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책·삶·글


 새벽에 글을 써서 누리집에 걸칠 때에 느낌이 좋다. 새벽 두 시나 세 시나 네 시 무렵이라는 시간이 새겨질 때에는 무언가 새삼스럽다. 글을 마치면서 내 글 끄트머리에 날짜를 적바림하지만 시간까지는 적지 않는다. 누리집에 글을 걸칠 때에만 몇 시 몇 분에 걸치는 글인가 자국이 남는다.

 생각해 보면, 글을 쓰고 난 다음에 시간을 함께 적으면 한결 새삼스러울 수 있겠구나 싶다. 내가 어느 때에 이렇게 생각하거나 마음을 쏟으면서 이야기 하나 풀어냈는가를 더듬는 보람이 있을 테니까.

 그러나, 굳이 몇 시 몇 분 글이라고 안 밝히더라도 내 글에 이러한 때가 살포시 묻어나도록 하면 넉넉한 일인지 모른다. 시시콜콜 밝혀 적어야만 알 수 있다면, 이런 글을 글이라 할 수 있는가. 지식쪼가리나 정보조각일 뿐 아닌가. 글이란 삶인데, 삶을 몇 년 몇 월 몇 일 몇 시 몇 분이라는 숫자놀음으로 밝힐 수 없다.

 가만히 보면, 삶이란 책으로 알아채거나 읽을 수 없다. 책을 더 읽는다고 더 빼어난 삶이 아니고, 책을 덜 읽는다고 모자란 사람이 아니다. 책을 가까이한다 해서 아름다운 삶이 아니요, 책하고 동떨어진 채 일한대서 못난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애써 책을 말해야 할 까닭이 있는가. 애써 책을 생각하거나 돌아볼 값어치가 있을까.

 책은 그예 책이기도 하지만, 책은 사람이기도 하다. 책은 종이뭉치이면서 삶이기도 하다. 사람은 고운 목숨이기도 하나, 숱한 이야기보따리이기도 하다. 사람은 삶이면서 죽음이다. 책을 보며 사람을 느끼고, 사람을 느끼며 책을 읽는다. 책을 읽는 가운데 사람 삶을 돌아보고, 사람 삶을 돌아보다가는 책을 살핀다.

 책 하나는 고운 이웃이다. 이웃사람 또한 고운 책이다. 책이란 살가운 이야기꽃이다. 이야기꽃은 살가운 사람한테서도 마주한다. 책은 온통 사랑이다. 이웃한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 또한 온통 사랑이다. 책에는 하느님이 깃들고, 하느님한테는 책이 깃든다. 우리 아이한테도 하느님이 깃들며, 우리 옆지기한테도 하느님이 자리한다. 더 많은 책을 읽거나 더 많은 글을 쓰자는 삶이 아니라, 더 많이 사랑하거나 아끼거나 믿거나 보살필 꽃과 열매와 꿈과 이야기가 어우러질 삶을 살펴야겠다고 다짐한다. (4344.1.17.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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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해 앞서 쓴 글을 되읽습니다. 일곱 해 앞서하고 오늘하고 제 생각이나 삶은 다르지 않습니다. 혼자만 건사하기보다, 이렇게 올려 놓고 함께 읽고 싶습니다.)



 책을 말하는 책을 사서 읽다가


 저도 언젠가는 ‘책을 말하는 책’을 한 권 펴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잘나서 이런 책을 내고프지는 않아요. ‘책을 말하는 책’이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채 읽히기 때문입니다. ‘책을 말하는 사람’들이 보는 책이 너무 한편으로 기울어진 채 울타리가 드높기 때문입니다. 사상과 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서양사상과 서양철학에 너무 기울어진 한편, 번역을 보는 눈도 참 낮습니다. 모든 책이 말로 이루어지고 모든 사상과 철학을 말로 나눈다는 대목을 살핀다면 말을 얼마나 알맞고 제대로 쓰느냐는 무척 큰 대목입니다. 그러나 글쟁이나 지식인이 쓰는 ‘어렵고 딱딱한 말’로만 사상과 철학을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이 좁다란 마음이 슬프고 딱합니다.

