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걀과 닭 -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소설집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배수아 옮김 / 봄날의책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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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듬읽기 / 숲노래 글손질 2025.3.15.

다듬읽기 259


《달걀과 닭》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배수아 옮김

 봄날의책

 2019.6.24.



  새를 비롯한 숨붙이를 돌아보면, 으레 수컷이 끝없이 맑고 밝게 노래하면서 암컷을 바랍니다. 암컷도 나란히 노래하지만,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는 새노래는 거의 다 수컷가락입니다. 저(수컷)을 바라보아 주기를 바라는 님(암컷)을 부르려고 목청을 가다듬어서 노래를 펴는 그(수컷)입니다. 노랫가락에 담긴 뜻과 마음이 애틋하구나 싶을 무렵, 님(암컷)은 그(수컷)한테 다가와서 묻지요. “그래, 네 노래는 잘 들었어. 그런데 집은?” 이 말(새소리)을 들은 그(수컷)는 “우리집! 그럼, 네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이렇게 둥지를 틀었지!” 하고 외칩니다. 님(암컷)은 그(수컷)가 틀어놓은 둥지를 요모조모 보면서 “쯧쯧, 안 되겠는걸? 이대로는 모자라!” 하면서 그(수컷)가 어설피 엮은 둥지를 고치고 다듬으며 가꿉니다.


  긴긴 나날을 거친 사람살이는 어떠한가 하고 돌아봅니다. 사람도 숫사람이 먼저 말을 트고서 암사람을 불렀을 만하지 싶습니다. 암사람은 언제나 마음과 마음을 잇는 눈빛으로 이야기를 펼 줄 알았다면, 숫사람은 마음과 마음으로는 좀처럼 이야기를 알아차리지 못 하면서 따로 목청을 돋워서 ‘말소리’를 지었지 싶어요. 이때에 암사람이 숫사람한테 다가와서 첫말을 터뜨리지요. “그래, 그래, 네 말 잘 들었어. 그런데 좀 엉성하지 않니?” 이윽고 암사람은 숫사람한테서 어떤 마음이 어설픈지 차근차근 짚고 알려주면서 ‘이야기’를 소리로 옮기는 살림을 짓습니다.


  그런데 암수가 서로 맺던 사랑이라는 길을 잊어버린 웃사내(가부장권력자)는 그들끼리 주고받는 벼슬자리를 마련합니다. 이 벼슬자리는 ‘말’이 아닌 ‘글’을 마치 굴레처럼 씌워요. 꽤 오래도록 ‘글’은 ‘수글(숫놈끼리 차지하는 힘글)’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수글 = 한문’이었고, 일본이 쳐들어온 뒤에는 ‘수글 = 한문 + 일본말’이었습니다. 일본이 물러간 뒤에는 이제 이 굴레를 털어낼 만했으나, 웃사내는 ‘수글’을 놓기 싫었어요.


  지난날 암사람은 글을 구경하거나 얼씬조차 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드문드문 착한 숫사람은 곁님이 글을 읽고 새기기를 바랐어요. 아무래도 숫사람은 스스로 말을 지을 줄 모르고, 말씨(말씨앗)·글씨(글씨앗)를 못 낳았거든요. 그리고 딸을 낳으면서 딸한테 글을 가르치고 물려주는 사내(아버지)가 하나둘 나타납니다. 이윽고 누구나(암수 모두) 말빛과 글빛을 살려야 하는 줄 알아보는 글순이가 나타나고, 어느새 온누리 글밭(문학계)은 차츰차츰 깨어납니다.


  다만, 이러한 발자취가 있더라도, 오늘날 숱한 글순이(여성작가)는 ‘수글’을 붙잡으려고 합니다. 웃사내가 웃사내질을 하면서 뭇사람을 억누르던 ‘수글(한문 + 일본말)’인데, 이 수글은 ‘한문 + 일본말 + 옮김말씨(번역체)’로 더욱 볼썽사납게 뒤틀립니다. 우리는 언제쯤 우리말씨를 알아보고 눈여겨보고 귀담아듣는 마음을 열까요?


  《달걀과 닭》을 읽는 내내 ‘수글잔치’를 느낍니다. 설마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님이 이녁 ‘엄마말’을 이런 수글잔치로 썼을는지 아리송합니다. 한글로 옮길 적에는 ‘무늬한글’인 ‘수글’이 아닌, ‘살림글·삶글·숲글’로 가다듬을 노릇이라고 봅니다. ‘수글’은 예나 이제나 굴레입니다. 살림글이요 삶글이요 숲글일 적에는 그저 수수하게 ‘글’입니다.


