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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2 : 전쟁과 사랑 - 박정희朴正熙와 육영수陸英修의 연애 시절 ㅣ 박정희 시리즈 2
조갑제 지음 / 조갑제닷컴 / 2015년 7월
평점 :
까칠읽기 . 숲노래 책읽기 / 인문책시렁 2025.3.30.
까칠읽기 62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2》
조갑제
조선일보사
1998.10.28.1벌/2000.2.22.9벌
“다회용 젓가락”이라는 이름이 여러모로 안 어울린다고 느낀다. 젓가락은 예나 이제나 “오래오래 쓰는 살림” 가운데 하나이니까. “쓰고 버리는” 젓가락과 물그릇에 길든 눈인 분은 하나부터 열까지 꼬치꼬치 따지게 마련인데, 왜 저희랑 똑같이 안 구느냐고, 유난하게 구느냐고 따질 테지.
그래서 이때에는 거꾸로 “왜 애먼 젓가락을 오래오래 안 쓰고서 늘 버리고 또 버리셔요?” 하고 물을 만하다. 이렇게 되묻는 사람이 늘어야, “쓰고 버리기에 길든 분”이 조금이나마 틈을 낼 수 있다고 느낀다. 쓰고 버리기에 길든 사람이 오히려 ‘유난’한 굴레라고 바라보아야지 싶다.
“쓰고 버리기”에 길든 터전이라면, 사람도 똑같이 “쓰고 버리기”를 하게 마련이요, “두고두고 살림으로 건사하기”라는 터전이라면, 사람도 마을도 집도 숲도 곱게 돌보는 길로 나아간다고 느낀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는 1998년에 처음 나왔고, 2007년에 새판으로 나온 뒤에, 2015년에 《박정희》라고만 굵짧게 이름을 바꾸어서 “박정희 시리즈”라고도 덧이름을 붙인다. 문득 생각해 본다. 조갑제 씨는 왜 자꾸 ‘박정희’를 되살리려고 하는가? “다회용 젓가락”이라고 하는 뜬금없는 이름처럼, 왜 무덤에 침을 뱉지 말라 하면서 이렇게 높이높이 섬기려고 하는가?
여러모로 보면, 조갑제 씨는 ‘이씨 사내’만 임금 자리에 앉던 조선 무렵에 임금 곁에서 조아리던 벼슬아치 같다. ‘이씨 사내 임금’하고 ‘박정희’를 똑같이 바라보기 때문에, ‘임금님한테 티끌이나 얼룩이나 말썽이나 저지레나 잘못이 수두룩하다’고 하더라도, 모두 감추거나 숨기면서 ‘그쯤이야 있을 만하다’고 덮어씌운다고 느낀다. ‘임금님 잘못’을 마치 ‘임금님 보람(업적)’이라도 되는 듯 말바꾸기와 말치레를 하기까지 한다.
조갑제 씨는 “박정희는 소박(素朴)과 자주(自主)”라고 말하지만, 막상 “박정희는 소름과 자랑(자뻑)”이라고 말해야 알맞지 않을까? 박정희는 사람들이 소름이 돋도록 짓밟고 죽이면서, 이를 자랑으로 삼았다. 박정희는 그이 스스로와 둘레 뭇사람이 뒷돈을 허벌나게 챙기도록 자리를 보아주면서 이 또한 자랑으로 삼았다.
이승만·박정희 무렵에도, 전두환·노태우 무렵에도, 그리고 박근혜·문재인·윤석열 동안에도, 똑같이 ‘나라도둑’이 철철 넘친다. 누가 우두머리에 앉든, 이 나라에 도둑이 수두룩하다. 도둑이 많기에 나라가 거덜나거나 흔들린다. 숱한 도둑이 뒷돈을 챙기느라 사람들이 홀쭉하다. 싸움붙이(전쟁무기)를 그토록 엄청나게 만들어내는데, ‘국방예산’이 얼마나 제대로 쓰이는지 누가 살필까? 아마 아무도 안 살필 뿐 아니라, 돌라먹기에 바쁘지 않을까?
조갑제 씨는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를 쓰면서 ‘박정희 우상’을 세우고 싶었구나 싶은데, 오히려 이런 책을 썼기 때문에 ‘숨길 수 없는 빈구멍과 저지레’를 더 널리 드러내 주었다고 할 만하다. 박정희는 왜 ‘백선엽·백인엽’ 뒤를 그토록 봐주면서 ‘인천 선인재단’이 인천을 통째로 집어삼키도록 밑밥을 깔아 주었는지 궁금했는데, 조갑제 씨가 쓴 글을 보고서 아주 잘 알아낼 수 있더라.