 ‘책을 말하는 책’을 가만히 보면, 어린이책은 거의 빠지기 일쑤입니다. 더러 어린이책을 한두 권쯤 다룬다고 해도 얕잡아보기 일쑤입니다. 제대로 모르거나 여느 때에는 눈길마저 안 두니까요. 사진책이나 그림책이나 만화책을 제대로 살펴보고 애틋한 눈길로 이야기하는 책도 드뭅니다. 이런 책은 그저 몇몇 전문가들만 당신들끼리 아는 말과 이야기로 글을 쓸 뿐입니다. 그러니 이런 책을 즐길 수많은 사람들 앞에 더욱 높은 울타리가 쳐지는 셈입니다.

 엊그제 《강유원-책》(야간비행,2003)과 《서경식-소년의 눈물》(돌베개,2004)을 사서 조금씩 읽습니다. 《책》은 쓸데없는 군소리가 너무 많군요. 《소년의 눈물》은 출판사에서 편집 장난을 친 탓에 책값이 터무니없이 비쌀 뿐더러 번역이 참 어설픕니다. 원고지로 500장을 겨우 넘길까 말까 한 조그마한 책인데 쪽수를 부풀려 만 원짜리로 만들어 버리는 ‘옛날 인문사회과학출판사’ 모습에 눈물이 핑 돌 뿐입니다. 돈 좀 벌었나요. 그래서 눈이 풀렸나요. 아니면 돈에 눈이 멀어 눈이 풀렸나요.

 강유원 님은 한결 재미나고 신나게 책 이야기를 펼칠 수 있었습니다. 김규항 님은 강유원 님 책을 두고 “신문기자들이 보기에 아주 기분 나빠할 책”이지 않겠느냐며 즐겁게 웃는데, 정작 소담스레 돌아볼 대목이란 ‘신문기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독자’를 생각해야 합니다. 신문기자가 이렇게 보건 저렇게 보건 아랑곳할 일이 아닙니다. 독자인 우리들, 책손이자 책을 즐기는 우리들이 우리 삶으로 어떻게 바라보며 곰삭일 만한 책인가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김규항 님 말마따나 《책》이라는 책은 신문기자나 전문서평가라고 이름을 내미는 사람들한테는 ‘한방 먹이는 책’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조촐하고 털털하게 책을 좋아하는 독자한테는 ‘껄끄럽거나 말이 지나친 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긴, 이런 책도 있긴 있어야 하는데, ‘책을 말하는 책’이 너무 비좁고 치우친 채 막상 파고들어야 할 속살과 따숩게 보듬어야 할 수수한 삶하고는 동떨어졌다 보니 《책》이란 책이 책다운 제구실을 얼마 못한다는 생각까지 드는군요.

 책을 말하는 책이라면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조금 더 책을 좋아하거나 넓은 눈으로 책을 볼 수 있도록 이끌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한테는 ‘책을 보는 일도 그 나름대로 뜻이나 재미가 있겠군’ 하고 느끼면서 집어들 수 있도록 이끌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한테 ‘나한테는 썩 달갑거나 좋은 책은 아니지만, 나 아닌 다른 사람한테는 도움이 되거나 좋을 수 있다’는 생각을 품게끔 이끌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농사를 짓는 마음으로 책을 읽고,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마음으로 책을 말할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농사는 골고루 지어야 하고, 일과 놀이가 하나로 어우러지며 따로 쉬는날 없어도 즐겁게 일하고 즐겁게 놀듯 책을 말할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고단한 하루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또 고단한 일을 살짝살짝 쉬며 담배 한 개비 피워무는 때에 뒷주머니에서 꺼내어 읽을 수 있듯 책을 말할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일이 놀이 같으면 힘들지 않고 따로 쉴 까닭이 없답니다. 놀이가 고된 일 같으면 즐길 수 없으나, 일이 놀이이며, 놀이가 일이 된다면 이때에는 삶입니다. 책읽기는 어떨까요. 일인가요, 놀이인가요. 일이자 놀이인가요. 버스에서도 읽고 전철에서도 읽으며 방구석에서도 읽다가는 공원에서도 읽는 한편, 밥 먹고 난 뒤에도 읽는다면 그야말로 우리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대목을 눈여겨보고 싶습니다. ‘삶이 되는 책’, ‘밥과 같은 책’, ‘물과 바람과 햇볕과 같은 책’을 말하고 싶고, 우리가 즐기는 책이란 바로 이렇게 내 삶으로 어우러질 수 있는 즐거움을 담아야지 싶습니다. 책을 말하는 책도 그렇고요. 온갖 책을 다 읽거나 고전이라는 책까지 두루 읽거나 새로 나오는 좋은 책을 틈틈이 찾아서 읽거나 헌책방에 묻힌 책을 두 손에 시커먼 먼지를 묻혀 가면서 캐내는 일도 좋습니다. 이런 일을 하면서 내 삶을 찾을 수 있다면 어떠한 책읽기이든 좋고 어떠한 책을 집어들든 좋습니다.

