량 공급에 달려 있었다. 시칠리아의 수확물을 상실하면 미래의 침공은 단축될 것이다... 그러나 시칠리아를 복속시키려는 시도는 전시에 제국을 확장하지 말라는 페리클레스의 충고를 명백하게 어기는 것이었다.(p154)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도널드 케이건 中


이 사건(시켈리아 원정)은 이번 전쟁 전체를 통틀어, 아니 내가 보기에는 기록에 남은 헬라스 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대한 사건으로, 이긴 자들에게는 가장 빛나는 승리였지만 패한 자들에게는 비할 데 없는 재앙이었다. 아테나이인들은 모든 전선에서 완패했고, 그들의 고통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들은 보병이며 함대며 모든 것을 다 잃었다. 그 많던 자들 가운데 고향으로 돌아온 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이상이 시켈리아에서 일어난 사건들이다. (7권 87, 5 ~ 6)<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투퀴티데스 中


마. 페르시아의 등장


 시켈리아 원정의 파멸적인 결과에도 불구하고, 아테나이는 서서히 힘을 다시 키워가면서 스파르테는 전쟁의 승리를 자신할 수 없게 되었다. 아테나이 해군의 힘을 꺾기 위해 스파르테는 지날날 살라미스 해전(Salamis batle, BC 480)에서 자신들을 적대했던 페르시아의 힘을 끌어들이게 되었다. 이로 인해 스파르테는 아테나이의 해군을 봉쇄할 힘을 얻게 되었지만, 아직은 부족했다. 아테나이의 붕괴를 위해서는 내부로부터의 붕괴가 필요했다.


밀레토스를 차지했다는 소식에 티사페르네스는 급히 그곳으로 가서 스파르타인과 대왕의 동맹을 맺었다. 이 일방적인 문서는 다리우스에게 그나 그의 조상들이 보유했던 모든 영토와 도시들을 반환했고, 페르시아인과 스파르타인은 이 지역들에서 아테네에 대한 세금 지급을 중지시키기 위해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이 협정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페르시아인에게 살라미스 이전에 그들이 소유했던 모든 그리스 영토를 되돌려 주는 것이었다. 반대로 페르시아인이 스파르타인에게 제공할 지원에 대해서는 재정적이건 그 어떤 것이건 명문화된 것이 없었다. (p399)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도널드 케이건 中


특히 현재 상황에 비판적인 리카스는 칼키데우스가 맺은 협정도, 테리메네스가 맺은 협정도 잘못되었다면서, 대왕이 자신과 자신의 선조가 전에 지배한 모든 영토의 영유권을 주장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모든 섬들과 텟살리아 지방과 로크리스 지방은 물론이고 보이오티아 지방에 이르는 모든 헬라스 땅이 다시 노예가 되고, 라케다이몬인들은 헬라스인들에게 자유 대신 페르시아의 지배를 안겨주었음을 의미하게 되리라고 했다. (8권 43, 3)<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투퀴티데스 中


왜 스파르타의 지도자들은 또 하나의 불리한 조약을 체결했던 것일까? 그것은 스파르타의 협상 위치가 너무나 불리했기 때문이다. 부활하는 아테네인 앞에서 페르시아의 돈과 지원을 그 어느 때보다 간절히 원했던 것은 바로 스파르타인이었기 때문이다.(p412)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도널드 케이건 中


 바. 아테나이의 몰락


 아테나이의 몰락은 내부에서 비롯되었다. 민주정에서 체제의 수호를 원한 자들과 과두정을 원한 이들의 대립은 아테나이의 힘을 결정적으로 약화시켰으며, 이로 인해 아테나이는 스파르테와 굴욕적인 조건으로 강화를 맺으며 전쟁을 마무리하게 된다. 투퀴티데스의 저서에는 전쟁의 후반부를 다루지 않았기에, 이 부분은 크세노폰(Xenophon, BC 430 ~ 354)의 <그리스 역사 Hellenica>를 참고해본다.