#O Ovo e a Galinha 1960년


ㅍㄹㄴ


《달걀과 닭》(클라리시 리스펙토르/배수아 옮김, 봄날의책, 2019)


나는 단 한 번의 시선으로 부엌 탁자의 달걀을 응시한다

→ 나는 바로 부엌 자리맡 달걀을 본다

→ 나는 곧장 부엌에서 달걀을 본다

8쪽


달걀은 외재화外在化하는 사물이다

→ 달걀은 밖에 있다

→ 달걀은 바깥에 있다

9쪽


닭의 몸에 관해서 말하자면, 닭의 몸은 달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최대의 증거가 된다

→ 닭몸을 말하자면, 닭몸은 달걀이 있지 않다는 뜻이다

→ 닭이라는 몸은, 달걀이 있지 않은 줄 보여준다

12쪽


정확히 바로 이 순간부터, 하나의 달걀은 존재하지 않는다

→ 바로 이때부터, 달걀 하나는 있지 않다

→ 바로 여기부터, 달걀이란 없다

16쪽


그리고 나를 비밀 안에서 웃게 만든다

→ 그리고 나는 슬그머니 웃는다

→ 그리고 나는 넌지시 웃는다

→ 그리고 나는 몰래 웃는다

19쪽


구불구불한 길 위에서 그녀는 여자의 운명으로 떨어졌고

→ 그이는 구불구불한 길을 가시내라는 삶으로 걷고

→ 구불구불한 길을 순이로서 살아가고

25쪽


그러나 삶은 그녀를 벌벌 떨게 만들었다

→ 그러나 사는 내내 벌벌 떤다

→ 그러나 삶이란 늘 두렵다

36쪽


가정부가 들어오자, 도전적으로 성급하게 지시했다

→ 집일꾼이 들어오자, 서둘러 들이치듯 말한다 

→ 부엌지기가 들어오자, 싸울듯이 얼른 시킨다

55쪽


기분이 상하고, 승리감에 들떠서, 나는 반항적으로 대꾸했다

→ 못마땅하고, 우쭐거리면서, 까불며 대꾸했다

→ 싫고, 으쓱거리면서, 덤비듯 대꾸했다

96쪽


그는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 걸음은 차츰 느려졌고

→ 그는 나를 쳐다본다. 나는 차츰 느리게 걷고

→ 그는 나를 본다. 나는 어느새 느릿느릿 걷고

107쪽


수태고지의 성녀처럼, 바로 그렇다. 그는 내가 최소한 자신을 미소 짓게 만드는 것을 허용했고, 그것을 통해 나에게 고지한 것이다

→ 아기를 알린 꽃님처럼, 그렇다. 그는 나를 보며 웃는다. 웃으며 말한다

→ 아기를 속삭인 님처럼, 그렇다. 그는 나랑 웃음짓는다. 웃음으로 얘기한다

120쪽


결과적으로 끊임없이 보호를 해줘야 해요. 쓰다듬는 것도 정말 위험하구요

→ 그래서 내내 돌봐줘야 해요. 쓰다듬어도 안 되구요

→ 그러니까 늘 보살펴야 해요. 쓰다듬다가 다치구요

186쪽


때때로 그는 아내에게 굴욕을 주기 위해서, 그녀가 옷을 갈아입고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 아내가 창피하다는데도, 그사람은 곁님이 옷을 갈아입는 곳에 곧잘 들어갔다

→ 아내가 부끄러워하는데도, 그이는 곁님이 옷을 갈아입을 적에 불쑥 들어갔다

239쪽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한 명의 인간이다

→ 그렇지만 나는 그대로 한 사람이다

→ 그렇지만 나는 늘 사람이다

266쪽


나는 동정녀의 영혼을 가졌으며, 그래서 보호가 필요하다

→ 나는 숫색시 넋이며, 누가 돌봐야 한다

→ 나는 숫몸인 넋이며, 누가 지켜야 한다

341쪽


※ 글쓴이

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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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다 - 조급하고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마음 처방전, 100만 부 기념 전면 개정판
와타나베 준이치 지음, 정세영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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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듬읽기 / 숲노래 글손질 2025.3.14.

다듬읽기 258


《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다》

 와타나베 준이치

 정세영 옮김

 다산초당

 2018.4.10.



  ‘둔감(鈍感)’은 ‘둔 + 감’이고, ‘鈍’은 ‘무디다’를 뜻합니다. ‘무디다’는 ‘무뚝뚝·무겁다·무덤덤’으로 잇습니다. ‘뭉툭’으로도 나아가고요. 이다음으로는 ‘뭉떵·몽땅’으로 닿고, ‘뭉텅이·뭉치’에 ‘뭉치다·뭉개다’로 다다르기도 합니다. ‘무·모’로 잇는 결은 ‘몸·뭇·물’로 만나지요. 누구나 무엇이든 느끼게 마련이되, 지나치게 얽매이기보다는 물처럼 흘려보내면서 스스로 흐를 줄 안다면 몸부터 차분히 다스리고 마음을 가만히 다독일 만합니다. 몽땅 느끼고 누리되 모두 내보낸달까요. 마시는 바람을 고스란히 내쉬듯, 나날이 마주하는 모든 일을 스스럼없이 맞아들이고서 기꺼이 내려놓는 셈입니다. 이를테면, 돈을 움켜쥐기에 더 넉넉하지 않아요. 이름을 거머쥐기에 더 높지 않아요. 힘으로 휩쓸기에 더 즐겁지 않습니다. 이 같은 삶결을 헤아리면 누구나 알맞게 하루를 지어요. 《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다》는 우리 스스로 지나치게 붙잡는 굴레를 여러모로 짚는 듯싶지만, 어쩐지 알맹이에서는 좀 비껴간 듯합니다. “너무 매이지 말자”는 목소리는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왜’ 마주하는지 바라보지 않거나 들여다보지 않고서야 “안 매일” 수 없어요. 언제나 모든 이 삶이 ‘무엇’인지 차분히 보고서 ‘왜’ 겪고서 다시 ‘무엇’을 배우는지 살핀다면, 걱정근심이란 가볍게 털 수 있어요. 일본에서는 ‘둔감력’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책이라는데, “무딘 힘”이나 “무뚝뚝한 힘”으로는 삶을 보내지 못 합니다. “뭇는 기운”과 “물빛”으로 스스로 돌볼 수 있으면 이 삶이 느긋할 만합니다.


