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배움꽃

숲집놀이터 239. 말을 깎다



아이가 홀가분하게 하는 말을 깎는 어른이 꽤 있더라. 어떻게 저 아이가 저런 생각을 함부로 하느냐고 꾸짖으려는 어른이 제법 있더라. 왜? 어른들은 저 아이처럼 생각하기도 하고, 저 아이 같은 생각을 마음껏 쏟아내기도 하는데, 왜 저 아이는 저 아이 나름대로 생각한 이야기를 펴면 안 되지? 게다가 왜 어른들은 하나같이 저 아이한테 “말을 깎아”서 쓸까? 아이가 몸나이로는 어려 보이니 함부로 말을 놓아도 될까? 어른들은 몸나이가 많아 보이니 아이가 언제나 어른들한테 높임말을 사근사근 써야 할까? 우리는 겉말을 할 때가 아니다. 우리는 속사랑을 나눌 때이다. 우리는 겉치레를 할 때가 아니다. 우리는 속살림을 지을 때이다. 어른한테 생각이 있어 말하고 싶은 때가 있다면, 아이한테도 생각이 있으며 말하고 싶은 때가 있다. 아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안다면, 겉몸이나 겉나이 아닌 슬기로운 어른이 될 수 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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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배움꽃

숲집놀이터 233. 한때



어찌 보면 아주 짧게 지나가는 값진 한때이지 싶다. 아니 언제나 아주 짧게 지나가는 아름다운 한때로구나 싶다. 미처 못 깨달은 나머지 어수룩하게 보낸 한때여도 좋다. 제대로 바라보고서 찬찬히 이야기를 들려주고서 빠르게 지나간 한때여도 좋다. 다만 한때일 뿐이다. 잘하건 잘못하건 한때이다. 이 모든 한때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차분히 맞아들이면 되는구나 싶다. 아이 곁에 앉아서 말을 섞는다. 어제 한때에 너희가 참 멋지더구나 하고. 오늘 한때에 아버지도 제법 멋지네 하고. 우리는 어느 날에는 참 엉성하기도 하지만, 어느 날에는 참으로 눈부시기도 하다. 이래서 나무라거나 저래서 부추겨야 하지 않다고 느낀다. 이때에는 이런 하루를 물끄러미 보면서 살며시 토닥이면 되네. 저때에는 저런 나날을 말끄라미 보면서 살가이 쓰담쓰담하면 되더라.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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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집놀이터 238. 어떤 동무



‘졸업장 학교’ 아닌 ‘우리 집 학교’를 다니면서 마음껏 노는 우리 아이들을 마주하는 이웃 어른은 으레 “아이가 자랄수록 또래 동무를 바랄 텐데?” 하고 걱정을 한다. 걱정할 수도 있겠으나, 또래 동무가 많은 곳에 있대서 아이들이 동무를 잘 사귀면서 “사회성이 안 떨어진다”고는 조금도 안 느낀다. 졸업장 학교만 보면 쉽게 안다. 졸업장 학교를 다니는데 “사회성이 매우 떨어져”서 또래뿐 아니라 이웃을 괴롭히는 막짓을 일삼는 아이가 꽤 있다. 어느 학교를 다니냐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지만, 이보다 더 큰 터전이 있다. 바로 “어떤 집”에서 “어떤 사랑하고 살림”을 누리느냐이다. 따사로운 보금자리에서 따사로운 사랑을 누리면서 따사로운 살림을 스스로 익히는 아이라면, 언제 어디에서 누구를 마주하더라도 따스한 숨결을 나눈다. 더구나 ‘우리 집 학교’를 다닌대서 집에만 있는 아이가 어디 있겠는가? 늘 여기저기 같이 돌아다닐 뿐 아니라, 홀가분하게 숱한 사람을 마주한다. 아이뿐 아니라 어른은 늘 숱한 사람을 곳곳에서 마주하니, ‘사회성’이란 늘 몸으로 보고 부대끼며 배운다. 왜 졸업장 학교에서만 사회성을 배워야 하지? 졸업장 학교에 다니며 또래 동무를 만나야 한다고 여기는 어른들 길들여진 틀이 오히려 아이들이 사회성을 모르거나 멀리하도록 짓누른다고 느낀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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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8.24.흙



‘물’이 무엇인가 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몸이 고단해서 잠을 부르지만, 이 이야기를 받아적으려고 하는데, 문득 “멈춰 봐. 수수께끼를 써.” 한다. “수수께끼?” “그래. 처음부터 다 알려주지 말고, 먼저 ‘물’이 어떻게 흘러서 너희 몸으로 스미고, 너희가 밥이나 물을 먹거나 이런 밥이나 물이 몸에 안 받는다면, 그 까닭을 알라는 뜻으로 수수께끼를 그려.” “음, 그러면 읊어 봐.”



