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와 책읽기


 설을 맞아 막내 작은집 아이들이 함께 왔습니다. 여러 해 만에 보는 막내 작은집 아이들은 스물여섯과 스물넷. 젊음이 한껏 무르익는 나이인 아이들이지만 우리 집 아기한테는 처음 마주하는 고모, 오촌 고모. 큰 오촌 고모는 큰댁에 와서 맨 처음으로 하는 일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기르는 개 두 마리 구경하기. 많이 따뜻해진 날씨이지만 쌀쌀한 시골 날씨요, 해가 져서 어두운데에도 바깥에서 퍽 오랫동안 개하고 놉니다. 집에서 개를 기르기도 한다지만 개를 퍽 좋아하는군요. 생각해 보면,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모처럼 찾아가는 집에 있을 책시렁을 가만히 돌아보면서 즐길 테고,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술벗을 찾아 술상을 차릴 테며, 연속극을 좋아하는 사람은 텔레비전 앞에 도란도란 모여 앉을 테지요.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른 곳에서 다 다른 삶으로 다 다른 좋아하는 일과 놀이를 붙잡습니다. (4344.2.3.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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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넋을 찾는 책읽기


 넋이 나간 사람을 일컬어 미친이라 한단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넋나간 사람, 곧 미친이라 할 만할까. 어마어마한 나라돈을 쏟아부으며 물줄기를 살린다고 외치는 사람은 미친이라 할 만할까. 그런데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은 대통령부터 대학교수와 신문기자까지 골고루 많다. 이들은 미친이라 할 만한가.

 참말이 아닌데 참말인 듯 신문이나 잡지나 방송이나 인터넷에 떠들썩하게 띄우는 사람이 많다. 이들은 법정에 서서 잘못했다는 판결을 받았어도 똑같은 일을 되풀이한다. 이들은 미친이일까 넋나간 사람일까.

 쿠바로, 런던으로, 파리로, 뉴욕으로, 사진을 찍는다든지 예술을 한다든지 뭔가를 한다든지 하면서 비행기 타고 마실을 다니는 사람이 엄청나게 늘었다. 이제 일본 도쿄쯤은 지렁이나 달팽이나 흔히 오가는 골목마실쯤 된다. 그런데 정작 쿠바이든 런던이든 파리이든 뉴욕이든 도쿄이든 쉽게 오가면서, 내 보금자리 깃든 마을 한자락 골목을 거닐어 보지는 않는다. 아니, 내 보금자리 깃든 마을과 이웃한 삶자락 한켠에 골목이 있는 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모른다기보다 느끼는 가슴이 없다. 이들은 미친이일는지 넋나간 사람일는지 아리송하다.

 서양사람처럼 까만옷을 차려입으면 깍듯이 인사하지만, 반바지에 민소매옷을 입으면 잔뜩 찌푸린 낯으로 말부터 까고 보는 사람이 많다. 까만옷에 까만차라면 굽신거리며 인사하지만, 고무신에 조그마한 자전거를 몬다면 얼른 가로막고는 못 지나가게 하기 일쑤이다. 이 나라는 미친 나라일까 넋나간 나라일까.

 대학교를 다니거나 마친 사람들은 으레 누구나 대학교를 다닌다고 여기면서 묻거나 말한다. 386이건 486이건 또 무슨무슨 학번이건 무슨 쓸모가 있을까. 더욱이 같은 해에 같은 대학교를 다녔다 한들 이 사람들이 한 동아리로 묶일 만한 살가운 이음고리가 있을 수 있는가. 스스로 진보라고 밝히는 사람들조차 초·중·고등학교만 마치는 사람들 앞날을 살피거나 걱정하지 않을 뿐더러, 학교 문턱을 안 밟는 사람들 삶을 헤아리거나 보듬지 않는다. 지식으로 똘똘 뭉친 말과 책만 쏟아내고, 사람 나이를 학번으로 아니면 읽지 못한다. 이들 가방끈 긴 사람들은 미친이인가 넋나간 이인가.

 《짝꿍 바꿔 주세요》라는 일본 그림책이 있다. 이 그림책을 내놓은 일본에서는 거의 100만 부를 팔았는데(2010년까지) 일본에서 나온 책이름은 “짝꿍 바꿔 주세요”가 아니다. 짝꿍 이름을 들먹이면서 ‘토나리 노 세키 노 마스다’라 붙였다. ‘토나리’는 뭐고 ‘세키’는 뭘까. 내가 가진 일본책을 찾아서 들여다본다. “となりのせきのますだくん”으로 적혔다. 이런, 일어사전을 찾아보니 “옆의 자리의 마스다 군”이네. “짝꿍 마스다”일 뿐인 책이름이잖아. 이 그림책을 그린 사람은 “짝꿍을 바꾸어 달라”고 말하지 않는데, 한국에서 옮긴 그림책은 멋대로 “짝꿍 바꾸라”고 이름을 붙였잖아. 누가 미친이인가. 누가 넋나간 사람인가.

