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수 스님의 코끼리 - 본래 나로 사는 지혜 용수 스님 시리즈
용수 지음 / 스토리닷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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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시렁 96


《용수 스님의 코끼리》

 용수

 스토리닷

 2019.9.28.



마음이 천당과 지옥을 만듭니다. 행복과 불행은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15쪽)


우리가 이미 완벽하고 신성한 존재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좋은 것을 갈망하고 안 좋은 것을 거부하고 두려워합니다. (31쪽)


‘앞으로 더 열심히 하라’보다는 ‘지금까지 참 잘했네’ 충분히 인정하고 칭찬해 주세요. (43쪽)


자녀들에게 알려주세요. 있는 그대로 괜찮다고, 있는 그대로 좋아한다고요. 바꾸려고 하지 마세요. 바꾸려고 하면 아이는 스스로 가치가 없다고 느낍니다. (86쪽)


남의 마음보다 자신의 마음이 제일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좋아하든 말든 우리 일이 아닙니다. 칭찬하든 비난하든 이미 죽은 사람을 말하듯이 신경 쓰지 마세요. (157쪽)


흙탕물을 가만히 두면 저절로 고요해지고 맑아집니다. (213쪽)



  아무리 흙이 많이 섞였구나 싶은 물이라 해도 가만히 지켜보면 어느새 찬찬히 가라앉습니다. 고요한 물이 되면 흙물 아닌 맑은 물로 바뀝니다. 마음이 어수선하다면 이 어수선한 가닥을 한 올씩 느끼면서 풀어내면 되어요. 서두른다면, 더 바빠게 몰아친다면 어수선한 마음은 자꾸 엉키기만 합니다. 가득 쌓인 빨래나 설거지도 하나씩 하노라면 어느새 끝납니다. 섣불리 “이 많은 걸?” 하고 여기면 제풀에 지치거나 짜증이 일지만 “천천히 하나씩 해야지” 하는 마음이면 사뭇 달라요.


  사전이라고 하는 책을 짓다 보면 처음에는 언제 저 고개를 넘느냐 하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해도 걸리고 세 해도 걸리고 열 해도 걸릴 테지 하고 여기면, 스무 해나 서른 해쯤 걸릴 수 있겠지 하고 여기면, 이 고개가 그리 가파르지 않습니다. 그냥 하는 말은 아닙니다. 저 스스로 서른 해쯤 이 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고개를 꽤 올랐네’ 싶어 곧잘 놀라요.


  이런 마음으로 《용수 스님의 코끼리》(용수, 스토리닷, 2019)를 손에 쥐었습니다. 스님 한 분은 《용수 스님의 곰》이란 책을 여미어 내기도 했어요. 이제 곰에 이어 코끼리를 곁에 두면서 마음읽기를 들려주려 합니다. 숲에서 그 어느 짐승보다 날렵할 뿐 아니라, 숲살이를 모두 꿰뚫는 곰이라고 해요. 더구나 곰은 풀열매를 아주 좋아하고 꿀도 매우 반겨요. 우리는 곰한테서 숲길을 배울 만하지 싶습니다. 덩치가 커서 무서워할 곰이 아니라, 숲에서 슬기롭게 살아가는 길을 배울 수 있달까요.


  코끼리한테서도 이와 같겠지요. 코끼리도 그저 덩치만 큰 짐승이 아니에요. 어른 코끼리는 어린 코끼리를 온몸으로 아끼고 돌보면서 사랑으로 가르친다지요. 그 커다란 덩치를 뽐내는 일이 없이 언제나 넉넉하면서 푸근하게 들판을 아낄 줄 아는 코끼리요, 들살이를 바로 코끼리한테서 배울 만하구나 싶습니다.


  가만히 보면 사람 곁에는 사람을 일깨우거나 타이르는 숨결이 가득합니다. 개미 한 마리도 사람을 일깨울 수 있어요. 파리나 모기도 사람을 깨우칠 수 있습니다. 나비랑 벌 한 마리도 사람을 가르칠 만하고, 작은 애벌레하고 풀벌레도 사람이 배울 만한 대목이 가득해요.