ㅍㄹㄴ


《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다》(와타나베 준이치/정세영 옮김, 다산초당, 2018)


만일 누군가가 자신을 둔하다고 말한다면 대부분 불같이 화를 내지 않을까요

→ 누가 나를 굼뜨다고 말한다면 거의 부아나지 않을까요

→ 누가 나를 느리다고 한다면 으레 불나지 않을까요

17쪽


부정적인 뜻으로 받아들여지곤 합니다

→ 나쁜뜻으로 받아들이곤 합니다

→ 싫어하곤 합니다

17쪽


K는 회사 안에서 매우 평범한 편에 속합니다

→ ㄱ은 일터에서 매우 수수합니다

→ ㄱ은 일터에서 튀지 않습니다

19쪽


원고가 그대로 반송되기도 합니다

→ 글이 그대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24쪽


당시 우리 같은 무명작가에게 편집자가 먼저 연락하는 일은

→ 그때 우리 같은 새내기한테 엮는이가 먼저 찾아오는 일은

→ 그즈음 우리 같은 병아리한테 엮는이가 먼저 묻는 일은

25쪽


혈액의 흐름을 원활하게 유지했던 게 분명합니다

→ 피가 부드럽게 흘렀구나 싶습니다

→ 피가 잘 흐른 듯합니다

43쪽


조금만 혼나도 세상이 무너진 듯 충격을 받는 사람이

→ 조금만 꾸중해도 하늘이 무너진 듯 놀라는 사람이

→ 조금만 다그쳐도 나라가 무너진 듯 흔들리는 사람이

51쪽


이야기를 나누며 산책을 즐길 때였습니다

→ 이야기를 하며 거닐 때였습니다

→ 이야기하며 걸을 때였습니다

69쪽


물론 사이비 종교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면 문제가 있습니다

→ 다만 거짓절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면 얄궂습니다

→ 다만 속임절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면 걱정스럽습니다

95쪽


요즘 사람들의 저향력이 얼마나 떨어졌는지

→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못 견디는지

→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못 배기는지

113쪽


※ 글쓴이

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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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여름 - 호리 다쓰오 단편선 북노마드 일본단편선
호리 다쓰오 지음, 안민희 옮김 / 북노마드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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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듬읽기 / 숲노래 글손질 2025.3.10.

다듬읽기 233


《늦여름》

 호리 다쓰오

 안민희 옮김

 북노마드

 2024.8.31.



  한자말 ‘용서’는 우리말로는 ‘봐주다(보아주다)’를 가리킵니다. 이 말뜻을 모르는 분이 대단히 많은데, 못마땅하거나 싫으면 아예 고개를 돌리면서 “안 봅”니다. ‘봐주다(보아주다)’를 하려면 고개를 마주해야 하지요. “네가 무슨 짓을 하든 그대로 지켜보면서 받아주겠노라”는 뜻인 ‘봐주다·용서’입니다. 그저 보면서 받아들이기만 할 뿐, 안 따지고 안 나무라겠다는 뜻인 ‘봐주다·용서’예요. 그래서 ‘봐주다·용서’를 펴려면 그야말로 스스로 ‘사랑’이어야 합니다. 사랑이 아니라면 보아주지(용서하지) 못합니다.


  미운놈을 보아줄 수 없기에, 차라리 팔을 자르거나 긋는 쪽이 낫겠다고 여기는 사람까지 있더군요. 미운놈이나 싫은놈이 아무리 착하거나 참하게 일하더라도 “하나도 안 보”게 마련이에요. 미운놈이 뭘 하면 티끌만 한 잘못이 바윗덩이처럼 크게 보이고, 미운님이 가만히 있더라도 저놈은 곧 뭔가 터뜨릴 테니까 미리 박살내야 한다고 여기기까지 합니다.


  잘하면 “잘했구나!” 하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잘못하면 “잘못했네!” 하고 말할 수 있나요? “잘했어!”하고 “잘못했어!”만 말하면서, 다른 군말은 한 마디도 안 붙일 수 있는지요?


  ‘우리 쪽’에 있는 사람은 커다랗게 잘못을 저질러도 ‘봐주’면서, ‘저쪽’에 있는 사람은 아무 잘못을 안 저질렀어도 ‘못 봐주’는 매무새를 이을 적에는 내내 싸움박질입니다. 두 쪽이 똑같이 잘못을 저지를 적에 두 쪽 모두 고르게 나무라고 탓하지 않을 적에도 자꾸자꾸 싸움박질입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우리는 나부터 스스로 ‘보아주’어야 합니다. 나부터 보아주는 자리에서 너를 보아줄 수 있고, 오직 사람을 사람 그대로 마주하면서 함께 이 별에서 살림하는 길을 찾습니다.


  《늦여름》을 읽었습니다. 심심하고 수수한 글자락이로구나 싶고, 이 심심맛과 수수맛이 따사로울 만하다고 느낍니다. 다만, 옮김말씨는 매우 아쉽습니다. 이웃말을 우리말로 담는 길을 좀 찬찬히 ‘보아주’면 얼마나 사랑스러울까요?


