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복지라는 이름인 선물



  ‘돌봄손(복지)’를 받는 사람은 그야말로 때때로 ‘무턱대고 받기(무분별 선물)’를 그냥그냥 받아들여야 한다. 가난집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은 고맙다. 가난집에 이바지하려고 이모저모 꾸러미를 마련해서 몸소 집까지 가져다주는 일도 고맙다. 그렇지만 ‘돌봄손 꾸러미’를 내미는 곳(정부·단체)치고 미리 물어보거나 알리는 일은 아예 없기 일쑤이다. 어느 날 갑자기 쿵쿵 두들기고서 큰소리로 부른다. ‘돌봄손 꾸러미’로 무엇을 베푸는가 하고 돌아본다.


1. 흰쌀 2. 샴푸·비누 3. 플라스틱 잇솔·화학약품 잇물 4. 식용유·조미료·정제설탕·흰밀가루 5. 조미김·깡통식품·몇 가지 젤리와 과자 6. 고기(소고기·돼지고기) 7. 표백·형광 롤휴지나 각티슈 8. 부엌랩 9. 물티슈 10. ……


  돌봄손은 아름답다. 이웃을 헤아리며 도우려는 손길이란 반짝인다. 그런데 이웃을 헤아리려고 한다면, 이웃이 무엇을 바라는지 먼저 물어볼 노릇이다. 비록 가난하게 살더라도 고기를 안 먹을 수 있다. ‘정제식품(식용유·설탕·밀가루)’을 안 쓸 수 있다. 아무리 가난하다지만 플라스틱 쓰레기가 넘치는 잇솔·잇물(치약)은 아예 안 쓰고서, ‘나무+돼지털 잇솔’을 장만하고, 잇물을 손수 빚어서 쓸 수 있다. ‘형광물질·방부제·파라핀·표백제·계면활성제·불소·색소……’를 하나도 안 넣은 비누나 밑종이(휴지)만 목돈을 들여 장만하고서 조금조금 아껴서 쓸 수 있다. ‘부엌랩’이며 ‘물티슈’는 아예 없이 ‘소창’과 ‘행주’와 ‘걸레’만 쓸 수 있다. 누런쌀(현미)하고 온쌀(잡곡)만으로 밥을 지어서 먹을 수 있다.


  예전에는 ‘염산 없이 마련한 장흥김’이 값이 셌다지만, 요즈음은 ‘염산을 쓴 김’이 오히려 ‘무염산 장흗김’보다 곱으로 비싸더라. 오래도록 ‘염산 없는 장흥김’만 따로 장만해서 먹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기름진 밥살림을 안 하지만 올리브기름만 장만해서 이태에 한 병을 천천히 쓰는 살림집도 있다. ‘정제 안 한 달달가루’로 매화알이며 열매를 재우는 시골집이 있다. 흰밀가루 아닌 통밀가루만 장만해서 손수 빚는 사람도 있다.


  돌봄손 꾸러미를 갑작스레 들고 와서 쿵쿵 두들기며 받으라고 하는 분은 으레 찰칵찰칵 찍는다. ‘복지 선물 기록’을 해야 한다지. 베푸는 마음은 갸룩하다만, ‘무엇을 받고 싶은지 물어본 바’조차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쳐서 한 아름 안기고서 찰칵찰칵 찍는 일은 ‘어떤 복지’이고 ‘어떤 정책·제도’인지 알 길이 없다. 우리 보금자리는 ‘복지 선물’을 받을 만하다고 보여주게끔 늘 후줄근하거나 추레한 모습으로 살아야 할까?


  쌀자루를 안기고 싶다면, 흰쌀을 먹는지 누런쌀을 먹는지 온쌀을 먹는지 먼저 물어볼 일이다. ‘좋고 비싼 고기’를 주고 싶더라도 ‘고기밥(육식)’을 하는지 풀밥(채식)을 하는지 먼저 묻고서, 고기밥을 하더라도 몸에 안 맞는(두드러기 있는) 고기가 있는지 물을 노릇이며, 고기보다는 차라리 김치가 나은지 아니면 배추나 무를 꾸러미로 베풀면 고마울는지 물어볼 일이다. 가볍게 ‘좋은 고춧가루’ 한 자루만 주어도 넉넉하다.


