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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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제도 왕도 참전하지 않은 제1차 십자군의 주역들은 유럽 각지에 영지를 가진 제후들이었다. 그들은 때때로, 아니 자주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분열을 반복했지만, 최종 목표 앞에서는 언제나 단결했다. 이 점이 이기적이고 분열을 반복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던 이슬람측 영주들과의 차이였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제1차 십자군이 성공한 주된 요인이었다._ 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1>, p345


  <십자군 이야기 1>에는 성도(聖都) 예루살렘을 이슬람으로부터 빼앗아 예루살렘 왕국등을 건설한 제1차 십자군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저자 시오노 나나미 (鹽野七生, 1937 ~ )는 제1차 십자군 전쟁에서 그리스도교측의 승리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단결'을, 반면 이슬람 측이 패배하는 원인을 '분열'에서 찾는다. 이어지는 <십자군 이야기 2>에서는 단결한 이슬람 세력의 반격이 주된 내용이기에, <십자군 이야기>의 부제를 '단결과 분열'로 붙여도 좋을 듯하다. 


 바그다드에 있는 칼리프를 군사적으로 받쳐주고 있던 것이 셀주크 투르크계 투르크인이었다. 한편 카이로에 있는 칼리프를 받쳐주는 것은, 같은 이슬람교도이자 아랍인을 중심으로 한 여러 부족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분열상태가 중근동에 미치자, 시리아는 투르크인 세력 아래로, 그리고 팔레스티나는 아랍인의 세력 아래로 들어갔다._ 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1>, p156


  십자군 전쟁을 호소하는 교황의 호소에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 Deus lo vult'는 군중의 화답으로 시작되었다는 십자군 전쟁. 그렇지만, 중세 유럽인들의 열렬한 신앙심 뒷편에는 서로 다른 욕망의 주체들이 저마다의 생각을 가지고 '신의 뜻'을 외쳤음을 <십자군 이야기 1>은 보여준다. 먼저 교황(敎皇). 카노사의 굴욕(Road to Canossa, 1077) 이후 오히려 신성로마제국황제의 압박에 시달리며, 유럽을 전전하던 교황은 황제가 할 수 없는 업적을 이루어 교회와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 한다. 여기에 동로마(비잔틴) 제국의 황제의 원조 요청은 '이교도에게 핍박받는 그리스도 형제를 살린다'는 훌륭한 대의명분을 제공했다.


 황제 하인리히는 아직 서른여덟 살. 카노사에서 당한 굴욕을 잊지 않은 황제는 군사력으로 교황을 몰아붙임과 동시에 교회 내부를 분열시킴으로써 대립교황을 선출하게 했다. 로마 교황이 지닌 권위를 뿌리째 무너뜨리는 책략을 부린 것이다.(p17)... 8백년 가까운 세월 동안 로마 교황의 거처였던 라테라노 궁전에조차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교황. 이것이 프랑스 땅에서 십자군을 제창하기 전 우르바누스 2세(Urbanus PP. II, 1088 ~ 1099가 처해 있던 실상이었다._ 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1>, p18


 그렇지만, 동로마제국 황제 역시 그리스도 형제들에게 순수한 형제애를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황제는 서유럽의 십자군을 활용해 이슬람을 격퇴하고, 아울러 과거 소아시아를 지배한 제국의 영광을 찾을 야욕을 가지고 있었다.


 황제 알렉시우스(Alexius I Comnenus, 1048 ~ 1118)는 제후들이 오리엔트 땅에서 하려는 군사 행동에 대해서는 찬동한다. 오리엔트에 자신들과 같은 강력한 그리스도교도의 나라가 생기는 것도 찬성했는데, 그것은 이슬람 세계와 비잔틴제국 사이의 완충지대가 되기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지원은 약속하지만, 그 대신 제후들을 비잔틴제국 황제에게 절대적으로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_ 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1>, p70


 그렇다면, 십자군 전사들은 어떠한가. 주로 제후(諸侯)들로 구성된 십자군 원정부대는 본국에서 땅을 상속받지 못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운명을 개척해야하는 이들이었다. 성직자 또는 하급기사 신분을 면치못했을 무력이 출중한 이들에게 십자군 원정은   실리와 명분을 함께 제공하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실제로 고드프루아(Godefroy de Bouillon, 1060 ? ~ 1100)과 동생 보두앵 1세(Baudouin, 1058년? ~ 1118)는 이를 통해 예루살렘 왕국의 왕이 될 수 있었다.