ㅍㄹㄴ


《늦여름》(호리 다쓰오/안민희 옮김, 북노마드, 2024)


이삼일 어딘가로 잠시 여행을 떠났다가

→ 이틀쯤 어디로 살짝 떠났다가

→ 사흘쯤 어디로 슬쩍 마실했다가

8쪽


여행 도중에 제법 무거워졌다

→ 다니는 길에 제법 무겁다

→ 돌아다니는데 제법 무겁다

9쪽


석연치 않은 마음도 들지만

→ 썩 내키지 않지만

→ 그리 내키지 않지만

9쪽


괜찮을 것 같은데

→ 나을 듯한데

→ 나쁘지 않은데

18쪽


프리드리히가 용의선상에 오른다

→ 프리드리히가 그놈에 오른다

→ 프리드리히가 검은이름에 오른다

22쪽


내버려두는 게 낫겠다고 체념한 것인지도 모른다

→ 내버려두어야 낫겠다고 넋놓았는지도 모른다

→ 내버려두어야 낫겠다고 고개저었는지도 모른다

23쪽


아까 본 호상가옥 말고도 옛 민가가 여러 채 모여

→ 아까 본 못집 말고도 옛 살림집이 여러 채 모여

→ 아까 본 못물집 말고도 옛 시골집이 여럿 모여

25쪽


숲이 점점 길어졌다

→ 숲길이 더 잇는다

→ 숲길이 더 나온다

→ 숲이 더 깊다

31쪽


캠프파이어를 했나 봐

→ 불놀이를 했나 봐

→ 모닥불놀이 했나 봐

33쪽


접시 위에 샐러리가 없다 싶더니 수프 안에 있었다

→ 접시에 굵미나리가 없다 싶더니 국에 있다

36쪽


우비를 입은 남자가

→ 비옷을 입은 사내가

38쪽


한 청년이 비틀거리며 나왔다

→ 젊은이가 비틀거리며 나온다

41쪽


바람도 거리에 흩어진 종잇조각을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공기의 흐름에 가까웠다. 그것이 내 등을 떠밀었다

→ 바람도 거리에 흩어진 종잇조각을 움직이지는 ㅇ낳는다. 오히려 가볍게 흐른다. 가벼운 바람이 등을 떠민다

49쪽


나는 격심한 피로감을 느꼈다

→ 나는 몹시 지친다

→ 나는 고단하다

→ 나는 고달프다

49쪽


그녀도 나처럼 피로를 느낄까

→ 그이도 나처럼 지칠까

→ 그사람도 나처럼 힘들까

49쪽


개는 그 집의 불길한 그림자 속에 얌전히 웅크려 앉았다

→ 개는 그 집 시커먼 그림자에 얌전히 웅크린다

→ 개는 그 집 캄캄한 그림자에 얌전히 웅크려 앉는다

51쪽


자기 앞에 환상의 식물이 있음을 깨닫지

→ 제 앞에 눈부신 풀꽃이 있는 줄 깨닫지

→ 코앞에 빛나는 푸나무가 있다고 깨닫지

60쪽


어느 바 안에서 친구 몇몇을 찾아냈다

→ 어느 술집에서 동무 몇몇을 찾아냈다

→ 선술집에서 동무 몇몇을 찾아냈다

61쪽


골목 너머의 불길한 암흑 속을 응시했다

→ 골목 너머 꺼림히 어두운 곳을 본다

→ 골목 너머 꺼림칙히 까만 데를 겨눈다

66쪽


처음으로 밤이라는 것을 목도한 사람처럼

→ 처음으로 밤을 본 사람처럼

66쪽


술집에서 놀 수 있는 금액이었다

→ 술집에서 놀 수 있는 돈이다

80쪽


호수 주변을 드라이브했다

→ 못 둘레를 돌았다

→ 못 언저리를 몰았다

97쪽


※ 글쓴이

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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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
진은영 지음 / 마음산책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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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듬읽기 / 숲노래 글손질

다듬읽기 239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

 진은영

 마음산책

 2024.9.15.



  옷에 몸을 맞춘다면 옷이 찢어지거나 몸이 구겨집니다. 몸에 옷을 맞춰야 옷이 살아나고 몸을 활짝 폅니다. 오늘날 누구나 글을 누릴 만하지만, 막상 “마음을 담는 말”을 “글이라는 그릇으로 얹는” 길을 여는 사람은 드물다고 느낍니다. 마음에 맞추어 말을 살피고서 담는 글이 아닌, 그릇에 글을 맞추면서 말과 마음까지 그릇에 맞추려는 분이 무척 많구나 싶습니다.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은 무엇에 맞거나 맞추려는 줄거리일까요? 바깥(세계)에 나를 맞춰야 할 까닭이 없을 뿐 아니라, 처음부터 바깥을 쳐다볼 까닭이 없기도 합니다. 내가 나로서 나부터 사랑으로 바라보지 않고서야, 안도 바깥도 나답게 마주하지 못 합니다. 언제나 내가 나로서 나부터 사랑으로 바라볼 적에, 나한테 맞는 ‘마음이라는 빛그릇’을 알아볼 수 있고, 저마다 다른 ‘마음그릇이라는 곳’에 ‘말이라는 소리빛’을 담을 수 있으며, 말이라는 소리빛을 가만히 ‘글이라는 그림빛’을 옮길 수 있습니다.