  곰곰이 보면, 그러니까 스무 해 남짓 돌아보건대, 가난집에 베푸는 돌봄손 꾸러미에 ‘과일’은 여태 없었다. 젤리와 과자를 베풀어도 안 나쁘지만, 이보다는 능금이나 배나 복숭아 한 알이 낫지 않을까? 귤 한 자루여도 되지 않을까?


  이모저모 헤아리는데, 책꽃종이(도서상품권)를 건네어도 고맙다. 아니, 책꽃종이를 건네기를 빈다. 돌봄손길을 받는 집에서 스스로 책을 살피고 골라서 차분히 배우고 익히라고 북돋우는 길이 낫다고 본다. 밑돈(기본소득)으로 맞돈(현금)을 주어도 된다. 가난집 사람들은 걸어다니거나 버스를 타니까, 버스를 탈 길삯으로 쓰라고 하면 된다. 짐이 많거나 힘든 날에는 택시를 타라고 맞돈을 주면 된다.


  굳이 가난집에 뭘 베풀었다고 티를 내면서 찰칵찰칵 찍어서 남기지 말고, 조용히 밑돈을 베풀 적에 서로 일손이 줄고 홀가분하고 즐거운 노릇이라고 본다. 집집이 찾아다니면서 꾸러미를 나르려면 얼마나 힘들고 바쁜가. 기름값도 많이 들 테고. 게다가 돌봄손(복지)은 ‘자랑(기록·홍보)’으로 남길 일은 아니지 싶다. 어질게 돕는 사람은 “내가 누구인지 알려고 하지 말고 그냥 받아주십시오” 하고 이름과 얼굴을 숨기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사회복지’라는 이름을 붙이면 언제나 이름과 얼굴을 크게 드러내어 자랑(기록·홍보)을 하려고 하니, 해마다 거북하고 고단하고 지치곤 한다. 2026.3.3.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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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안부전화



  나더러 어찌 ‘안부전화·안부인사’도 없이 사느냐고 타박한다. 아이곁에서 보금자리를 일구면서 글쓰고 책읽는 사람으로 지내는 나날이라서, 굳이 “잘 지내나요?” 하고 묻는 말을 안 한다. 이미 푸른별 온사람은 마음과 마음으로 이은 사이인걸. 손소리를 걸거나 보따리를 지고서 찾아가지 않더라도, 손글월을 띄우거나 새로 낸 책을 보내잖은가.


  말로만 “잘 지내십니까?” 하고 여쭐 마음이 없다. 겉절(형식적 인사)을 해야 한다고 여기는 나라이지만, 겉절보다는 속절·마음절을 하고 싶다. 별빛으로 절하고, 숲빛으로 절하고, 풀내음으로 절하고, 멧새가락으로 절하려고 한다.


  목소리만 낼 마음은 없다. 이곳저곳에 얼굴을 내밀 마음이 없다. ‘목소리내기’하고 ‘얼굴내밀기’를 다 끊으며 산다. 무슨 일이든 맺고 풀려면 ‘안부전화·안부인사’를 꼭 해야 한다는데, 겉절이 아닌 속절과 빛절로 어울리면서 새롭게 이야기하고 푸르게 노래하는 길을 그린다. 곰곰이 보면, 벼슬자리 사람들은 책도 글도 안 읽는다고 하니, 손글월이나 책을 띄운들 그분들한테 덧없을 만하다. 그러나 벼슬자리 여러분이 책이나 글을 곁에 안 두는 줄 알기 때문에, 더더욱 그분들한테 손글월이나 책을 띄우거나 건네려고 한다.


  늦겨울비가 내린다. 꽃샘비로구나 싶다. 이제 꽃망울을 틔울 때라고 살살 북돋우는 빗방울이라고 느낀다. 얼핏 찬비 같지만 가만히 풀고 녹이면서 깨우는 봄맞이비이지 싶다. 살갗으로 빗물을 받노라면 이 비가 얼마나 고맙고 놀라운지 읽을 수 있다. 빗소리를 귀여겨들으면, 이 빗소리가 노랫소리요 풀숲소리에 하늘소리에다가 바닷소리인 줄 느낄 수 있다.