 노르망디 공작에 블루아 백작, 툴루즈 백작, 로렌 공작... 그 시대의 공작, 후작, 백작, 남작이란, 자기 힘으로 획득하고 자기 힘으로 유지하는 영지의 주인이고, 그것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군사력으로, 핏줄로 이어진 일족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였다._ 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1>, p50


 예전에는 성직자의 길에서 실패했고 영지도 상속받지 못한 신분에 지나지 않았던 보두앵은, 그리스도교도들이 동경하는 땅인 성도 예루살렘의 왕이 된 것이다. 이렇게 되는 데 불과 4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제1차 십자군의 주역인 제후들 중 몇 명은 오리엔트로 온 후 인간으로서 장족의 발전을 이루는데, 보두앵도 그 가운데 한 명이다._ 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1>, p293


 비록 전쟁 초기 니케아에서 궤멸했지만, 군중십자군(People's Crusade)도 여기에 더해진다. 11세기 농업생산량이 증가되는 상황에서 농지(農地)에 정착하지 못한 빈민(貧民)들이 생계가 어려워 '요단강을 건너' 신국(神國)에 들어가기 위해 모인 군중 십자군(민중 십자군)은 중세인들의 또다른 욕망 분출 형태였다.


 성지에서 벌어지는 이슬람교도의 횡포를 한탄하며, 지금 당장 성지를 탈환해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서 자라고 죽은 땅을 이교도의 손에서 되찾아오자고 호소하는 피에르의 열변은, 남기고 갈 자산도 없고 갖가지 채비를 갖출 여유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중세의 하층민에게는 일상 생활 자체가 이미 가혹한 것이었다. 그들에게 십자군 참가는 그 혹독한 나날에서의 해방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민중 십자군'이 형태를 갖추어갔다._ 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1>, p33


 이처럼 십자군을 주도하고 구성한 세력들은 각자 저마다의 욕망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들은 '신(神)'의 이름 아래 욕망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었다. 그 욕망의 지향점은 성도 예루살렘이으며, 잃을 것이 없던 이들은 여기에 그들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반면, 지향점을 갖고 있던 이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것을 함께 지켜야한다는 공통된 인식을 갖지 못했고, 분열된 상태에서 각개격파당하고 만다.


 1097년 봄, 제후들이 발을 들여놓았을 당시의 소아시아는 셀주크투르크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렇지만 한 지배자 아래 통일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셀주크투르크 내의 두 부족이 영토 확장을 놓고 서로 싸우고 있었다. 크게 나눠보면 소아시아 서쪽은 니케아에 본거지를 둔 킬리지 아스슬란이, 동쪽은 코니아에 본거지를 둔 다니슈멘드가 지배하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몇 년 전부터 전쟁 상태에 있었다._ 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1>, p83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십자군 이야기 1>는 제1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는 이들의 서로 다른 욕망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한데 묶여서 거세게 분출되었을 때의 결과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의 잘못된 분출의 결과가 십자군들이 안티오키아와 예루살렘 함락 후 저지른 광기 어린 학살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한편, 예루살렘 성지 수복 이후 벌어진 학살에 대한 시오노 나나미의 평가는 다소 냉소적이다.


[그림] 제1차 십자군 전쟁과 예루살렘 정복 (출처 : https://www.aljazeera.com/programmes/the-crusades-an-arab-perspective/2016/12/shock-crusade-conquest-jerusalem-161205081421743.html)


 이교도만 보면 가리지 않고 죽이던 사람들이 이날은 제단 앞에 울면서 무릎을 꿇었다. '성도 예루살렘 해방'은 1099년 7월 15일에 드디어 성취되었다. 유럽을 뒤로한 지 3년의 세월이 지나 있었다. 선인과 악인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한 인간 안에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나 철학이나 윤리를 통해 교정하려 노력하는 것인데, 아직도 그 성과는 신통치 않다. 옛사람들은 이러한 현실을 두고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말했다._ 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1>, p239


 선(善)과 악(惡)이 별도의 공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 안에 공존한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그렇지만, 저자의 이후 주장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선'과 '악'이 섞인 상태가 우리 인간의 상태라면 처음부터 교정이 가능할까. 어떤 기준으로 교정을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는 최선은 '중용 中庸'에 가까워지는 길이고, 끊임없는 수양이 필요한 것은 아닐런지. 


 저자는 무슨 기준을 가지고 교정을 말하는 것이며, 성과를 말하는 것인지 의문을 갖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교정의 성과가 문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를 통해 인간을 현혹하고 조정해온 것이 오히려 우리의 문명(文明)이 아닐까. 역사 이래로 이런 현혹이 계속되어온 점을 생각해 본다면, 교정하려는 노력의 성과가 신통치 않은 것이 아니라, 이용하려는 노력의 성과가 꾸준한 것이 더 문제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제1차 십자군 전쟁의 전후를 다룬 <십자군 이야기 1>는 예루살렘 왕국과 주변 제후국들의 수립을 마지막으로 마무리된다. 이어지는 <십자군 이야기 2>에서는 단결된 이슬람 세계의 반격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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