  들풀이 길잡이가 될 만합니다. 들꽃이며 나무 한 그루가 길벗이 될 만해요. 그러니까 들풀을 보면서 ‘들풀도 사람도 똑같이 아름답고 거룩한 넋’인 줄 받아들이는 마음이 됩니다. 들꽃을 보면서 ‘들꽃도 사람도 나란히 어깨동무하는 사랑스러운 숨결’인 줄 받아들이는 마음이 되어요.


  스님 한 분은 《용수 스님의 코끼리》라는 책으로 조곤조곤 속삭입니다. 어려운 경전이나 지식을 머리에 담으려 하지 말라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사랑하면 넉넉할 뿐이라고, 아이들을 타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어른 스스로도 깎아내림질을 거두고 스스로 활짝 기지개를 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남말에 휘둘리지 않기를, 남말에 춤추지 않기를, 이리하여 스스로 가장 사랑스러우면서 고운 말을 입에서 터뜨리며 훨훨 날아오르듯 춤추는 하루가 되기를 바라는구나 싶어요. 아무렴, 이렇게 하면 다 될 테지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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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끼나와, 구조적 차별과 저항의 현장
아라사키 모리테루 지음, 백영서 외 옮김 / 창비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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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시렁 78


《오끼나와, 구조적 차별과 저항의 현장》

 아라사끼 모리떼루

 백영서·이한결 옮김

 창비

 2013.5.31.



애초에 미국이 군사기지에 관한 이러한 제한조건들을 인정할 리도 없었다. (일본정부는) 가장 중요한 점을 애매모호한 상태로 놔둔 채 기정사실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62쪽)


‘국가’에 있어서 ‘영토’라는 것은 그런 것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그것은 결코 그 지역에 사는, 혹은 그곳을 생활권으로 삼는 주민의 이익에 들어맞는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근대적 국제관계를 규정하는 국경이나 영토도 국가의 역학관계나 국제법 이상으로, 그곳에 사는 주민의 자기결정권 내지 인근주민의 생활권으로서 어떤 의미를 가져왔는가를 존중해서 결정해야 하는 시기에 다다른 것이 아닐까. (121∼122쪽)


동일본대지진은 안전신화를 깨부수면서 또 하나의 구조적 차별을 부각했다. 일본(국민)은 오끼나와에 주일미군기지의 압도적 다수를 떠맡기고 ‘허위의 평화’를 향수했을 뿐만 아니라, 토오호꾸 지역의 벽지에 위험한 원자력발전소를 떠맡기고 거기서 얻는 전력으로 ‘허위의 풍요로움’을 향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141∼142쪽)



  서울에 마실을 나와 볼일을 보고서 용산 기차역에 왔습니다. 제가 타려는 열차가 스르르 미끄러지고 문을 엽니다. 짐을 짊어지고 들어섭니다. 갑자기 나프탈렌을 비롯한 소독약 냄새가 훅 끼칩니다. 어지러운 나머지 자칫 쓰러질 뻔했습니다. 두리번거렸지요. 기차에 있는 뒷간 문이라도 열렸나 하고. 그러나 아닙니다. 온 기찻간이 소독약 냄새입니다. 이 냄새를 저 혼자 느끼며 어질어질한지 잘 모르겠는데, 어쩌면 사람들은 이런 소독약 냄새가 흐르기에 ‘기차를 잘 건사하는’ 줄 여기겠네 싶기도 합니다. 소독을 끔찍하게 해댄 나머지 잔벌레나 곰팡이 기운을 냄새로 지워버리는 셈이요, 게다가 사람이 쓰러질 판이지만 말예요.


  《오끼나와, 구조적 차별과 저항의 현장》(아라사끼 모리떼루/백영서·이한결 옮김, 창비, 2013)는 바로 소독약 같은 이 지구별 이야기를 다룹니다. 뜬금없이 웬 소독약 이야기인가 하고 물을 수 있을 텐데요, 소독약이 어떤 구실을 하는지 생각할 노릇입니다.