 내가 읽는 책 하나는 내 넋을 옳게 차리도록 도와줄 수 있는가. 나는 내 넋을 알뜰히 차리려는 마음으로 책을 읽는가. 미친이만 판치는 미친나라에서는 미친책만 읽으며 미친글만 쓰면 되는가. (4344.2.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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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석하는 책읽기


 글을 쓰는 사람 가운데 ‘분석하면서’ 쓰는 사람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이모저모 따지면서 글을 쓰는 사람이 아예 없지 않겠지요. 생각없는 글이란 쓸 수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작품분석’이나 ‘창작분석’이란 없습니다. 글읽기와 글쓰기가 있습니다. 글이란 글이지 작품이 아니요, 사진은 사진일 뿐 작품이 아닙니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치고 작품을 부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름난 노래이건 대단한 노래이건 따지지 않습니다. 내 가슴에 사무치면서 혀로 감돌기에 부르는 노래입니다.

 책을 읽을 때에는 글쓴이 이름을 따질 까닭이 없습니다. 저처럼 우리 말글 다듬기 일을 하는 사람이야, 책을 읽으면서 이모저모 잘못 쓴 대목을 짚을 수 있으나, 저 또한 책을 읽을 때에는 그저 책을 읽습니다. ‘문장분석’ 따위를 할 수 없고, 할 까닭이 없으며, 이런 일을 하면 하루하루 아깝습니다.

 흔히들 ‘지면분석’을 하고 ‘지면연구’를 합니다. 사람들이 더욱 잘 들여다보도록 편집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편집은 반드시 해야 합니다. 그러나, 편집할 글이 있어야 편집을 합니다. 편집할 글이 없이 편집을 할 수 없습니다.

 편집이란 글고치기가 아닙니다. 편집이란 글쓴이 넋을 매만지는 일이 아닙니다. 서툰 글이든 돋보이는 글이든, 그저 이 글마다 어떠한 삶이 깃들었는가를 돌아보는 일이 편집입니다. 이 글이 실린 책을 읽을 때에 눈이 아프지 않도록 하고, 이 책을 읽으면서 한결 마음이 느긋하거나 사랑스럽도록 이끄는 편집입니다. 눈부시게 해야 할 편집이 아니고, 눈부셔야 할 편집이 아닙니다. 편집에 앞서 글부터, 눈부셔야 할 글이 아니요, 눈부실 까닭이 없는 글입니다. 삶을 담는 글이고, 삶을 엮는 편집입니다.

 우리가 저마다 살아가는 집은 집입니다. 디자인 건축품이 아닙니다. 디자인 작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고, 건축 작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에요. 살림집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살림집이면서 예쁘장하다면 좋을 수 있겠지요. 살림집이면서 예쁘장할 때에는 좋다 할 뿐, 더도 덜도 아닙니다. 살림집은 살림집답게 일구어야 해요.

 춤은 춤처럼 즐기는 춤입니다. 연극은 연극대로 즐기는 연극입니다. 글은 글맛이 나도록 쓰며 읽는 글입니다.

 시를 분석하며 읽을 수 없습니다. 그림책을 낱낱이 파헤치거나 따지면서 읽힐 수 없습니다. 만화책을 넘기면서 그림결이 몹시 엉성한 작품들은 퍽 껄끄럽기는 하지만, 껄끄러운 대로 줄거리와 이야기를 들여다봅니다. 처음부터 만화쟁이 한 사람 그림결이 빈틈없이 마무리될 수 없는 노릇이니까, 이런 대목은 술렁술렁 지나치려 합니다. 그런데, 참말 좋은 만화를 사랑스레 그리는 이들은 새내기 때이든 익숙내기 때이든 그림결이 아주 따사롭습니다. 투박할 때에는 투박한 대로 따사롭고, 보드라울 때에는 보드라운 대로 따사롭더군요.