 내 삶을 찾지 않는 책읽기는, 하기 싫어도 억지로 해야 하는 일이라고 봅니다. 내 삶을 찾는 책읽기는 밤늦게까지 일을 해도 몸이 고단하지 않고, 오히려 신나는 일이라고 봅니다. 책을 읽다가 밤을 꼬박 새기도 하지요? 그렇지만 마음은 맑고 깨끗합니다. 책을 읽다가 그냥 잠이 들고 하품이 쏟아지는데에도 끝까지 읽어야 하나요? 이럴 땐 얼마나 괴롭습니까? 우리는 책을 읽다가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날이 새는 줄 모르며, 배가 고픈 줄 모를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그저 재미가 있는 책이라서가 아닙니다. 내 몸과 마음을 살피거나 돌아보는 한편, 우리 삶을 하나하나 찾아나가는 책읽기이기 때문입니다.

 나 또한 책을 말하는 책을 펴내고 싶다는 생각은 여기에 뿌리를 둡니다. 우리 삶을 넓고 깊이 돌아보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나날을 느끼고 살피며 헤아리기도 하고 기다리기도 하면서 즐기는 일에 뿌리를 둡니다. 책 하나가 모든 것이 아닙니다만, 책 하나로 여태껏 뜨지 못한 눈을 새롭게 뜰 수 있습니다. 책이 길을 열어 주지 않습니다. 책을 읽은 우리 스스로 길을 열어젖힐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갖춥니다. 책을 읽은 우리 스스로 새길을 열고 가시밭길 또한 헤쳐 나가면서 내 삶을 가꿉니다.

 책을 말하는 일이란, 내 넋과 꿈과 사랑을 말하는 일입니다. 우리 삶을 말하는 일입니다. 우리를 둘러싼 모두를 말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사회라든지 제도라든지 문화라든지 정치라든지 경제라든지 자연이라든지 환경이라든지 가리지 않고 하나하나 살펴보고 말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일을 하는 저부터 즐거울 수 있다고 봐요. 이런 일을 즐겁게 해낸다면, 제가 이룬 열매를 즐길 분들도 즐거울 수 있을까요. 즐거울 수 있겠지요. 그래서 나는 부지런히 애쓰고 힘을 모아서 책을 말하는 책 한 권 꼭 펴내고 싶습니다. (4337.10.20.물.처음 씀/4344.1.13.나무.글투 다듬음.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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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읽는 이 손에 걸레를


 ㄱ. 책만 읽는 바보가 되지 않게 애쓰기.
 ㄴ. 책만 아는 도깨비가 되지 않게끔 마음쓰기.
 ㄷ. 책만 찾는 기계가 되지 않도록 용쓰기.



 어릴 적부터 책을 즐겨 읽거나 많이 읽거나 아주 좋아하는 아이가 있다면 틈틈이 손에서 책을 빼앗을 줄 알아야 한답니다. 책을 빼앗은 손에는 걸레나 빗자루나 낫이나 호미나 쟁기를 쥐어 주어야 한다더군요. 걸레로 방을 훔치고 비로 집안 구석구석을 쓸도록 일을 시켜야 한다지요. 낫으로 풀을 베거나 호미로 김을 매거나 쟁기로 논밭을 갈도록 시켜야 한대요. 빨래를 한 아름 품에 안겨 아이가 입은 옷, 이 가운데 적어도 양말과 신발쯤은 제 손으로 빨도록 시켜야 한다더라고요. 아이가 먹은 밥그릇과 수저는 마땅히 아이 손으로 설거지를 하도록 시켜야 좋다고 해요.

 이렇게 하지 않고 책만 딥다 파면, 책만 좋아라 읽는다면, 이 아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면서 큰다지요. 삶을 놓치거나 느끼지 못한다지요.