  소독약은 오롯이 화학약품입니다. 소독약으로 고약한 냄새를 지워낸다고 하지만, 엄청난 화학약품인 이 소독약을 쓰면, ‘소독약 기운’은 고스란히 땅으로 스며들고 냇물로 퍼지겠지요. 자, 소독약을 쓴 물을 그대로 마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먹는 밥에 소독약을 치면 먹을 수 있겠습니까?


  뒷간 오줌그릇에 소독약을 쳐야 오줌내를 지운다고들 하지요. 그런데 말예요, 오줌내를 지울 만한 소독약이라면 더욱 모진 냄새가 날 뿐 아니라, 물이랑 흙을 모두 망가뜨리지 않을까요? 소독약 범범인 기찻간이란, 전쟁무기에 총칼에 탱크에 군함에 잠수함에 전투기에 핵무기가 가득한 이 지구별하고 닮은꼴은 아닐까요?


  왜 오끼나와에 모질게 차별바람이 불었을까요? 왜 오끼나와뿐 아니라 지구별 곳곳은 군사기지 때문에 시름시름 앓는 곳이 있을까요? 그 군사기지는 하나같이 ‘평화를 지킬 뜻’으로 세웠다고 하지만, 막상 군사기지가 있는 터에서 예부터 마을을 이루어 살아온 사람들은 숨이 막힙니다. 소독약범벅인 기찻간에서 숨이 막히고 어질어질하듯, 전쟁무기에 잔뜩 둘러싸인 ‘군사기지 마을이 되고 만 그 보금자리’에서 삶을 이을 사람들은 하루하루 숨이 막힐 뿐 아니라 견디기조차 벅찹니다.


  우리는 왜 군사무기로만 평화를 지키려 할까요? 군대나 군사무기가 아닌 길로 평화를 지키는 생각은 왜 안 하려고 들까요? 저쪽이 움켜쥔 군대나 군사무기를 왜 두려워하면서 우리 스스로 군대나 군사무기를 저쪽보다 더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말까요? 우리가 군대나 군사무기를 저쪽보다 더 키워서 움켜쥐면, 저쪽도 우리하고 똑같이 두려움을 키우면서 우리보다 더 센 군대나 군사무기를 갖추려고 악을 쓰지 않을까요?


  오끼나와가 오끼나와가 되는 길이란, 남북녘이 아름답고 사랑스레 어깨동무를 하는 길이란, 뜻밖에 매우 쉬울 수 있습니다. 두 나라뿐 아니라, 일본도 중국도 러시아도 미국도 한꺼번에 군대랑 전쟁무기를 내려놓도록 ‘두 나라 + 네 나라’ 우두머리가 ‘전쟁무기와 군대 없애기 모임’을 꾸리면 첫발을 뗄 수 있겠지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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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미스터 최 - 사노 요코가 한국의 벗에게 보낸 40년간의 편지
사노 요코.최정호 지음, 요시카와 나기 옮김 / 남해의봄날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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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시렁 94


《친애하는 미스터 최》

 사노 요코·최정호

 요시카와 나기 옮김

 남해의봄날

 2019.7.5



당신은 왜 일본에 대한 정보를 아사히신문 같은 얌전한 매체에서 얻으려고 하십니까? 그런 신문은 진실을 전혀 보도하지 않습니다. 고급 신문이 진실을 보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실 테니 부디 그런 것만 보지 마시고 저속한 주간지나 스캔들만 쓰는 삼류 잡지를 잘 보시기 바랍니다. 영화도 예술제에 출품한 고상한 작품만 보지 마시고 무협이나 조폭 나오는 걸 보세요. (54쪽/사노 요코 1971)


여기에서 즐거운 것은 요코 씨 편지를 받는 것과 언론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는 것뿐이에요. 유럽에 와도 우리나라 사람들과는 마음 놓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99쪽/최정호 1981)


이봐요, 미스터 최, 독일에 있을 때 저는 깨달았어요. 왜 독일이 철학자를 많이 배출하는지를. 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서 그 문제를 생각한 거예요. (103쪽/사노 요코 1981)


다니카와 데쓰조 선생님의 서재를 구경한 것은 저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됐습니다. 저는 그때 처음으로 한국인이니 일본인이니 하는 아집을 떠나서 위대한 석학의 생전 모습을 마음속에 그려 볼 수 있었습니다. (146쪽/최정호 1991)


