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인 것의 귀환
샹탈 무페 지음, 이보경 옮김 / 후마니타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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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즈와 드워킨과 같은 의무론적 자유주의자들은 정치에 도덕성을 주입하고자 한다. 그들은 칸트가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 On Perprtual Peace에서 설정한 모델에 따라, 규범에 묶여 있고 도덕적으로 정의된 목표가 안내하는 정치학의 견해를 옹호한다. 반면에 공동체주의자들은 자유주의를 그 개인주의 때문에 공격한다. 공동체주의자들은 사회에 선행하여 존재하는 자연권을 타고났다는 개인관에 함축된 무역사적이고 무사회적이고 실체 없는 주체관을 비난하며, 롤즈가 설정한 새로운 자유주의 패러다임의 핵심인 좋음에 대한 옳음의 우선적 테제를 거부한다. 공동체주의자들이 되살리려는 정치관은, 우리 자신을 한 공동체의 참여자로 인정하는 분야가 바로 정리라는 관점이다. '권리에 기반을 둔' 자유주의자들의 칸트적 영감에 반대하여, 공동체주의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헤겔을 불러낸다. 공동체주의자들은 자유주의에 맞서 시민 공화주의 전통에 호소하는 것이다. _ 샹탈 무페, <정치적인 귀환> , p179

샹탈 무페 (Chantal Mouffe, 1943 ~ )는 <정치적인 것의 귀환 The Return of the Political>에서 롤즈(John Rawls, 1921~2002)와 드워킨(Ronald Myles Dworkin, 1931~2013), 노직(Robert Nozick, 1938~2002)의 자유주의 정치철학과 매킨타이어(Alasdair Chalmers MacIntyre, 1929~ )과 샌델(Michael J. Sandel, 1953 ~ )의 공동체주의 정치철학을 모두 비판하는 이른바 '모두까기'를 시현한다. 그가 자유주의 철학과 공동체주의 정치철학을 비판하면서 도출하고자 한 결론은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라는 지향점이다.

급진적이고 다원주의적인 민주주의에서, 갈등의 최종 해결이 궁극적으로 가능하리라는 확신은 민주주의의 기획에 필수적인 지평을 제공하기는커녕 그것을 위태롭게 하는 그 무엇이다... 이 접근의 핵심은 다원주의적 민주주의가 하나의 역설을 포함하고 있다는 자각이다.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그 순간 그 분해를 목격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도달될 수 없는 한에서만 좋은 것으로 존재하는 어떤 좋음 a good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갈등과 적대는 그 완전한 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인 동시에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므로, 이런 식이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는 항상 '도래해야 할' 하나의 민주주의일 것이다. _ 샹탈 무페, <정치적인 귀환> , p21

무페는 먼저 롤즈와 드워킨 등의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개인의 도덕성에 기초한 정치철학을 비판한다. 개인의 도덕성에 근거하여 이들의 양보와 협력으로부터 얻어지는 이상적인 유토피아. 이 지점에 대한 공격을 위해 무페는 공동체주의자들의 주장을 인용한다. 개인의 덕성으로부터 합의점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덕이 전제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처럼 자유주의자들의 비판에 샹탈은 공동체주의자들과 견해를 함께 한다. 그렇지만, 곧 무페는 공동체주의자들을 이번에는 자유주의자들의 논리로 비판한다.

롤즈는 보편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이고 자연권적인 유형의 자유주의 담론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인간 실존의 집합적 측면을 구성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으로 말미암아 그 담론을 만족할 만한 대안으로 대치하는 데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 내 추측이다... 결국, 롤즈가 정치철학으로 제시하는 것은 단지 특정 유형의 도덕철학, 즉 사회의 기본 구조를 통제하려는 공적 도덕성이다. _ 샹탈 무페, <정치적인 귀환> , p95

샌들에 따르면 롤즈의 문제틀에서는 이런 '구성적인' 유형의 공동체를 생각할 수 없다. 롤즈의 문제틀에서 공동체는 개인의 이익들이 이미 주어져 있고, 그 이익을 옹호하고 증대시키기 위해 한데 모여 있는 개인들 간의 단순한 협동으로 생각될 수 있을 뿐이다. 샌들의 중심 테제는 옳음이 좋음보다 우선성을 지닐 수 있으려면 구성적 약속을 할 수 없는 이 무연고적 주체관이 필연적인데, 이는 롤즈가 정당화하려는 정의 원칙들과 모순된다는 것이다. _ 샹탈 무페, <정치적인 귀환> , p54

롤즈의 큰 장점은 단일한 실체적 공동선이 더는 존재하지 않으며 다원주의가 중심이 되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적 정의관을 하나의 특수한 종교적이거나 도덕적이거나 철학적인 좋은 삶의 관점에서 끌어낼 수는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오늘날 샌들과 같은 몇몇 공동체주의자들이 열망하는 하나의 객관적인 도덕적 질서로 통일된 정치 공동체의 관념을 우리는 거부해야 한다. _ 샹탈 무페, <정치적인 귀환> , p94

보편적인 덕을 공동체의 덕으로 전제하는 공동체주의자들의 논리에 대해 무페는 이러한 '공동선'의 관념은 과거퇴행적이라고 비판한다. 무페가 보기에 공동체주의의 논리는 '유일자', '유일선'을 강조한 전근대적 관념에 불과하며, 다원성을 인정한 자유주의보다 민주주의적인 요소를 결여한 주장에 다름아니다.