‘백선엽·백인엽’이 ‘전쟁영웅’인가? 뒤에 앉아서 작대기로 길그림을 척척 짚으면서, 여기에 몇 천 저기에 몇 천, 젊은사내를 총알받이로 내몬 우두머리가 어떻게 전쟁영웅일 수 있는가? 또한 두 백씨가 박정희를 등에 업고서 하던 막짓과 뒷짓을 보면, 군사독재정권 민낯을 더욱 훤히 읽어낼 수 있다. 서로 한통속이기에 이처럼 ‘우상숭배 경전’을 내놓아서 사람들을 홀려야 한다고 여기고야 만다.
ㅍㄹㄴ
박정희를 쓰면서 나는 두 단어를 생각했다. 소박(素朴)과 자주(自主). (10쪽)
IMF 관리 체제는 1988년부터 시작된 민주화 10년의 비싼 대가(代價)였다는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13쪽)
황민화 교육의 첨병을 양성하는 것이 설치 목적익도 했던 사범학교는 또한 군국주의 시대에 걸맞은 장교적 소양을 갖춘 교사를 양성한다는 목적도 갖고 있었다. (25쪽)
아리카와는 박정희를 “보쿠세이키, 보쿠세이키”라고 부르면서 귀여워했다. 총검술을 가르칠 때는 박정희를 시범조교로 불러내었다. (52쪽)
박정희가 외래 사상이나 문화에 대해서 보여준 자주적인 자세의 출발점은 사물을 동양적 가치관으로 판단하려는 시각이었다. 그런 시각의 바탕에 깔린 것은 그가 대구사범 때 배웠던 한자 문화의 교양이었다. 그런 그가 한글 전용을 강행함으로써 오늘날의 한국 사회가 우리의 문화적, 역사적 뿌리로부터 단절되는 상황을 만들었다는 것은 흥미롭다. (62쪽)
우리가 연구한 것은 “어떻게 하면 만주군관학교 사람들이 환영할 수밖에 없는 행동을 취할 것인가”였다. 내가 문득 생각이 나서 “박 선생,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면 어떨까”라고 했다. 그는 즉각 찬동했다. 즉시 행동에 옮기는 것이었다. 바로 옆에 있던 학생 시험 용지를 펴더니 면도칼로 새끼손가락에 갖다 대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설마 했는데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내는 것이었다. 박 선생은 핏방울로 시험지에다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報國 滅私奉公)”이라고 썼다. 그는 이것을 접어서 만주로 보냈다. (96쪽)
박 대통령은 자신에 대한 소년용 전기를 준비하고 있던 김종신 공보비서관이 “각하는 왜 만주에 가셨습니까”라고 묻자 단순명쾌하게 이야기했다. “긴 칼 차고 싶어서 갔지.” (101쪽)
박상희는 ‘다카키 소기’, 박정희는 ‘다카키 마사오’, 박정희의 조카 박재석은 ‘다카키 이사무’가 되었다. (117쪽)
하나 흥미로운 것은 만군(滿軍) 출신 장교들이 혼란스런 창군(創軍) 과정에 잘 적응했다는 점이다. 대체로 원칙주의자들인 일군 장교 출신 장교들은 상황이 정상일 때는 능력을 발휘하지만 비정상일 때는 어리둥절해지는 반면 만주라는 혼란 상황에 익숙했던 만군 출신들은 오히려 요령과 임기응변을 잘 부리고 미군들과도 잘 사귀었다. (181쪽)
이때 박정희는 이현란 몰래 본처 김호남과 헤어지기 위해 이혼 수속을 하려고 애를 태우고 있었다. (208쪽)
박정희를 살려 준 백선엽 육본 정부국장은 자상하게 그의 뒤를 봐주었다. 석방시킨 뒤에는 일 주일 동안 정양한 뒤 출근하도록 처리했다. 그 사이 백선엽 국장은 박정희 소령을 정보국 전투정보과 과장으로 발령 냈다. (236쪽)
김종필 중위 일행은 시흥의 임시육본으로 갔다가 다시 수원으로 갔다. 일제 시대에 만든 수원청년훈련소에 정보국이 들어갔다고 해서 거기로 갔더니 박정희가 정문에 서서 자신들을 맞아 주는 것이 아닌가. 김 중위는 마음이 놓였다. “저분은 역시 북(北)으로 가지 않으셨구나” 하는 안도감. 박정희에게 있어서 6·25 남침은 자신에 대한 사상적 의구심을 해소하는 계기를 선물했다. (283쪽)
위대한 민족 지도자 이승만의 생애에 있어서 서울과 시민 그리고 군인들을 버리고 몰래 한강을 건넌 뒤 다리를 끊은 이 행위는 일대 오점(汚點)으로 남게 되었다. (284쪽)