  나는 늘 풀꽃나무한테 하루를 묻고서 듣는다. 나는 풀꽃나무를 동무하는 너를 반가이 만난다. 함께 보고 함께 걷고 함께 놀고 함께 자란다. 같이 보고 같이 걷고 같이 놀고 같이 큰다. 나란히 보고 나란히 걷고 나란히 놀고 나란히 나아간다. 너하고 나는 한 손에 씨앗을 쥔다. 나하고 너는 다른 손에 햇볕을 놓는다.


  잎을 틔우는 입으로 말 한 마디를 그린다. 잎사귀를 여미는 입술로 바람줄기 한가닥을 쓰다듬는다. 이제 고흥읍 버스나루에 나온다. 손소리를 쩌렁쩌렁 틀며 듣는 아가씨한테 제발 소릿줄을 쓰라고, 5000원이면 산다고 열 벌쯤 말했는데, 오늘 드디어 소릿줄을 귀에 꽂네. 하면 되는 일이다. 다만 할매랑 할배랑 아지매랑 아재랑 푸름이랑 어린이는 온(100) 벌 넘게 얘기했어도 여태 아무도 소릿줄을 안 쓴다.


  눈을 감자. 제비꽃이 필 즈음을 그리자. 꽃피고 제비가 날아들 날을 그리자. 부산 가는 시외버스가 들어온다. 천천히 탄다. 자리에 앉는다. 짐을 내린다. 종이를 꺼내어 하루글을 쓴다. 오늘 차근차근 내딛는 걸음마다 드리울 이야기를 한 자락 두 자락 여민다. 내 몸은 버스에 싣되, 내 마음은 바람에 얹는다. 나는 버스라는 쇳덩이에 몸을 두되, 파랗게 틔울 하늘빛에 마음을 놓는다. 2026.2.27.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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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 숨은책읽기 2026.2.26.

숨은책 1144


《밤토리 만화 목민심서》

 조항리 글·그림

 파랑새어린이

 1996.3.25.



  하루를 꾸준히 짓는 사람은 살림이건 글이건 그림이건 빛꽃이건 꾸준히 가다듬어서 펴고 나누게 마련입니다. 날마다 새롭게 배우려는 마음이기에 오늘까지 익힌 바를 추슬러서 여밉니다. 이러다가 저물녘이면 일터나 집에서 가까운 책집에 들러서 “오늘은 또 무슨 책이 새로 나왔을까?” 하고 설레면서 두리번거려요. 요즈음은 큰책집이나 작은책집도 이웃나라 온갖 책을 너끈히 품습니다만, 지난날에는 헌책집이 아니고서는 이웃책을 못 보았습니다. 이런 이웃책은 ‘주한미군도서관’하고 ‘이웃대사관’하고 ‘외국인학교’에서 흘러나옵니다. 아니, 이 세 곳은 일부러 우리나라 헌책집에 그 나라 읽을거리를 슬며시 풀어놓았습니다. 이웃나라 나름대로 살림펴기(문화전파)를 하는 셈입니다. 1994∼2003해에는 서울에서 살며 서울에 있는 거의 모든 헌책집을 날마다 찾아갔습니다. 이때 용산 〈뿌리서점〉에 들르면 언제나 조항리 님이 책을 읽으시더군요. 가까이 ‘대원사’가 있기 때문인 줄 나중에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이분이 그 그림꽃을 피운 어른인가 하고 놀랐고, 책집마실을 할 적마다 뵈면서 ‘이렇게 끝없이 배우고 새기고 가다듬으니 새길을 짓는 새붓이겠구나. 나는 나이들어도 늘 새롭게 배우는 자리에 서자’고 돌아보았습니다.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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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 숨은책읽기 2026.2.26.

숨은책 863


《깜찍한 사랑 하니 3》

 이진주

 예음

 1989.1.20.