자유주의적 시민관에는 분명히 심각한 문제들이 많이 있지만, 우리는 시민 공화주의 해법의 단점도 깨달아야 한다... 전근대적 정치관은 현대 민주주의의 혁신적인 면모와 자유주의의 결정적인 공헌을 인정하지 않는다. 다원주의의 옹호, 개인적 자유의 관념, 교회 church와 국가 state의 분리, 시민사회의 발전, 이 모든 것이 현대 민주주의 정치의 구성요소이다. 이것들은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 도덕성의 분야와 정치의 분야 사이의 구별을 요구한다. 여러 공동체주의자의 제안과는 반대로, 현대 민주주의의 정치 공동체는 단일하고 실체적인 공동선의 관념을 중심으로 조직될 수 없다. _ 샹탈 무페, <정치적인 귀환> , p102

그들(공동체주의자들)의 입장은 공유된 도덕적 가치에 근거한 공동선의 정치학으로 복귀하자는 제안으로 귀결된다. 이 입장은 정치 공동체를 실체적 공동선의 관념을 중심으로 조직된 것으로 바라보는 전근대적인 견해에 이르게 된다는 점에서, 현대 민주주의와는 분명히 양립할 수 없다. _ 샹탈 무페, <정치적인 귀환> , p179

자유주의가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의 분리를 통해 도덕과 철학을 분리하는 업적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정치학과 윤리학을 분리시키지 못했기에 한계점을 갖는다면, 공동체주의는 이러한 한계점을 지적하면서 아예 과거로의 회귀를 선언한다. 결국 무페가 보기에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모두 민주주의 사회에는 부족한 정치철학으로, 제3의 대안을 칼 슈미트(Carl Schmitt, 1888~1985)로부터 찾는다.

슈미트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났다. 자유주의적 의회제 질서는 종교, 도덕성, 경제와 같은 일련의 중요한 분열적 쟁점들을 사적인 영역으로 제한하는 데 근거해 있었다. 이는 민주주의 작동의 필요조건인 동질성의 창출을 위해 요구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대 대중민주주의 발전 과정에서 '전체 국가' total state가 등장하여, 권리의 확장을 위한 민주주의의 압력들의 결과 [국가가] 사회의 점점 더 넓은 분야들에 개입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이전 국면의 특징인 '탈정치화' 현상은 역전되었고 덩치는 모든 영역에 침입하기 시작했다. 핵심 쟁점들에 관한 많은 결정이 서로 다른 절차들을 통해 이뤄지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회는 그 중요성을 점점 더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적대적 이익들이 서로 대치하는 각축장이 되었다. 슈미트에게 이것은 자유주의 국가와 민주주의 모두의 종말을 표시했다. _ 샹탈 무페, <정치적인 귀환> , p171

그렇지만, 무페는 슈미트 역시 비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한계점을 지적한 슈미트의 이론을 받아들이되, 그가 인정하지 않는 다원주의에 대해서는 혹독하게 비판한다. 다원주의에 대해서 비판적인 면에서는 공동체주의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슈미트는 자유주의의 한계를 보다 실증적으로 보였다는 점에서 이들은 차이가 있다.

나는 정치적인 것과 관련해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의 결함들을 지적한 점에서 슈미트가 옳다고 믿는다. 자유주의가 오늘날 직면하고 있는 많은 문제는 정치가 하나의 도구적 활동으로, 사적인 이익들을 이기적으로 추구하는 것으로 제한되었다는 사실에서 연유한다. 민주주의를 단순히 일련의 중립적 절차들로 제한하는 것, 시민들을 정치적인 소비자들로 변형하는 것, 자유주의가 국가의 '중립성'이라는 전제를 고집하는 것, 이것들은 정치의 모든 실체성을 비워 버린다. 정치는 경제로 환원되었고 모든 윤리적 구성 요소들을 박탈당했다. 도덕이라는 사적 영역과 정치라는 공적 영역의 분리가 자유주의를 위한 하나의 위대한 승리였다면, 그것은 모든 규범적인 측면을 개인적 도덕성의 영역으로 추방하는 결과도 낳았다. _ 샹탈 무페, <정치적인 귀환> , p178

핵심 쟁점은 현대 민주주의 자체의 본성과 관계된다. 슈미트는 신학정치적인 모델이 붕괴하면서 새로운 형식의 사회가 출현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는 실체적 공동선의 실종과 단일한 동질적 집단 의지의 불가능성을 조건으로 하는 근대적 상황에서, 통치자와 피통치자가 동일시되었던 고대의 모델로는 민주주의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p174)...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간의 피할 수 없는 모순이 존재한다는 슈미트의 테제를 우리가 꼭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슈미트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현대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주요 두 원칙 사이에서 현대 민주주의의 특정성을 파악하기에는 무능력했기에 그것을 모순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을 뿐이다. _ 샹탈 무페, <정치적인 귀환> , p175