진정한 국제 친선은 나라와 나라가 하는 게 아니라 개인과 개인이, 욕하면서 같이 술을 마시고 밥을 먹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한 명이 한 명을 담당하면 충분할 것 같아요. (149쪽/사노 요코 1991)



  요즘 우리는 손전화를 쥐고서 손가락으로 톡톡 누리면 아무리 멀리 있어도 1초 만에라도 쪽글을 띄울 수 있습니다. 때로는 쪽글뿐 아니라 긴글을 보낼 수 있고, 온갖 그림이나 사진까지 날릴 수 있어요.


  무척 손쉽게 쪽글이며 긴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오늘날, 우리는 손전화에다가 셈틀로 얼마나 마음을 담은 이야기를 서로 띄우고 받을까요. 손쉽게 주고받을 수 있기에 더 알뜰살뜰 마음을 나눌까요, 아니면 가볍게 주고받다가 잊어버리는 글자락이 될까요.


  마흔 해라는 나날이 넘도록 바다를 사이에 두고 글월을 주고받은 두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마흔 해를 넘는 동안 주거니 받거니 한 글월은 쉰 자락이 살짝 안 된다고 합니다만, 두 사람 사이에서 글월 하나에 담아서 나눈 마음은 매우 깊으면서 넓으리라 생각해요. 더 많이 주고받아야 더 깊거나 넓게 나누는 마음이지는 않거든요. 글월 한 자락마다 온마음을 싣고 온사랑을 실어요. 짧게 적바림한 엽서 한 자락에도 온꿈이며 온숨결을 담습니다.


  글월꾸러미 《친애하는 미스터 최》(사노 요코·최정호/요시카와 나기 옮김, 남해의봄날, 2019)는 진작에 책으로 묶으려 했답니다. 일본에 사는 사노 요코 님은 굳이 ‘허접한 내 글월 따위를 읽고 싶을 사람이 있겠느냐?’며 너털웃음이었다고 하는데, 한국에 사는 최정호 님은 ‘그대가 띄운 글월이야말로 놀라운 빛이며 숨결이 싱그럽게 춤추니, 이 글월을 나 혼자서 누릴 수 없다!’고 여겼답니다.


  그런데 이 글월꾸러미는 사노 요코 님이 눈을 감고서 한참 뒤에야, 그러니까 2010년에 사노 요코 님이 눈을 감았으니 얼추 열 해가 지나서야 비로소 책 하나로 태어납니다.


  글월자락을 천천히 읽습니다. 한 자락을 읽고서 책을 덮습니다. 며칠 뒤에 다시 한 자락을 읽고 또 책을 덮습니다. 이렇게 읽고 덮고 하노라니 한 달 두 달 지납니다. 그러나 아무리 더디 읽는다 하더라도 두 달이면 다 읽어냅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 마흔 해를 넘는 애틋한 마음이 흐르던 글월자락도 책으로 묶어 놓으니 참으로 한숨에 읽어낼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제 마음에 흐르는 소용돌이를 바라봅니다. 두 사람은 오직 서로를 바라보며 글월을 적었습니디만, 이 글월은 이제 두 사람 아닌 누구나 바라보는 이야기가 되고, 누구나 새삼스레 그날 그곳, 이를테면 1971년 어느 날 어느 곳이라든지, 1981년 어느 날 어느 곳을 어림하는 발판이 됩니다.


  그때 한국에서는 이렇게 마음앓이를 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무렵 일본에서는 엉터리 일본 정치에 이렇게 날선 목소리로 나무라는 사람이 있었군요. 군사독재에 입도 벙긋하지 못하던 숨은 눈물이 흐르고, 이웃나라에 군사독재가 있는 줄 생각조차 못했다는, 더구나 제국주의 강점기라고 하는 슬픈 사슬을 학교에서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고 털어놓는 그림님이 있습니다.