  진은영 씨는 “수잔 손택은 소년이 되고 싶은 여자아이들은 많지만 소녀가 되고 싶어 하는 남자아이들은 드물다고 말한다(36쪽)” 하고 말하는데 고개를 갸우뚱할 대목입니다. ‘드물다’는 ‘없다’는 뜻일 수 없습니다. 머스마가 되고픈 가시내가 많을 수 있으나, 굳이 머스마가 안 되려는 가시내도 많습니다. 또한 머스마는 스스로 못 밝힐 뿐, 가시내가 되려는 머스마도 꽤 많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한테는 암수라는 빛씨가 나란히 있어요. 암씨나 수씨만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으로 서려면 왼오른이 나란할 노릇이고, 암수를 살피는 빛줄기가 함께 있을 일입니다. 왼눈과 오른눈을 고르게 맞추기에 앞을 제대로 봅니다. 왼발과 오른발을 고르게 놀리기에 앞으로 제대로 걷습니다.


  ‘제대로’란, ‘저(나)대로’라는 뜻입니다. 내가 나대로 바라보고 걸어가려면 ‘왼오른’을 나란히 보는 마음그릇일 노릇이에요. 겉몸으로 암이건 수이건 대수롭지 않아요. 누구나 암수가 나란한 몸빛이나 마음빛인 터라, 이 두빛을 한빛으로 녹여낼(맞출) 길을 스스로(나답게) 바라보고 찾으면 언제 어디에서나 사랑을 일구고 짓습니다.


  진은영 씨는 “천황의 무의미한 전쟁놀이로 젊은이들의 삶은 부서져버렸다(106쪽).”고도 적는데, 일본 우두머리는 ‘무의미한 전쟁놀이’가 아니라 ‘바보짓 쌈박노닥질’을 했습니다. 그들은 ‘놀이’가 아닌 ‘노닥질’을 했고, 숱한 순이돌이를 그저 마구잡이로 죽음터로 내몰았어요. “젊은이들의 삶은 부서져버렸다”고 말할 만하지 않습니다. “젊은이와 늙은이와 어린이를 몽땅, 여기에 들숲바다와 푸른별까지 싹쓸이를 하듯, 와장창 짓밟고 짓뭉개고 죽여버렸다”고 말해야 맞습니다.


  마음과 말이란 무엇인지 바라보면서 글결을 가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글부터 쓰거나 글을 치레하는 길이 아닌, 글이 왜 글인지 가만히 마주할 수 있기를 바라요. 우리는 이 땅에서 “수수한 사람들이 누구나 제 보금자리에서 살림빛으로 일구고 지은 숲말과 사랑말을 글결로 옮기는 길”부터 살필 노릇이라고 봅니다.


ㅍㄹㄴ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진은영, 마음산책, 2024)


책 읽기의 무용함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 책읽기가 덧없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 책읽기가 부질없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7쪽


그의 고백처럼 책 속에서 연명했던 것이다

→ 그이 말처럼 책으로 견뎠다

→ 그가 말하듯 책으로 버텼다

9쪽


그런 삶을 소망하는 사람이 이 세계에 적어도 한 명은 존재하고

→ 그런 삶을 바라는 사람이 이 땅에 적어도 하나는 있고

→ 그렇게 살려는 사람이 이곳에 적어도 하나는 있고

10쪽


여러 사람의 우정과 도움으로 한결 좋아진 것 같다

→ 여러 사람이 따사로이 도와서 한결 낫다

→ 여러 사람이 사근사근 도와서 한결 즐겁다

→ 여러 사람이 동무하며 한결 느긋하다

11쪽


독자를 황당하게 만들면서 소설을 시작하는 것은 카프카의 특기다

→ 카프카는 글머리를 뜬금없이 열곤 한다

→ 카프카는 우리 넋을 빼면서 글머리를 연다

20쪽


이 중 어느 버전도 택하지 않는다

→ 이 가운데 어느 길도 안 고른다

→ 여기서 어느 판도 고르지 않는다

21쪽


《파도》의 집필로 들어가기 전에

→ 《파도》를 쓰기 앞서

→ 《파도》를 쓸 즈음에

28쪽


그녀가 이런 환상적인 소설을 쓴 것은 소년이 되고 싶다는 소망으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 사내아이가 되고 싶기에 이런 멋진 글을 썼다고 본다

→ 머스마가 되고 싶기에 이렇게 아름글을 썼으리라

29쪽


실비아 플라스도 똑같은 불만을 토로했다

→ 실비아 플라스도 똑같이 발끈했다

→ 실비아 플라스도 똑같이 투덜댔다

30쪽


행위하기가 기능하기로 대체될 때 대화와 설득의 공간인 공적영역은 사라진다

→ 움직이기가 굴러가기로 바뀔 때 이야기하고 다독이는 너른터는 사라진다

→ 일이 힘으로 바뀌면 얘기하고 달래는 열린터는 사라진다

44쪽


나의 죽음이 내가 아닌 것이 되는 비인칭의 죽음이라면

→ 내가 죽어도 내가 아닌 아무개 죽음이라면

→ 내가 죽지만 나 아닌 살덩이라면

→ 내 죽음이 나 아닌 어느 것이라면

60쪽


후일 영국의 계관시인이 된

→ 뒷날 영국 노래꽃님이 된

→ 나중에 영국 노래별이 된

78쪽


관능적이라고 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고

→ 달짝지근할 만큼 후끈하다고

→ 낯뜨거울 만큼 불타오른다고

85쪽


쉽고 명징하지만 마음을 울리는 시구다

→ 쉽고 깔끔하지만 마음을 울리는 글이다

→ 쉽고 또렷하지만 마음을 울린다

92쪽


엄마가 아빠는 죽었다고 말하지 못하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 그녀도 남편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 엄마는 아빠가 죽었다고 말하지 못한다. 엄마도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 엄마는 아빠가 죽었다고 말하지 못한다. 엄마도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른다