 고시 공부를 하는 분들을 생각해 봅니다. 고시 공부를 하는 분 삶을 보면 엉망이기 일쑤입니다. 당신 삶뿐 아니라 식구나 이웃 삶도 엉망이에요. 오로지 이 한 사람을 뒷배하느라 둘레에 있는 모든 사람 삶을 다 바쳐야 합니다. 그런데 애써 숱한 사람들 땀방울을 들여 고시에 붙었달지라도 삶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공무원이 되어 쇠밥그릇을 마련할 뿐, 오롯이 꾸리는 삶으로 거듭나지 않습니다. 이제, 공무원이 되었으니 손수 밥하고 빨래하며 살림하는 매무새를 기르지 않습니다. 삶을 깨우치는 공부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예 돈 잘 버는 도깨비나 기계로 머물 뿐, 사람을 사랑하거나 삶을 믿는 착한 넋을 보살피지 못해요. 이제는 교사가 되는 이 또한 됨됨이를 갖춘 교사가 아니라 지식만 갖춘 교사 굴레에서 허덕입니다. 책 읽는 사람뿐 아니라 책 만드는 사람마저 도깨비나 기계 테두리에서 맴돕니다.

 이 나라 수많은 똑똑한 사람들은 머리에 담은 지식으로는 똑똑하지만, 손을 쓰거나 몸을 쓰거나 마음을 쓰면서 어깨동무하는 데에까지 똑똑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웃을 헤아리거나 동무를 보살피거나 살붙이를 아끼는 데에는 얼마나 똑똑한지 알쏭달쏭합니다.

 운동을 잘 하는 아이나 어른 들은 운동을 참 잘합니다. 야구이든 축구이든 농구이든 배구이든 골프이든 수영이든 피겨스테이팅이든 참 잘합니다. 그러면 이들 운동선수는 운동경기 말고 다른 자리에서는 당신 삶을 얼마나 잘 꾸리는가요.

 크나큰 도시에서는 틀림없이 돈으로 살아갑니다. 돈으로 밥을 사고 집을 사며 옷을 삽니다. 동무를 만나도 돈을 쓰고 어버이를 모셔도 돈을 쓰며 학교를 다녀도 돈을 씁니다. 돈이 없이는 도시에서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아니, 돈이 아니고서야 도시에서 살아남을 길이 없습니다. 아주 드물게 몇몇 사람은 돈이 아니고서도 도시에서 살아남을 테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한테는 돈보다 보배로울 삶이란 없습니다. 이리하여 도시사람한테는 돈을 조금은 멀리하면서 책을 살짝이나마 가까이해야 한다 말할는지 모릅니다만, 제아무리 돈밖에 모른다는 도시사람한테도 책보다는 걸레랑 호미랑 쟁기를 쥐어 주어야지 싶습니다. 돈만 아는 사람한테 책을 쥐어 준대서 삶을 스스로 아름다이 일구는 뜻을 헤아리거나 깨달을 수 없다고 느낍니다.

 책만 읽는 바보 아닌, 돈만 바라는 바보 아닌, 삶을 헤아리는 살림꾼이 되도록 이끈다면 참 좋겠지요. 책만 아는 도깨비 아닌, 돈만 아는 도깨비 아닌, 삶을 아는 마음벗이 되도록 돕는다면 아주 기쁘겠지요. 책만 찾는 기계 아닌, 돈만 찾는 기계 아닌, 삶을 찾는 목숨붙이가 되도록 어깨동무를 한다면 몹시 고맙겠지요.

 아이한테 책과 함께 걸레랑 호미랑 짐꾸러미를 쥐어 줍니다. 아이와 함께 밥을 먹고 책을 읽으며 집안을 치웁니다. 아이가 신고 벗는 신발을 스스로 가지런히 놓도록 이끌고, 아이 앞에서 어버이부터 말씨를 곱게 가다듬습니다. 아이와 손을 맞잡으며 멧길을 걷고 아이를 품에 안으며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때때로 자동차를 얻어 탈 때면 앞만 보아야 합니다. 자동차를 타면서 하늘을 올려다본다든지 바깥이 얼마나 덥거나 추운지 느끼기 힘듭니다. 자동차를 달리면 길에 밟혀 죽는 작은 목숨을 알아챌 수 없고, 온 들판 가득한 풀과 꽃과 나무한테 말을 걸지 못합니다.