결국, 무페는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분리로부터 도덕과 정치의 분리를 취하고, 윤리학과 분리된 정치학의 철학의 필요성을 전제한 후에, '자유'와 '평등'의 원칙에 대해 수많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여긴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에는 정답이 있을 수 없기에 정치적 행위가 필요하며, 여기에는 수많은 '배타적인 결'들이 존재할 수 밖에 없음도 논증한다. 정치적 행위가 권력관계를 의미하며, 그것이 '나'와 '타인'의 구분을 차이를 드러내는 행위인만큼 민주주의에서 정치는 결국 수많은 결들에 의한 투쟁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정치적인 것의 귀환>에서 무페가 말하고자 하는 결론이다.

내가 제안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정치적 원칙들을 지지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적 평등에 요구되는 동질성의 토대로 간주되어야한다. 여기서 문제의 원칙은 자유와 평등의 원칙이며 이 원칙은 확실히 다양한 해석들의 근원이며 아무도 정확한 해석을 소유한다고 자임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원칙들을 해석하기 위한 논쟁의 틀 속에서 결정을 내리고 국가 의지를 규정하려면, 일정한 수의 메커니즘과 절차의 확립이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따라서 나는 슈미트와 켈젠 둘 다에 대해 부분적으로만 동의한다. _ 샹탈 무페, <정치적인 귀환> , p206

정치적인 윤리에 대한 이런 반성에는 고전적인 정치철학에서 핵심이었던 통념의 재발견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리스어 폴리테이아의 의미인 '정체'의 통념으로, 모든 형식의 정치적 결사체에는 윤리적 귀결이 있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 정치철학을 정교화하려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특정가치들이나 정당성의 원칙들, 혹은 몽테스키외의 용어를 사용한다면 '정치적 원칙들'을 다루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만인을 위한 평등과 자유의 원칙들이다. _ 샹탈 무페, <정치적인 귀환> , p181

자유주의는 합리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틀 내에서 정식화되는 한, 정치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못 볼 수밖에 없으며, 정치의 본성에 관해 잘못 알게 된다. 자유주의는 정치가 집단적 정체성의 구축에 관계하며, '그들'과 대립적인 '우리'의 창출에 관계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모든 합의는 필연적으로 배제 행위에 근거한 것이며, 전적으로 포괄적인 '합리적' 합의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핵심 지즘은 데리다에거서 차용한 '구성적 외부' 통념이 해명을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데리다의 핵심 관념 가운데 하나는 하나의 정체성의 구성은 언제나 무언가의 배제에 근거하며, 형상/질료, 본질/우연, 흑인/백인, 남자/여자 등등의 결과로서 생겨나는 두 극 사이의 폭력적인 위계의 설립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 자체로 자기 현전적인, 차이로 구성되지 않는 정체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사회적 객관성은 권력 행위를 통해 구성되다는 것을 드러낸다... 결국 모든 사회적 관계들의 체계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권력관계들을 함축한다. 왜냐하면 하나의 사회적 정체성을 구축하는 것은 하나의 권력 행위이기 때문이다. _ 샹탈 무페, <정치적인 귀환> , p224

이처럼 <정치적인 것의 귀환>에서 무페는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그리고 슈미트 이론에서 각 이론의 한계를 다른 이론의 장점으로 공격하면서, 각 이론의 장점으로부터 자신의 다원주의론을 정립한다. 무페가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결코 평화롭지 않다. 체제라는 대전제에 대한 합의 위에 치열한 이해다툼이 일어나는 전장(戰場)이 민주주의라는 점이 다소 극단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모든 것을 포괄하고 긍정한다는 점에서 무페의 민주주의는 포용적이다. 절대적인 가치에 대한 옹호없이 치열한 가치논쟁을 통한 가치 정립. 무페가 말한 '정치적인 것의 귀환'은 '피 흘리지 않는 전쟁'의 귀환이다.

** 이하 내용은 유력 대선 후보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이 있으므로 불편하실 분들은 여기까지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

<정치적인 것의 귀환>은 대선을 한 달 남겨놓은 지금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 토론을 피하며 토론하면 싸움밖에 할 수 없다는 야당 후보의 말은 무페의 표현에 따르면 '반反민주주의'적이다. 토론을 통해 합의점을 찾으며 발전방향을 찾는 대신, 자신의 지지자에게만 통하는 논리를 통해 정권을 쟁취하겠다는 태도는 무페가 지적한 공동체주의의 '공동선' 보다도 퇴보한 논리라 할 것이다. 또한,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에서의 분리를 이루지 않고, 공권력을 사유화한 그의 행적은 도덕적이지도, 정치적이지도 않다는 점에서 진정한 자유주의로도 볼 수 없다. 결국 정치철학이 부재한 상태에서 오로지 안티테제(Antithese)로만 존재하는 후보가 유력한 대선후보라는 현실. 무페의 책은 어두운 우리의 현실에서 어떤 것이 어둠인지를 밝혀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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