100쪽


폐허의 거리를 쏘다니지만 결국 자신이 무언가 제대로 판단할 수도 없는 어리바리한 상태임을 깨닫고는 몹시 쓸쓸해진다

→ 휑한 거리를 쏘다니지만 마침내 스스로 무언가 제대로 볼 수도 없는 줄 깨닫고는 몹시 쓸쓸하다

→ 무너진 거리를 쏘다니지만 끝내 스스로 어리바리한 줄 깨닫고는 몹시 쓸쓸하다

106쪽


많은 사람이 원치 않는 드러남으로 인해 타인의 눈요기나 악의의 표적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

→ 숱한 사람이 바라지 않아도 드러나야 해서 구경거리나 놀림감이 되니 말이다

→ 적잖은 사람이 뜻하지 않아도 드러나면서 구경감이나 비웃음감이 되니 말이다

128쪽


독자들은 그녀의 글을 읽고 나면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 사람들은 이 글을 읽고 나면 거북하리라

→ 이런 글을 읽고 나면 누구나 고단하리라

135쪽


또한 사랑은 무차별적이어야 한다

→ 또한 사랑은 대중없어야 한다

→ 또한 사랑은 안 가려야 한다

149쪽


물론 이 시적 정의에 반감이 생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 다만 이 노래풀이가 거슬리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 그리고 이런 노래새김이 싫은 사람도 있을 터이다

156쪽


조개껍질은 가장 약한 연체동물이 사는 가장 단단한 집이다. 그것은 아름다운 무늬를 가졌다

→ 조개껍질은 가장 여린 말랑이가 사는 가장 단단한 집이다. 이 집은 무늬가 아름답다

→ 조개껍질은 가장 여린 말랑몸이 사는 가장 단단한 집이다. 이 집은 아름무늬이다

157쪽


이 세상 다른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저 내 길을 가로막고 있는 걸림돌일 뿐이며

→ 이 땅 다른 사람들은 누구이든 그저 내 길을 가로막을 뿐이다

→ 온누리 사람들은 누구이든 그저 내 길을 가로막는다

166쪽


A가 X에게 전하려는 것은 어떤 이미지다

→ ㄱ은 ㅌ한테 어떤 그림을 보여준다

→ ㄱ은 ㅌ한테 어떤 빛을 건넨다

170쪽


누군지도 모르는 고인을 애도하고 추모했다

→ 누군지도 모르는 가신님을 기렸다

→ 누군지도 모르는 떠남님을 되새겼다

189쪽


다른 존재들을 구하거나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창하게 새로운 인간이 될 필요는 없다

→ 다른 누구를 돕거나 우리가 바라는 터전을 이룰 적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대단하게 새로운 사람이 될 까닭은 없다

→ 다른 님을 살리거나 우리가 바라는 삶터를 일굴 적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대단하게 새사람이 되지 않아도 된다

205쪽


훌륭한 책들은 새로운 친구와 좋은 적이 계속해서 필요하다

→ 책이 훌륭하려면 새동무와 착한놈이 내내 있어야 한다

→ 책이 훌륭하자면 동무하거나 나무라는 이가 늘 있어야 한다

231쪽


※ 글쓴이

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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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정수일 지음 / 창비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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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듬읽기 / 숲노래 글손질 2025.2.12.

다듬읽기 255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정수일

 창비

 2004.10.1.



  밀씨도 볍씨도 책씨도 글씨도 찬찬히 흩뿌리기에 천천히 흙에 깃들어 싹트고 자랍니다. 우리가 쓰는 말씨도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따라 사뭇 다릅니다.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는 ‘무함마드 깐수’로 이름을 숨기고서 샛놈(간첩)으로 남녘으로 몰래 들어온 ‘정수일’ 씨가 사슬살이를 하는 동안 곁님한테 띄운 글월을 모았다고 합니다. 만주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자라고 북녘에서 일하던 이이는 1984년에 몰래 남녘에 들어와서 ‘마치 우리말을 모르는 사람 흉내’를 내면서 자리를 잡았고, 1996년에 붙잡혔다지요. 그런데 여느 샛놈과 다르게 북녘을 드나들고 북녘하고 몰래 만나고 돈을 받았더라도, 남녘 살림길(문화)에 이바지했다고 여겨서 ‘죽음(사형)’이 아닌 몇 해만 사슬살이를 하고서 풀려납니다. 다만, 이런 줄거리를 《소걸음으로 천리를 간다》에서 엿볼 수는 없습니다. 이 책만 읽으면 마치 아무 일도 없이 불쑥 사슬살이를 하고 만 ‘한겨레를 사랑한 늙수그레한 글바치’ 모습만 흐릅니다. 여러 이웃말을 대단히 잘한다고 하는데, 막상 이 책을 읽으면 ‘우리말’이라기보다는 ‘중국말’이나 ‘북녘한자말’이 끝없이 튀어나옵니다. 중국말이나 일본말을 잘하면서 중국책이나 일본책을 읽고 새기려면 한문도 잘해야겠지요. 그러니까 정수일 씨는 다른 여러 이웃말을 잘할는지 몰라도 막상 ‘우리말’은 아직 햇병아리 같구나 싶어요. 비록 아흔 살이라는 나이를 넘었다고 하지만, 이제라도 우리말이 무엇인지 차근차근 배우면서 이녁 맨모습을 고스란히 남기기를 빕니다. 이녁이 일구면서 걸은 배움길은 눈부실는지 모르나, 이녁이 쓴 ‘우리말’은 너무도 초라합니다. 스스로 겨레사랑(민족주의자)이라고 밝히려 한다면, 어느 이웃말보다도 우리말부터 어질게 다루고 펼 노릇이라고 봅니다.