 바람소리와 새소리와 물소리를 담은 책이 더러 있을 테고, 요사이는 꾸준히 나오기도 합니다. 바람소리를 담을 수 있는 책이란 아주 훌륭합니다. 새소리 깃든 책이란 매우 빼어납니다. 물소리 흐르는 책이란 참말 대단합니다. 그런데, 바람소리는 책 아닌 우리 마을에 있습니다. 새소리는 멧자락 어디에나 있습니다. 물소리는 골짜기와 냇물 가에서 마주합니다. 삶과 삶터가 있어 책과 지식이 있습니다. (4335.7.2.처음 씀/4344.1.11.불.고쳐씀.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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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1-12 21:23   좋아요 0 | URL
ㅎㅎ 좋은 글입니다^^
 



 집 도서관


 내 집이 곧 도서관이다. 내가 읽어 내 집에 갖춘 책이 바로 도서관이다. 나는 내 집에 갖춘 책을 새로 읽고 다시 읽으며 거듭 읽는다. 내 아이는 내 집에 갖춘 내 책을 보면서 자라고 크며 생각한다. 내 아이는 제 어버이가 갖춘 책을 좋아해서 이 집 이 도서관 울타리에서 무럭무럭 클 수 있는 한편, 나중에 제 도서관과 제 집을 따로 마련하여 새로운 집과 도서관을 일굴 수 있겠지. 이 조그마한 집 도서관으로도 얼마든지 흐뭇할 만하고, 이 조그마한 집 도서관은 너무 초라하거나 모자랄 수 있다. 어떻든, 이 집 도서관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기쁘게 즐기면 넉넉하다. 집 도서관이 초라하대서 집 도서관에 갖춘 책이 덜 떨어지거나 못날 까닭이 없다. 집 도서관에 갖춘 책이 몇 안 된대서 이 책들이 읽을 값어치가 없을 수 없다. 내 집 도서관에서는 나부터 내 집 도서관을 사랑하며 책을 갖추고, 나중에 내가 이 집 도서관을 떠나 흙으로 돌아가면, 내 아이가 집 도서관을 물려받아서 ‘내 아이로서는 제 어버이가 살던 때가 아니면 살 수 없던 책’을 살필 수 있다. 어버이 된 사람으로서는 어버이로서 살아가며 책을 살 때에는 언제나 ‘나는 흔히 보는 책’이지만 ‘아이는 나중에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책’을 사서 읽는다고 느껴야 한다. 나부터 내가 오늘 읽을 책이면서 내가 먼 뒷날 흙으로 돌아가기 앞서 새삼스레 돌아볼 만한 책을 내 집 도서관에 갖추어야 한다. (4344.1.7.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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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책을 말할 자유


 집식구가 둘째를 배어 여러 달째 집에서 뜨개질을 하면서 몸과 마음을 다스린다. 집식구가 뜨개질을 하니 저절로 수많은 뜨개책을 사서 모으고 읽는다. 옆지기가 뜨개책을 산다고 하기 앞서부터, 나는 그동안 헌책방을 다니고 책마을 일꾼으로 일하면서 ‘한국 뜨개책이란 한 가지도 없는’ 줄 알았다. 굳이 옆지기한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다. 옆지기 스스로 뜨개책을 찾아보면 다 알 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나라안에서 나온 뜨개책이든 나라밖에서 나온 뜨개책이든 몇 백 권 사들였다. 한국에서 나온 뜨개책은 모조리 일본 뜨개책을 베꼈다. 사람들이 잘 모르기도 하지만, 뜨개질에서 쓰는 말 가운데 옳게 우리 말다이 쓰는 말이 퍽 드물다. 인터넷모임을 꾸리며 뜨개질을 나누는 사람들은 일찌감치 알아챈다. 스스로 뜨개질을 해 보니, 한국말로 된 마땅한 한국책이 한 가지도 없어, 다들 영어로 된 책을 나라밖에서 사다가 읽거나 일본말로 된 책을 사서 읽는다. 어려운 영어나 일본말을 몇몇 사람들이 고맙게 번역해 주어 뜨개질 실마리를 나누기도 한다.

 한국에서도 예부터 뜨개질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뜨개질이 있다 하여도 ‘뜨개 교본’은 한 가지도 없었을 뿐더러, 온갖 무늬를 넣어 하는 뜨개법이란 없다. 이 모든 뜨개법은 나라밖에서 들여온다. 그리고, 일본을 거쳐서 들어오기 일쑤이다. 지난날이든 오늘날이든 뜨개 교본은 일본 뜨개 교본에서 베끼거나 번역을 한다.