아테네가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함대의 힘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하층 계급들과 그들의 민주파 지도자들과의 협력에 의지해야 가능했다.(p448)... 극단주의자들은 민주정의 복원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차라리 "적군을 끌어들이고, 배들과 성벽을 포기하고, 오직 자신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아테네에 관련된 모든 조건들을 받아들일 것이다."(8,91.3)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도널드 케이건 中


라케다이몬인은 헬라스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공헌한 헬레네스의 도시를 파괴하는 데 찬성하지 않고, 대신 장벽을 허물고, 페이라이에우스에는 12척을 제외한 모든 배를 포기하고, 추방된 사람들을 받아들이며, 라케다이몬과 같은 친구와 적을 가지며, 뭍이거나 바다거나 어디든지 라케다이몬인들과 동행하는 조건으로 강화했다... 이미 굶주림에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중이라 다수가 요구 조건을 받아들이고 강화하기로 했다. <그리스 역사 2권(p51)


 이와 같은 양상으로 전개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승리자는 누구였을까. 헬라스 세계의 패권을 장악한 스파르테, 그 뒤를 이었던 테바이 모두 두 번 다시 페리클레스 시대 만큼 헬라스를 번영하게 만드는데 실패했다. 그런 면에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전쟁 당사자 모두를 파멸로 이끈 전쟁이라 할 것이다.  이제, 투퀴티데스 함정에 대해 이야기 할 차례다.


기사출처 : http://www.hankookilbo.com/v/2538a200b1e94befaa0d19e9bccec112/


 아테나이의 번영에 대한 스파르테에 대한 시기, 질시로 일어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두 강대국 모두에게 독(毒)이 되어 모두를 쓰러뜨렸다.  최근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에 대한 미국의 질투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충돌이 세계 석학들이 지적하고 있는 '투퀴티데스 함정'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이상의 투퀴티데스 함정과 킨들버거 함정을 종합해 보면, 다음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최근 미국이 경제적 선두의 위치에서 내려와 스스로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 그 결과 세계 경제는 경제적 선두를 필요하지만, 중국은 아직 경제적 선두를 받을만한 역량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킨들버거 함정) 세계 경제 공공재로서의 경제적 선두가 없다는 현실 자체도 위협적이지만, 만약 미국이 최근의 중국의 눈부신 성장에 시기와 질투를 느껴 이를 견제하려 한다면 파멸적인 결과에 이를 수도 있다. (투퀴디데스 함정)


 세계 석학들은 미국의 고립주의와 중국의 부상(浮上)에 대해 '킨들버거 함정'과 '투키디데스 함정'이라는 말을 통해 경고하고 있다. 최근 중국과 미국의 움직임을 보면 군사적 충돌보다는 관세 전쟁을 통한 경제면에서의 충돌이 더 우려되기도 하지만,  어느 면에서의 충돌이든 세계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하다. 이 때문에 미국의 보다 현명한 선택과 대응이 요구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이번 페이퍼의 주제와 관련하여 맹자(孟子, BC372 ~ BC289)의 한구절이 떠르게 되는데, <맹자>의 해당 구절을 마지막으로 이번 페이퍼를 마친다.


孟子曰 以力假仁者覇  覇必有大國 맹자왈 이력가인자패 패필유대국

以德行仁者王 王不待大 이덕행인자왕 왕불대대

湯以七十理 文王二百里 탕이칠십리 문왕이백리

以力服人者 非心服也 力不贍也 이력복인자 비심복야 역불섬야

以德服人者 中心悅而誠服也 이덕복인자 중심열이성복야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 "실제로 힘에 의지하면서도 겉으로는 인仁의 명분을 빌어 정벌을 일삼는 자는 패자 覇者이다. 패자는 반드시 강대한 국가를 소유해야한다. 자기 내면의 덕에 의지하면서 인정 仁政을 행하는 자는 왕자 王者이다. 왕자는 반드시 대국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탕임금은 사방 70리의 나라를 기초로 하여 혁명을 성공시켰고, 문왕은 사방 100리의 나라를 기초로 하여 혁명을 성공시켰다. 힘으로써 사람을 굴복시키는 것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복종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대항할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복종하는 것이다. 내면적 도덕의 힘으로써 사람을 복종케 하는 것은 마음속 한가운데 깊은 곳으로부터 기쁨이 우러나와 진정으로 복종하는 것이다.(p246) <孟子 맹자 公孫丑 공손추  上 상 2a-3> <맹자 사람의 길 上>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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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1 12: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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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1 13: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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