ㅍㄹㄴ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정수일, 창비, 2004)


제때제때에 소식을 알리거나 용건을 적어 보내는 글로서 공개하지 않는 것이 상례인데

→ 제때제때 알리거나 뜻을 적어 보내는 글로, 남한테 안 드러내야 맞는데

4쪽


내용도 마음의 소식을 알리고자 했던 것이 주종을 이룬다

→ 줄거리도 거의 마음을 알리고자 했다

4쪽


충동의 계기마다 토출(吐出)한 것이어서 각설(却說)로 말머리를 돌릴 정도로 따분한 장광설을 요량없이 늘어놓기도 하였다

→ 불쑥불쑥 뱉은 말이어서, 끊고 말머리를 돌릴 만큼 따분하게 늘어놓기도 하였다

4쪽


겨레의 다시 하나됨에 뜻을 두고 기꺼이 수의환향(囚衣還鄕)해

→ 겨레가 다시 하나되기를 바라며 기꺼이 사슬옷을 입고서

→ 다시 한겨레가 되기를 바라며 기꺼이 굴레옷을 입고서

5쪽


삶의 화두를 한번 점검해보고, 우보천리(牛步千里)의 슬기도 터득하는 기회였음을 자긍해본다

→ 삶말을 돌아보고, 슬기로운 소즈믄길을 깨닫는 자리였다고 여긴다

→ 삶말을 짚고서, 소걸음이란 슬기를 배우는 틈이었다고 자랑해 본다

→ 삶말을 뜯어보고, 천천걸음이란 슬기를 느끼는 때였다고 우쭐해 본다

5쪽


필요한 해석이나 설명을 가했으며, 몇곳에는 추기(追記)를 붙이기도 하였다

→ 풀이를 보태었으며, 몇 곳은 덧글을 달기도 하였다

→ 글풀이를 보태었으며, 몇 곳은 꽃적이를 붙였다

5쪽


짓궂은 옥바라지에 노고를 아끼지 않은 집사람에 대한 고마움과

→ 짓궂은 뒷바라지에 품을 아끼지 않은 곁사람이 고맙고

→ 짓궂은 바라지에 구슬땀을 아끼지 않은 곁님이 고맙고

5쪽


잠 속에서도 희소식을 기다리는 당신의 그 애타는 마음을

→ 자면서도 꽃비를 기다리는 애타는 그대 마음을

→ 잠들면서도 단비를 기다리는 애타는 이녁 마음을

13쪽


해외에서 10년간, 남한에서 12년간이라는 드라마틱한 인생여정을 걸어오면서

→ 먼나라에서 열 해, 남녘에서 열두 해라는 눈물겨운 나날을 걸어오면서

→ 먼곳에서 열 해, 남녘에서 열두 해라는 눈물나는 길을 걸어오면서

13쪽


시간만 있으면 말 그대로 학문에 잠심몰두(潛心沒頭) 했소

→ 틈만 있으면 말 그대로 배움길을 걸었소

→ 짬만 있으면 말 그대로 배우려 했소

→ 겨를만 있으면 말 그대로 배우고 익혔소

13쪽


더 깊이 빠져들어가게 하고, 그 천착(穿鑿)으로 일로매진케 했소

→ 더 깊이 들어가고, 이렇게 온힘을 기울였소

→ 더 빠져들고, 이처럼 달려들고 다가갔소

13쪽


왕왕 오랜 담금질끝에 대기만성(大器晩成)하는 터라서

→ 곧잘 오랜 담금질 끝에 늦그릇이라서

→ 때때로 오랜 담금질 끝에 늦꽃이라서

14쪽


서로가 망연자실 속에 잊음(잊어줌)과 기다림(기다려줌)이라는 딜레마를 피할 수가 없었던 요요(擾擾)한 일이 상기되어

→ 서로가 넋을 잃고 잊고 기다려야 하는 고빗사위를 벗어날 수가 없어 뒤숭숭하던 일이 떠올라

27쪽


우리나라의 단풍은 그야말로 자연경색(自然景色) 중의 절경이오

→ 우리나라 가을물은 그야말로 빛나는 숲빛이오

→ 우리나라 가을빛은 그야말로 눈부시오

→ 우리나라 가을무지개는 그야말로 곱소

28쪽


영어(囹圄) 생활의 고요함은 자꾸 무언가 지난날을 돌이켜보게 하는구먼

→ 갇혀서 고요하니 자꾸 지난날을 돌이켜는구먼

28쪽


초록은 동색이라, 남이건 북이건 간에 우리는 한 핏줄을 이어받은 한겨레인 것이오

→ 풀빛은 같으니, 마녘이건 높녘이건 우리는 한핏줄을 이어받은 한겨레이오

33쪽


불초한 후손들이 제구실을

→ 못난 뒷사람이 제구실을

→ 모자란 우리가 제구실을

35쪽


우리 학계는 그간 묵묵불응(默默不應)이었소

→ 우리 배움밭은 여태 귀를 닫았소

→ 우리 배움판은 그동안 눙쳤소

→ 우리 배움마당은 이제껏 모르쇠였소

37쪽