  모든 삶은 발자취입니다. 대통령 같은 사람들이 보낸 몇 해만 발자취이지 않습니다. 수수한 사람들이 얼키고설키면서 길어올리는 자그마한 이야기도 발자취입니다. 어쩌면 아주 수수한 사람들이 따사롭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주고받은 글월자락이야말로 길이길이 남기면서 새로운 빛을 바라보는 길동무로 삼을 만하지는 않을까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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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갈리아의 딸들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지음, 히스테리아 옮김 / 황금가지 / 199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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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시렁 89


《이갈리아의 딸들》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히스테리아 옮김

 황금가지

 1996.7.1./2016.12.1. 고침판



“자기가 되고 싶은 것이 될 수 없는 것이 더 삭막하고 짜증 나는 일이에요!” (13쪽)


페트로니우스는 불편한 신발을 벗고 둥근 바위 위로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바위는 다뜻했다. 공기보다 더 따뜻했다. 정말 사람들은 항상 맨발로 살아야 한다. 신발은 발을 너무 꽉 조이기 때문에 지나치게 꼭 맞으면 발이 까지기도 한다. (89쪽)


그들은 서로 박자를 맞춰 움직이고 있었다. 세 번째 움은 뒤에 앉아서 그의 허리를 잡고 있었다. 이 악몽이 얼마나 오래 계속될까? (94쪽)


“난 정말로 내가 무슨 가치가 있나 의심스러워져요. 난 그저 주방용 기구처럼 항상 집에 있는 거예요.” (153쪽)


그것은 맨움용 광대 복장이었고 맨움의 다른 옷처럼 우스꽝스러웠다. 어째서 물속에서조차 광대가 되어야만 하지? (160쪽)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알 수 없기 마련입니다. 목소리가 생긴 뜻이 있지 않을까요? 사람들이 살아가는 터전마다 말소리가 다릅니다. 나라나 겨레마다 말소리가 다르기도 하지만, 같은 나라에 같은 겨레라 하더라도 고장마다 말소리가 달라요. 고장이라는 터전은 어디나 다르니 말소리도 마땅히 다를 테지요.


  다 다른 말소리란, 다 다른 삶소리란 뜻이라고 느낍니다. 다 다르게 짓거나 누리거나 가꾸는 삶에 맞추어 다 다른 말이 태어나고 흐릅니다.


  사내가 내는 목소리하고 가시내가 내는 목소리가 다릅니다. 마땅하지요. 사람이라는 목숨으로는 같으나, 결이 달라요. 그런데 결만 다르다면 소릿결만 다를 텐데, 숨결뿐 아니라 삶결이 다르지요. 사내랑 가시내 사이에서는 억누르거나 억눌리는 삶결이 엇갈렸습니다.


  《이갈리아의 딸들》(게르드 브란튼베르그/히스테리아 옮김, 황금가지, 2016)은 두 사람, 바로 가시내랑 사내 사이에 엇갈린 삶결을 확 뒤집는 얼개로 이야기를 폅니다. 곰곰이 보자면 이 문학책은 두 가지를 드러내려고 했지 싶어요. 첫째, 이 책을 읽는 이들이여, 거북하게 느껴라! 왜냐하면, 이 줄거리가 안 거북하다면, 오늘날 이 삶터도 안 거북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둘째, 이 책을 읽는 이들이여, 뭔가 바꿔야 하지 않니? 왜냐하면, 뭔가 바꿔야겠다고 느끼지 않는다면, 이 거북한 얼개를 그대로 떠안고 그대로 살아야 한다는 뜻일 테니까요.


  가시내가 광대 차림으로 살아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가시내가 어떤 차림새로 살든 구경거리로 쳐다봐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사내도 매한가지이지요. 사내가 어떤 차림새로 살든 광대나 구경거리가 될 까닭이 없습니다. 이쪽 사람이 저쪽 사람을 억누른다든지, 거꾸로 저쪽 사람이 이쪽 사람을 억눌러야 할 까닭이 없어요.


  《이갈리아의 딸들》은 목소리가 없는 어수선판에서 목소리를 내기에 뜻있습니다. 다만, 목소리는 내되 이다음길까지는 짚지 않거나 못합니다. 마땅하지요. 문학책 하나가 뒷길까지 모조리 짚어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 우리가 새롭게 가꿀 이다음길이나 뒷길은 바로 우리 스스로 생각을 바꾸고 목소리를 내어서 지어야지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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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선 - 김지연 사진 산문
김지연 지음 / 열화당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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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시렁 87


《전라선》

 김지연

 열화당

 2019.6.10.