  1985년에 태어난 《달려라 하니》입니다. 그무렵 열한 살이었어요. ‘하니’는 ‘둘리’와 함께 어린이 누구나 사랑하는 이야기요 아이였습니다. 다른 숱한 그림은 머스마만 보거나 가시내만 들췄다면, ‘하니’하고 ‘둘리’는 너나없이 즐기고 반기면서 지켜보는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달려라 하니》를 곰곰이 보면, ‘순이인 하니’는 밥도 김치도 살림도 제대로 여밀 줄 모르지만, ‘돌이인 홍두깨’는 밥도 김치도 살림도 잘 꾸릴 줄 압니다. 넌지시 어깨동무(성평등)를 밝히는 줄거리를 곳곳에 담아요. 이진주 님은 ‘하니’가 나오는 그림을 꽤 그립니다. 이 가운데 《달려라 하니》하고 《천방지축 하니》가 널리 사랑받고, 앞뒤로 그린 다른 ‘하니’는 썩 눈길을 끌지 못 했습니다. 《깜찍한 사랑 하니》도 ‘하니’라는 이름으로 이어서 눈길을 끌고픈 마음이 물씬 묻어나는 그림인데, 조금 더 힘을 빼면서, 또 ‘서울내기 어른’스러운 하니가 아닌, ‘투박하고 수수하게 모든 어린이하고 동무할’ 만한 하니를 그려내 보았다면 참 달랐을 테지요. 이를테면, 하니가 푸름이로 자라고, 어른으로 나아가고, 이윽고 새롭게 길잡이가 되어 아이를 어질고 개구지면서 즐겁게 가르치고 이끄는 줄거리를 짤 만해요. 할머니 하니가 아이를 너른 품으로 돌보고 지켜보는 줄거리나, 시골에서 흙짓는 하니도 사랑스럽지요. 이제는 차곡차곡 살림을 지으며 한 발짝 내딛는 그림을 선보이는 붓을 쥘 때입니다.


ㅍㄹㄴ


《깜찍한 사랑 하니 3》(이진주, 예음, 1989)


굉장하다. 근사한 석조건물

→ 대단하다. 멋진 돌집

57쪽


모두 나의 누나들이야. 모두 노처녀들이시지

→ 모두 우리 누나야. 모두 안 맺으셨지

→ 모두 우리 누나야. 모두 혼길이시지

→ 모두 우리 누나야. 모두 혼자이시지

59쪽


억만금의 돈을 들여도 아깝지 않다고

→ 돈벼락을 들여도 아깝지 않다고

→ 벼락돈을 들여도 아깝지 않다고

63쪽


난 이미 선약이 되어 있어서요

→ 난 이미 잡아서요

→ 난 이미 딴일이 있어서요

72쪽


뇌종양으로 선고받고 지금까지 어떻게

→ 머리좀이라 듣고 이때까지 어떻게

→ 골좀이라 하고서 오늘까지 어떻게

118쪽


의학적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다네

→ 돌봄길로는 도무지 밝힐 수가 없다네

→ 보듬길로는 아예 얘기할 수가 없다네

118쪽


우리 비행기 만드는 중인데

→ 우리 날개를 짓는데

→ 우리 나래를 짜는데

121쪽


용기를 가지고 재기를 해보십시오

→ 기운내어 일어나 보십시오

→ 힘차게 다시서 보십시오

147쪽


자기 이익과 명예만 위하는 경제동물 같으니라고

→ 제 몫과 이름만 따지는 돈짐승 같으니라고

→ 길미와 이름값만 좇는 돈벌레 같으니라고

152쪽


그런 무서운 징크스가 있는 오페라에

→ 그처럼 무섭게 얄궂은 노래춤에

→ 그렇게 버거운 노래춤판에

→ 그렇게 안 맞는 마당놀이에

158쪽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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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불물바람



  불타오르면 뜨겁다. 뜨거우니 활활 타고서 얼핏 겨울을 녹이는 듯싶지만, 이내 사그라들어서 재로 바뀌니 매캐하고 더 춥다. 불질을 하는 사람은 장작(불피울것)을 자꾸자꾸 넣어야 한다. 불길이란, 끝없이 태워서 재가 되는 수렁이다.


  ‘불’이란 ‘화(火)·분노(憤怒)’이다. 불길이란, 태울거리인 미움을 끝없이 끊임없이 들이붓고 몰아세운다. 불길에는 철빛(철드는 빛)이 아예 없다. 불티가 번지면 싹 태워서 죽일 뿐 아니라, 겨울에 눈추위로 들숲메바다를 다스리는 철빛을 확 쓸어버려서 언제까지나 겨울이다.