‘아·람’이 들려준 이야기 

― ‘물’이란 무엇인가?



모든 몸은 나야

내가 없는 몸은 죽고

내가 사라진 몸은 바스라지고

내가 있는 몸은 기운나지


모든 밥은 나야

내가 없는 밥은 못 먹고

내가 사라진 밥은 먼지 되고

내가 있는 밥은 맛나지


모든 빛은 나야

내 빛을 담아 낮이 되고

내 빛이 가시니 밤이 되고

나를 움직여 새로운 짓이 돼


모든 길은 나야

내가 흘러 살이, 삶이, 사랑이

내가 멈춰 끝이, 마감이, 처음이

나를 담아서 마시니 네가



  이 열여섯 줄을 알아듣겠니? 이제 수수께끼를 풀어서 다시 읽어 보자. 말만 바꾸면 되겠지?



모든 몸은 물이야

물이 없는 몸은 죽고

물이 사라진 몸은 바스라지고

물이 있는 몸은 기운나지


모든 밥은 물이야

물이 없는 밥은 못 먹고

물이 사라진 밥은 먼지 되고

물이 있는 밥은 맛나지


모든 빛은 물이야

물빛을 담아 낮이 되고

물빛이 가시니 밤이 되고

물을 움직여 새로운 짓이 돼


모든 길은 물이야

내(냇물)가 흘러 살이, 삶이, 사랑이

내(냇물)가 멈춰 끝이, 마감이, 처음이

내(냇물)를 담아서 마시니 네가



  흐르는 냇물이 왜 ‘내’이고, 너희가 스스로 말할 적에 왜 ‘내’라고 하는지를 생각한 적이 있니? 옛날부터 사람들은 뭔가 깨닫고 싶으면 숲을 찾아가는데, 흙이나 풀이나 나무만 있는 숲으로 가지 않아. 물이 흐르는 숲으로 가지. 물소리를 찾아서 헤매지.


  그래서 쏠(폭포)도 찾아가서 그 쏠물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적시려 해. 왜냐하면, 이 살덩이라고 하는 몸이 그냥 몸이 아닌 물인 줄 느끼려고 해. 쏠물이나 냇물로 몸을 녹여서 새로운 몸이 되도록 바꾸려 하지.


  그런데 눈으로 보기에는 이 살덩이가 안 바뀐 듯하잖아? 왜 그런 줄 알겠니? 물에 너희 살덩이를 녹이면 너희 넋이 깃들 자리가 없어. 너희 넋이 깃드는 껍데기, 바로 옷은 그대로 둔 채 속으로 다 녹여서 새롭게 깨어나려고 하지.


  바위도 돌도 모두 물이야. 연필도 공책도 책도 모두 물이지. 다만 바위나 책을 이룬 물은 좀 다르니, 살덩이하고 똑같다고는 여기지 마. 그렇지만, 바위나 책이 먼지로 바스라지지 않았다면 그곳에는 너희 살덩이에 넋이 깃들었듯이 똑같이 넋이 깃들었어. 먼지로 바스라질 적에는 넋이 떠난다는 뜻이야. 먼지가 되면 다른 몸을 찾아서 떠났다는 뜻이야. 그러니 생각해 봐. 불로 사른다면 끔찍하겠지?


  물처럼 흐르는 삶이야. 그런데 이 물길을 억지로 바꾸거나 돌리려 하면 어떻게 될까? 삶도 몸도 모두 일그러지겠지. 삶하고 몸이 일그러지니 마음도 일그러져.


  그대로 흐르도록 둬. 그대로 흐르도록 두면서 어디로 흐르고 싶은가를 끝없이 생각해. 생각하고 또 생각할 곳은 어디로 흐르고 싶은가 하는 실마리야. 이 실마리가 있는, 길을 생각하면 되는데, 꼭 ‘어떤 일을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삶이라는 길에 서면서 하루를 맞이하려는가’를 생각하면 돼.