 젊을 때에는 한껏 거칠거나 윽박지르듯이 글을 쓸 수 있습니다. 늙을 때에는 한결 차분하면서 쓰다듬듯이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어느 때 어느 글이 더 훌륭하거나 낫다 여길 수 없습니다. 젊은이 글은 젊은이 글대로 좋고, 늙은이 글은 늙은이 글대로 좋습니다. 늙은이이면서 젊은이처럼 살아가면 이 글은 이 글대로 좋고, 젊은이이면서 애늙은이가 다 되었다면 애늙은이 글은 또 이러한 결대로 좋습니다.

 다 다른 사람들 다 다른 삶이기에, 다 다른 글을 다 다른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글은 짜거나 재거나 꿰어맞출 수 없습니다. 글은 오로지 즐길 뿐이요, 읽을 뿐입니다. 글은 오직 쓸 뿐이요, 나눌 뿐입니다. (4344.2.1.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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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베개로 책읽기


 새벽에 일어나서 글을 쓴다. 어느새 아침이 밝고 바깥은 환하다. 어제 늦게까지 안 자던 아이는 열한 시가 넘어도 일어나지 않는다. 오늘은 일찌감치 아침 차리느라 부산을 떨지 않아도 좋구나 생각하면서 차츰 몸이 처진다. 아이가 일찍 일어나면 아빠도 글쓰기를 일찍 마치며 아침을 차리느라, 이무렵은 아이가 밥을 거의 다 먹고 설거지를 할 때. 모처럼 이때까지 집일을 뒤로 젖히니 느긋하기는 하지만, 늘 이무렵 설거지를 하고 살짝 기지개를 켜며 방바닥에 드러눕다 보니 눈이 무섭게 감긴다. 눈을 뜨나 떴다 하기 힘들고, 애써 자판을 두들겨 보려 하지만 자꾸 손가락이 엇나간다.

 히유 한숨을 몰아쉰다. 집식구가 조금 늦게까지 꿈나라에 빠졌어도 아빠는 느긋하게 글쓰기를 못 하는구나. 셈틀을 끈다. 바닥에 그대로 눕는다. 머리가 허전해서 옆에 쌓은 책 몇 권을 옮겨 베개로 삼는다. 몇 분쯤 지긋이 눈을 감고 쉰다. 조금 뒤 눈을 살짝 뜨고는 왼편에 놓은 책 하나를 펼친다. 책을 베개로 삼아 누운 채 책을 읽는다.

 책을 읽은 지 5분쯤 지나자 아이가 잠에서 깬 소리가 난다. 아이는 일어나자마자 언제나처럼 노래를 부른다. 어쩜, 이렇게 잠에서 깰 때마다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우리 집 아이라지만 참으로 놀라우며 예쁘다. 아이한테 지난달부터 아침에 일어나면 “어머니 잘 잤어요? 아버지 잘 잤어요?” 하고 말하라고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바로 오늘부터 “어머니, 잘 잤어요?” 하고 물으며 흔드는 소리가 난다. 이 녀석아, 일어난 사람한테 하는 인사이지, 어머니는 둘째를 배어 몸이 힘드니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잖니. 어머니를 깨우며 그런 인사를 하면 어떡하니.

 아이는 겉바지와 웃겉옷을 하나씩 들고 아버지한테 온다. “치마 입혀 주셔요. 바지 입혀 주셔요.” 하고 말한다. 변기에 오줌을 누면 “쉬 했어요.” 하고 똥을 함께 누었으면 “쉬 했어요. 똥 눴어요.” 하고 말한다. 치마 같은 웃겉옷이랑 겉바지를 입혀 달라는 소리를 하나하나 한다. 이리하여, 아빠는 책을 베개 삼아 책을 읽는 아침 말미는 고작 5분 만에 끝낸다. (4344.1.3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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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읽기와 느낌글


 책을 읽었기에 느낌글을 씁니다. 책을 읽지 않고서는 느낌글을 쓰지 못합니다. 그런데 신문이나 잡지나 방송을 보면 책을 읽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책을 소개하는 글’을 씁니다.

 책을 읽지 않고 책을 소개하는 글을 쓴다니 놀랍기만 합니다. 책을 안 읽고도 책을 소개하는 글을 쓰는 사람들은, 자동차를 타 보지 않고 ‘시승기’를 쓰거나, 밥을 먹어 보지 않고 ‘맛집 이야기’를 쓰는 일하고 똑같다 할 텐데, 무엇보다 사랑을 해 보지 않고서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를 쓰는 셈일 텐데, 이와 같은 글도 글이라 할 만한지 궁금합니다.