  불길을 일으키는 사람은 봄을 안 바란다. 봄이 오면 불을 그만 때야 하기에 앞으로도 내내 겨울이기를 빈다. 미워할 놈을 자꾸 미워해야 사람들 눈길이 불타올라서 ‘장작꾼(사이버렉카)’은 장작장사를 쏠쏠히 하며 돈·이름·힘을 혼자 거머쥘 수 있다.


  어떤 겨울도 한때이다. 어떤 겨울도 없애야 하지 않아. 우리는 봄을 그리고 봄을 노래하고 봄에 사랑할 노릇이다. 모든 겨울은 봄에 싹 녹고 풀리면서 저절로 사라진다. 봄은 싸움이나 총칼(전쟁무기)이 아니다. 봄은 아이곁에 있는 씨앗이다. 봄은 아이를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고 함께 사랑하고 파란하늘빛과 파란바다빛으로 철빛을 그리는 살림길이다.


  쟤들이 또 잘못했다면서 우리 스스로 불태우려고 하면 바로 이때부터 우리 누구나 장작꾼한테 휩쓸린다. ‘서울봄’이란 무엇이었는지, 누가 어떻게 봄을 불렀는지 생각할 일이다. 우리는 ‘들풀’이자 ‘들꽃’일 노릇이다. 우리는 서로 ‘들숲’이자 ‘들사람’으로서 ‘들사랑’을 하면 된다. 우리는 ‘들불’이 아닌 ‘들바람’이자 ‘들물길’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부아내지 말자. 불지르지 말자. 우리가 자꾸 부아내며 불지르니까, 방귀 뀐 이들이 아주 똥까지 지르려고 한다. 우리는 보아주기(용서)를 숲빛으로 하늘빛으로 철빛으로 어른스럽게 할 노릇이다. 철없이 구는 그들을 똑같이 때리고 몰아세우면, 구석에 몰린 쥐가 고양이한테 달려들어 다 죽자고 싸우듯 그만 온나라가 싸움불수렁에 휩싸이고 만다. 그러면 어떡해야 할까? 철없이 나대는 저들을 어찌해야겠는가?


  자, 잘 헤아리자. 어진 어른은 아직 철없는 아이를 어찌 달래는가? 아이한테 ‘사랑매’를 들어야 하는가? 아이를 마구 꾸짖고 놀리고 비아냥대고 낄낄거리고 내쫓기만 해야 하는가? 매에는 사랑이 없다. ‘사랑매’는 허울이자 거짓이다. 아이하고 어른은 사랑으로 마주해야 하는 사이일 뿐이다. 아이어른 둘레에 매가 있어야 할 까닭이 없다. 철없는 아이가 철이 들 수 있도록 다가서면 된다. 아이곁으로 사근사근 다가가서 눈높이를 맞추면 된다. 둘이 나란히 앉거나 마주보고 앉아서, 그림책과 동화책을 나긋나긋 읽고 옛날얘기를 그윽히 들려줄 노릇이다.


  철없는 그들한테 그림책을 베풀자. 바바라 쿠니·윌리엄 스타이그·엘사 베스코브·나카가와 치히로·아스트리드 린드그렌·권정생·이오덕·임길택 책을 베풀자. 그들을 꽃뜰과 숲으로 불러서 햇볕을 쬐고 바람을 마시면서 함께 아름책을 읽자. 그저 살림책과 사랑책과 숲책을 읽자. 그들은 사랑받은 적이 없다고 외치면서 막 떼쓰고 울고불고 하는데, 떡 하나 더 주고 그림책을 읽고, 동시를 한 자락 사랑으로 써서 건네자. 그들은 회초리질이 아닌 따순 손길을 받아보아야 한다. 그들은 아름책을 곁에 두면서 아이사랑을 처음부터 새로 배워야 한다.


  우리는 ‘사랑하기’라는 사람길을 배울 노릇이다. 그들은 ‘사랑받기’라는 숲길을 배울 노릇이다. 우리는 ‘살림하기’라는 사람씨를 심을 노릇이다. 그들은 ‘살림배우기’라는 밭일을 할 노릇이다. 우리는 ‘사람으로’ 서서 이야기꽃을 피우면 된다. 그들은 ‘사람으로’ 함께 만나서 이야기밭을 일구면 된다. 2025.3.17.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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