  어느 일을 하거나 안 하겠다는 생각이 아닌, 어떤 물흐름 같은 삶길에 서면서 스스로 눈을 뜨고 넋을 지피는 하루가 되겠느냐 하는 생각이면 돼. “할 일 찾기”는 안 해도 돼. 아니, “할 일 찾기”를 하고 싶으면 하면 되지. 다만, “할 일 찾기”에만 사로잡혀서 “서려고 하는 길 찾기”를 하지 않는다면 물거품이 되겠지.


  너희가 먹는 모든 밥은 물이야. 덩어리 모습을 한 물을 먹지. 그러니 덩어리인 밥이 아닌 물만 먹어도 밥을 먹는 셈이야. 이제 알까? 밥이 몸에서 안 받는 몸이라면, “물이 몸에서 안 받는 몸”이란 뜻이란다. 밥을 몸에 넣을 수 없다면, 억지로 입을 거쳐 물을 넣으려 하지 마. 똑같은 짓이잖아.


  밥을 먹을 적마다 속이 괴로워서 속이 뒤집어지다가 늘 게워야 한다면, 덩어리로 지은 물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이요, 물부터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인 줄 알아야 해. 너희는 언제나 살갗으로 물을 받아들여. 너희 살갗이 늘 물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너희 몸은 먼지가 되어 버려. 너희가 어디에 있든, 지하상가나 하늘 높은 곳에 있더라도 그 둘레를 맴도는 물을 살갗이 받아들이지. 그래서 몸을 조이는 천조가리를 옷이랍시고 너희가 살덩이에 두르면 너희 살갗이 꺅꺅 하고 죽을 듯이 지르는 소리를 들어야 해. 살덩이에 천조가리를 꽉 조이는 짓은 너희 스스로 몸을 못살게 구는 셈이야.


  풀도 나무도 바위도 언제나 온몸으로 물하고 바람을 먹어. 뿌리로만 먹지 않아. 천쪼가리를 걸치지 않은 풀 나무 바위는 언제나 튼튼하게 서지. 해를 떠올려. 바람을 떠올려. 비구름을 떠올려. 냇물을 떠올려. 마음으로 떠올리면서 너희 살덩이에 순간이동처럼 와닿아 흐를 수 있도록 떠올려. 그러면 돼. 이렇게 하면 “입으로 밥이나 물을 넣는 일”을 하지 않고도 언제나 싱그럽고 튼튼하며 홀가분하며 즐거운 살덩이(몸)가 되겠지. 마음으로 먹으면 돼.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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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삶읽기

숨은책시렁 205


《朝鮮》 351호

朝鮮總督府 文書課長

1944.8.1.



1975년에 태어나서 자라며 1945년 언저리 이야기는 거의 못 들었습니다. 왜 들을 수 없었는지 그무렵에는 아리송했으나 마흔 몇 해가 지난 2020년쯤 되고 보니 그무렵에는 듣기 어려웠겠네 하고 깨닫습니다. 아무래도 일제강점기 이야기를 아는 분들은 스스로 밝히기 너무 힘든 대목이 많았을 테고, 섣불리 터뜨리거나 들려주었다가는 스스로 다치겠다고 여겨서 끝내 입을 다무느라 내내 파묻히고 말았겠구나 싶어요. 그래도 옛자취는 헌책집 한켠에 남으니 《朝鮮》 351호를 2017년에 경남 진주에 있는 〈형설서점〉에서 만났습니다. 이런 잡지가 다 있었나 싶어 헌책집지기한테 여쭈니 책지기님도 처음 본 잡지라면서 놀라셨어요. 나중에 알아보니 ‘조선총독부 문서과’는 1911년부터 기관지를 냈고 1920년부터 《朝鮮》이란 이름을 썼으며 제법 오랫동안 한글로도 이 잡지를 내었다는군요. 저는 ‘동경 한국연구원 도서관 1976.8.4.’라는 글씨가 찍힌 잡지로 만났습니다. 자칫 자취를 감추고 말았을 수 있는 우리 옛 그늘을, 이 나라 생채기를, 이곳 아픔을 건사한 셈인데요, 우리는 어떤 나라에서 어떤 삶을 짓는 어떤 하루를 누리는 사람일까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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