서울의 부암동 숲이 손질이 잘된 비단옷 같은 느낌이었다면 전주의 건지산 길은 무명이나 삼베 옷 같았다. (18쪽)


미카엘 수녀님은 아침에 휴대폰으로 찍은 수많은 사진들을 내게 보여주었다. 구름과 꽃과 나비…… ‘아름다운 것’들을 보는 대로 다 찍었고 그것을 보여주면서 기분이 들떠 있었다. (24쪽)


나는 그이가 나온 페이지를 펼쳐 보였다. “아, 풍신나게 생겼네.” 그이는 자기 모습을 보며 쑥스러워했다. 내가 보기에는 지금보다 훨씬 예쁜데 말이다. 그이는 “붕어빵을 좀 많이 구워 놨더라면 사진이 보기가 더 좋았을 텐데” 하며 아쉬워했다. (84쪽)


아이의 예쁜 손가락에는 요즘 보기 드문 꽃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들이 돌아가는 길에 대문 앞에서 손을 흔들었더니 한 아이가 달려와서 내 손에 사탕 두 알과 초콜릿 과자 하나를 쥐여 주고 달아났다. (231쪽)



  전라도에서 열 해 즈음 살면 ‘전라사람’이 될까요? 전라도에서 나고 자라야 비로소 ‘전라사람’일까요? 전라도에서 나고 자랐으나 일찌감치 이 고장을 떠났으면 그이는 어떤 사람일까요?


  저는 인천에서 나고 자랐습니다만 열아홉 살에 그 고장을 떠났습니다. 한동안 인천으로 돌아가서 몇 해를 살았는데요, 아무튼 그 고장에서 나고 자랐으니 저는 오늘 전라도에서 열 해 즈음 살았더라도 ‘전라사람’ 아닌 ‘인천사람’일까요?


  서울이란 고장에서 열 해쯤 산 적이 있는데, 그때에 저는 ‘서울사람’이었을까요? 군대를 강원도에서 보냈으니, 군인으로 지내던 나날은 ‘강원사람’인 셈일까요? 제가 앞으로 경상도로 삶터를 옮긴다면 그때에는 어느새 ‘경상사람’으로 바뀔까요?


  《전라선》(김지연, 열화당, 2019)을 읽다가 ‘전라도’라는 이름을, 또 전라도라는 터를, 또 전라도뿐 아니라 경상도에 강원도에 충청도에 경기도에 인천에 서울에, 갖가지 고장 이름을 혀에 살짝 얹어 봅니다.


  나고 자란 이라면 고작 어린 날 두어 해를 살았어도 ‘그 고장 사람’이라 하기 일쑤요, 쉰 해나 예순 해를 어느 고장에서 살았어도 그 고장에서 나고 자라지 않았다면 ‘그 고장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왜 이렇게 금을 긋는지 모르겠습니다. 금을 굳이 그어야 하는가도 아리송합니다. 어느 고장이든 아름다운 숨결이 흐를 테고, 어느 마을 어느 기찻길이나 버스길이나 들길이나 숲길에도 사랑스러운 손길이 닿을 텐데요.


  사라진 기차역을 떠올리는 김지연 님은, 사진으로 남은 아스라한 이야기하고 오늘 코앞에서 마주하는 새로운 이야기를 맞물려 놓습니다. 까르르 웃던 먼먼 옛날 아이들하고 쿡쿡쿡 웃고 뛰노는 오늘날 아이들을 나란히 마주하면서, 둘 사이에 흐르는 따스한 기운은 뭘까 하고 스스로 물으면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전라도도 경상도도 모두 아름다운 고장으로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모든 고장이 사이좋게 어깨를 겯으면서 함께 피어나면 좋겠습니다. 높거나 낮거나 크거나 작은 금을 모두 털어내고, 오붓하게 수다를 하며 뛰노는 마을길을 누리면 좋겠습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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