 신문이나 잡지나 방송에 실리는 숱한 ‘책소개’, 이른바 ‘서평’은 느낌글이 아닙니다. ‘서평’은 한자말이고 ‘느낌글’은 토박이말이니까 둘이 다르지 않습니다. 서평이나 신간소개는 죽은 글이요, 느낌글은 산 글입니다. 서평이나 신간소개는 장사하는 글이요, 느낌글은 살림하는 글입니다. 서평이나 신간소개는 책을 죽이는 글이요, 느낌글은 책을 살리는 글입니다.

 책이란 짐짝(물건)이 아닙니다. 책이란 값싸게 팔거나 비싼값을 붙이는 짐짝이 아닙니다. 책이란 더 값있게 모시거나 더 하찮게 다루는 짐짝이 아닙니다. 책이란, 이 책을 일군 사람들 삶을 땀방울로 알알이 엮은 이야기보따리입니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은 사람을 비롯해서, 글과 그림과 사진을 매만져 종이에 안친 사람들 삶이 땀방울로 엮이며 알알이 배어든 이야기꾸러미입니다.

 알찬 이야기보따리를 즐거이 느껴 보지 않고서야 느낌글을 쓸 수 없지만, 알찬 이야기보따리를 즐거이 느꼈다면 서평이나 신간소개는 쓰지 않습니다. 알뜰한 이야기꾸러미를 기쁘게 맛보았다면 느낌글을 쓸 뿐 아니라, 내 삶을 아름답게 일구는 슬기를 나누어 받습니다. 책을 읽는 사람은 더 예쁘며 더 착하며 더 고우며 더 참다우며 더 씩씩하며 더 튼튼하게 살아가고픈 꿈을 꾸는 사람입니다. 이러하기에 책을 읽고서 홀가분하게 느낌을 푼푼이 담는 글을 씁니다. 누가 보라는 글이 아닙니다. 누구한테 자랑하려는 글이 아닙니다. 어디에 돈을 받고 파는 글이 아닙니다. 느낌글은 말 그대로 느낌을 담는 글이고, 책 하나에 어떠한 삶이 깃들었는가를 나 스스로 내 삶결에 따라 느낀 이야기를 적바림하면서, 글쓴이와 엮은이한테 맞이야기를 보내는 손길입니다.

 서평이나 신간소개는 어쩔 수 없이, 흔한 말로 ‘주례사 비평’에 머물밖에 없습니다. 서평이나 신간소개는 아주 마땅히, 서평단에 따라 쓰거나 공짜책을 받아 쓸밖에 없습니다.

 느낌글은 보드라운 바람결처럼 아주 마땅히, 스스로 주머니를 털어 사서 읽은 책을 기쁘게 가슴으로 받아안으면서 쓰곤 합니다.

 서평이나 신간소개를 쓰면서 밥벌이를 해야 하는 신문기자나 잡지기자나 방송기자는 참으로 딱합니다. 기자로 일하면서도 얼마든지 서평 아닌 느낌글을 쓸 수 있을 텐데요. 아니, 신문과 잡지와 방송부터 서평이나 신간소개를 써대며 광고를 끌어들이려 하지 말고, 느낌글을 적바림하면서 ‘독자를 끌어모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문을 이루는 힘은 바로 독자, 읽는 사람입니다. 잡지와 방송을 이루는 기운 또한 곧 독자, 읽는 사람이에요. 광고를 실어 주는 사람들이 신문이나 잡지나 방송을 이루지 않습니다. 자꾸자꾸 광고 따라 흐르면서 스스로 구렁텅이를 파거나 벼랑으로 굴러떨어지려 할수록 기사글은 글하고 동떨어집니다. 글이 아닌 밥그릇 붙잡기가 되니까, 서평이나 신간소개만 가득가득 채울밖에 없으며, 이러한 서평이나 신간소개를 자꾸 읽어 버릇하는 사람들도 ‘느낌글하고는 멀어지’면서 차츰차츰 내 삶을 보듬을 책보다는 ‘내 처세에 이바지하는 기술책’을 쥐어들고야 맙니다.

 느낌글을 쓴 사람은 느낌글로 적바림한 책을 언제나 다시 읽기 마련이요, 이렇게 읽은 책을 둘레에 선물하기 마련입니다. 느낌글 하나 써낸 사람은 또다른 반가울 책을 꿈꾸면서 책방마실을 하기 마련입니다. 느낌글 하나 쓰면서 책사랑을 꽃피우는 사람은 책사랑에 이은 삶사랑과 사람사랑으로 나아가기 마련입니다. (4344.1.30.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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