두 나라는 중국에 속한 변방국가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오

→ 두 나라는 중국에 낀 귀퉁이기 때문이라고 하오

→ 두 나라는 중국에 딸린 구석이기 때문이라고 하오

38쪽


일본어로 씌어진 참고서적들이 많아 여전히 일본어와 인연을 맺고 있소

→ 일본말로 나온 읽을거리가 많아 여태 일본말과 사귀오

→ 일본말로 나온 곁책이 많아 아직 일본말과 어울리오

40쪽


지천명(知天命)을 바라보던 나에게 이방어(異邦語)의 여신(女神)은 연신 두 개의 올가미를 던졌소

→ 구름길을 바라보던 나한테 이웃말 꽃님은 연신 올가미를 둘 던졌소

→ 쉰을 바라보던 나한테 너머말 빛님은 연신 올가미 둘을 던졌소

44쪽


여느 때와 같이 면벽(面壁)했소

→ 여느 때와 같이 담보기 했소

→ 여느 때와 같이 담을 봤소

47쪽


주례가 흔히 하는 구두선(口頭禪)이지

→ 길잡이가 흔히 하는 거드름이지

→ 길라잡이가 흔히 하는 빈말이지

→ 길님이 흔히 하는 말잔치이지

55쪽


자신의 삶에서 무엇으론가 추억되기를 기대하면서 송구영신(送舊迎新)할 것이오

→ 이 삶에 무엇으로 되새기려나 바라보면서 그믐맞이를 할 셈이오

→ 이 삶에 어떻게로 새기려나 두근거리면서 묵은절을 할 셈이오

65쪽


열매를 맺음으로써 비로소 미공(微功)이나마 이루어 놓을 수가 있었던 것이오

→ 열매를 맺으면서 비로소 조금이나마 이루어 놓을 수가 있었오

→ 열매를 맺으며 비로소 보잘것없으나마 이루어 놓을 수가 있었오

75쪽


여로(旅路)의 양식거리로, 발돋움의 발판으로 남아 나를 지탱해주었소

→ 걸어온 밥으로, 발돋움하는 판으로, 나를 버티어 주었소

102쪽


조금씩 장만해놓은 두견주(杜鵑酒, 진달래술)가 있지 않소

→ 조금씩 장만해 놓은 진달래술이 있지 않소

→ 조금씩 장만해 놓은 진달래꽃술이 있지 않소

120쪽


철을 가리지 않고 그대로의 일주(一周)변화에다가 연속 꽃을 피우고 있소

→ 철을 가리지 않고 그대로 돌면서 잇달아 꽃을 피우오

141쪽


나름대로 행사극난(行事克難, 일을 진행하고 어려움을 극복함)하면서 오늘에 이르렀소

→ 내 나름대로 가시밭길을 걸으면서 오늘에 이르렀소

→ 내 나름대로 자갈밭을 걸으면서 오늘에 이르렀소

159쪽


인생이란 단순하게 가감승제(加減乘除)식으로 계산되는 것이 아니라

→ 삶이란 가볍게 네갈래셈으로 따지지 않고

→ 삶길이란 그저 덧뺄나곱으로 셈하지 않고

180쪽


솔직히 말해서 장미의 아름다움이나 멋을 느끼기란 나로서는 정서불급(情緖不及)이었소

→ 털어놓자면 나로서는 아름답고 멋스런 꽃찔레를 도무지 느낄 수 없었소

→ 나로서는 아름답고 멋있는 꽃찔레를 느낄 수 없다고 밝히오

211쪽


밤이면 또 밤대로 흡사 아열대야(亞熱帶夜)를 연상케 하오

→ 밤이면 또 밤대로 불볕이오

→ 밤이면 또 밤대로 덥소

→ 밤이면 또 밤대로 찜통이오

223쪽


작금 심히 우려되는 괴담이설(怪談異說)이 심심찮게 나돌고 있소

→ 요즘 몹시 걱정스레 오싹한 말이 심심찮게 나돌오

→ 요새 무척 근심스레 서늘한 말이 심심찮게 나돌오

242쪽


우리의 전통에 바탕하여 남의 것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우리의 새것을 의욕적으로 창조해나가야 할 것이오. 이것이 이른바 법고창신(法古創新)이오

→ 우리 옛길에 바탕하여 이웃길을 가려서 받아들이고 우리 새길을 씩씩하게 지어야 하오. 이른바 옛길배움이오

→ 우리 살림에 바탕하여 이웃살림을 알맞게 받아들이고 우리 새살림을 기운차게 일궈야 하오. 이른바 새로짓기오

308쪽


※ 글쓴이

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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