 옆지기는 첫째를 배었을 때까지 종이접기를 즐겨 했다. 종이접기를 하던 옆지기는 ‘종이접기 책’ 또한 한국책은 한 가지도 없는 줄 일찍부터 알았단다. 아무렴. 한국사람이 즐긴다는 종이접기는, 가만히 보면 그냥 종이접기가 아닌 ‘일본 오리가미’이기 일쑤이다. 한국에서 나오는 종이접기 책은 거의 모두 일본 ‘오리가미’ 책을 번역하거나 몰래 내놓는 도둑책이다.

 피아노 교본은 어떠할까? 교과서는 어떠한가? 사진책은 어떠하지? 문고판은 어떠했는가? 수많은 세계문학전집과 추리문학전집은 어떠했는가? 이 나라 책 가운데 일본책한테서 배우거나 훔치지 않은 책이란 몹시 드물다. ‘순수 창작 문학’이라는 책 아니고는 한국책이라 할 만한 책이란 없다시피 하다. 과학책이고 대학교재이고 다르지 않다. 전문서적이든 학술서적이든 매한가지이다. 역사책조차 일본책에 기대 온 나날이 대단히 길다. 역사 연구는 한국사람보다 일본사람이 더 깊고 넓게 해 왔고, 아직도 이 틀은 달라지지 않는다.

 일본이 잘났고 한국이 못났대서 이러한 이야기를 끄적이지 않는다. 삶을 삶대로 바라보고 책을 책대로 껴안는 가운데, 이 땅에서 우리 스스로 우리 깜냥껏 우리 슬기를 빛내어 나아갈 길을 찾고 즐겨야 하니까 이러한 이야기를 끄적인다.

 이제부터라도 참다운 ‘한국 뜨개책’을 누군가 쓰면 훌륭하다. 이제부터라도 즐겁게 ‘한국 종이접기책’을 누군가 엮으면 아름답다. 대원사에서 펴내던 “빛깔있는 책들”이 있기 앞서, 일본에서는 “칼라 북스”가 있었다. “빛깔있는 책들”은 “칼라 북스”한테서 배우거나 흉내냈다 할 만하지만, 한국땅 대원사 “빛깔있는 책들”은 짜임새와 꾸밈새를 한국답게 어루만져서 내놓았다. “칼라 북스” 같은 책이 없이 “빛깔있는 책들”이 나오기 힘들었으나, “칼라 북스”는 “칼라 북스”요 “빛깔있는 책들”은 “빛깔있는 책들”이다.

 책은 이렇게 만들면 되고, 이렇게 즐기면 되며, 이렇게 말하면 된다.

 어떤 이는 한국이 ‘미국 식민지’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 말을 몹시 싫어하거나 못마땅해 한다. 정치로는 식민지가 아니라 할는지 모르나, 한국 정치조차 미국 정치가 에헴 하면 깨깽 하는데, 정치마저 식민지가 아니라 하기 어렵다. 미국 대통령 선거를 놓고 얼마나 시끌벅적 떠드는가. 미국 장관들 이야기이며, 미국 경제와 사회 이야기가 한국 언론매체에 얼마나 큼지막하게 나오는가.

 한국은 책마을을 비롯해 문화마을과 예술마을이나 여러 갈래가 ‘일본 식민지’라 할 만하며, 참말 식민지 굴레를 고스란히 붙잡는다. 털지 못하거나 씻지 않는다. 느끼지 못하니 털 생각을 못하고, 깨닫지 않으니 씻을 마음을 내지 못한다.

 한국책이 참으로 한국책답지 않은 줄 알아야 비로소 한국책을 만들고 나누며 즐긴다. 한국책이 얼마나 한국책답지 못한가를 모른다면, 우리들은 한국책 아닌 일본책이나 미국책이 마치 한국책이라도 되는 줄 잘못 알 뿐더러, 쥐뿔 하나 없는 주제에 알량한 자존심만 내세우고 만다.

 자존심은 밥을 먹여 주지 않는다. 구슬땀을 흘리며 논밭을 일구어야 밥을 먹는다. 우리들은 자존심을 버리고 구슬땀을 흘리면서 이 땅에서 아름다운 한겨레 살붙이로 다시 태어나면서 내 밥을 맛나게 먹고 이웃하고 나눌 수 있어야 한다.

 2011년 오늘까지도 아직 한국에는 한국책이 없다. (4344.1.6.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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