(1950년 대구·부산에서) 8월 어느 날 송 소위는 박정희에게 말을 건넨다. “과장님 왜 혼자 사십니까. 가족이 있어야 마음도 든든하고 위로도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글쎄, 좋은 색시가 있어야지.” 송 소위는 외가 쪽으로 동생뻘 되는 육영수란 색시를 소개했다. 스물여섯이라고 했다. “제가 보기에는 만점인데 과장님이 보시면 만점이 될지, 영점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박정희는 그저 “그런 색시가 있느냐” 하는 정도였다. (309쪽)
박정희는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있던 날 중령으로 진급했다. 만주군관학교 동기인 이한림은 당시 준장으로서 부군단장이었고 육사 2기 동기생들은 대령으로 진급해 있었다. 동료들에 비해서 많은 나이와 낮은 계급은 현실에 대한 박정희의 불안을 구조화했다. (316쪽)
육종관은 집안을 왕국처럼 그리고 회사처럼 운영했다. 그는 소실을 데려다 놓고 놀고먹도록 내버려 둘 사람이 아니었다. 4백 석을 생산하는 논밭일을 하는 데 소실들은 노동력을 제공하여야 했다. 그 자신도 농사일에 참여했다. 장부 정리는 육영수의 몫이었다 … 어머니가 각기 다른 10여 명의 아이들과 섞여 살면서 육영수는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자신의 분수와 품위와 영역을 지키는 훈련을 받고 있었다. (324, 325쪽)
평양은 12월 5일에 포기되었다. 평양이 고향이고 북진 때는 평양 돌입의 선봉장이었던 백선엽 1사단장은 대동강 철교를 비롯한 평양의 중요 시설들이 모조리 폭파되고 대동강역에서는 태평양을 건너온 미군 탱크 18대가 포 한 발 못 쏘아 보고 화염에 휩싸여 버리는 것을 목격하면서 “이것이 생전에 내가 보는 평양의 마지막 모습이겠구나”라고 생각했다. (390쪽)
5·16 거사 직후 김시진은 반(反) 혁명 분자로 몰리고 있었다. 혁명 주체 김재춘이 박정희 소장을 찾아가 말했다고 한다. “9사단에 있을 때 그 사람은 ‘생선’이란 말이 ‘여자’를 가리킨다는 것도 모를 만큼 순진한 사람이란 사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데려다가 씁시다.” (413쪽)
박정희 대령은 대구로 가는 길에 후방에 있던 김재춘 병참부장의 부대를 찾아갔다. 김재춘은 송아지를 한 마리 잡아 보신(補身)을 시켜 주고 하룻밤을 같이 보냈다. (4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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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2》(조갑제, 조선일보사, 1998)
박정희를 쓰면서 나는 두 단어를 생각했다. 소박(素朴)과 자주(自主)
→ 나는 박정희를 쓰면서 두 낱말을 생각했다. 수수와 스스로
→ 나는 박정희를 쓰면서 두 낱말을 생각했다. 단출와 몸소
10쪽
단순명쾌하게 이야기했다
→ 굵짧게 이야기했다
→ 한마디로 이야기했다
→ 그냥 이야기했다
101쪽
4백 석을 생산하는 논밭일을 하는 데 소실들은 노동력을 제공하여야 했다
→ 400섬을 낳는 논밭을 짓는데 꽃아씨도 일하여야 했다
→ 400섬을 얻는 논밭을 짓는데 버금각시도 일하여야 했다
324쪽
모여 앉은 사람들은 가가대소(呵呵大笑)했다
→ 모여 앉은 사람들은 깔깔거렸다
→ 모여 앉은 사람들은 너털웃음이다
→ 모여 앉은 사람들은 활짝웃음이다
→ 모여 앉은 사람들은 함박웃음이다
412쪽
김시진은 반(反) 혁명 분자로 몰리고 있었다
→ 김시진은 거꿀이로 몰렸다
→ 김시진은 거스른다고 몰렸다
413쪽
송아지를 한 마리 잡아 보신(補身)을 시켜 주고
→ 송아지를 한 마리 잡아 북돋아 주고
→ 송아지를 한 마리 잡아 살찌워 주고
→ 송아지를 한 마리 잡아 보살펴 주고
415쪽
※ 글쓴이
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