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서울 한복판에 작은들 한 뙈기를
― 작은배움숲 5 들빛(ㄷ)에 띄우는(ㄸ) 틈새(ㅌ)
틈틈이 나누는 글 한 자락은 스스로 돌보고 가꾸는 살뜰한 글씨(글씨앗)를 이루곤 합니다. 틈내어 들려주는 말 한 마디는 스스로 되새기고 일구는 알뜰한 말씨(말씨앗)로 잇습니다. 틈을 내기에 나부터 어떤 하루인지 알아보고, 틈을 내지 않기에 나부터 닫아걸면서 숨막힙니다.
국립국어원은 틀린말(비표준어)이라 여기지만 ‘튿다’라는 낱말이 있습니다. 서울말(표준어)은 ‘뜯다’라 하지요. 황해도 말씨가 남은 우리 할아버지(1985해 무렵 가심)도, 충청도 말씨가 흐르던 우리 어머니도, 어릴적에 마을(인천 중·동·남구)에서 마주한 아주머니나 아저씨나 또래나 언니오빠도 ‘튿다’라는 말을 으레 썼습니다. 쉰 해 남짓 살아오며 여러 고장 여러 이웃을 만나서 문득 “옆구리가 튿어졌어요” 하고 말하곤 하는데, ‘튿’이라는 말씨를 그대로 받아쓰거나 함께쓰는 분이 무척 많습니다. ‘튿’을 처음 듣는다는 서울사람도 곧잘 만났습니다.
우리말에서 ‘ㅌ’하고 ‘ㄸ’하고 ‘ㄷ’는 한동아리로 움직입니다. 세기와 높낮이가 다를 뿐, ‘ㄷ·ㄸ·ㅌ’는 뿌리가 하나이면서 가지만 옆으로 다르게 뻗는다고 할 만합니다. ‘틈’과 ‘뜸’과 ‘듬’이 맞물립니다. 트고 틔우기에 드나들어요. 뜨고 띄우기에 새롭게 오가거나 나아갑니다. 눈을 들어서 봅니다. 눈을 뜨면서 보고요. 눈을 트면서 봐요.
틈이 밭으면 바쁠 뿐 아니라 답답하고 지칩니다. 뜸을 들여야 밥과 국이 속으로 폭 익습니다. 들·들녘·들판은 온씨(온갖 풀꽃나무 씨앗)가 홀가분히 드나들면서 드넓게 이루는 땅이자 터입니다.
얼핏 아주 조그맣게 난 곳인 ‘틈’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참말로 커다란 곳을 ‘틈’이라 하지 않습니다. 틈이 있어서 바깥바람이 들어오고, 틈이 나기에 새롭게 마음을 기울여서 일할 수 있으면서 만납니다. 틈이 없으니 서두르거나 허둥지둥합니다. 틈이라고 하는 ‘작은길’을 내려고 눈을 뜨면서 마음을 일으킬 적에는, 온숲과 온누리에 작은씨앗 한 톨을 심어서 차근차근 푸른숲으로 나아가듯, 우리를 둘러싼 모든 일을 부드럽게 풀어가는 첫발을 이룹니다.
빈틈이 없다고 여기니 단단합니다. 빈틈없이 막으니까 못 들어가요. ‘빈틈없다 = 물샐틈없다’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릇에 물을 담아서 마시려면 단단하게 닫아야 합니다. 물이 새는 틈이 있으면 물그릇으로 못 써요. 곧 ‘닫다 ≒ 담다’인 얼개입니다. ‘닫다·담다’는 비슷한말입니다. 단단히 닫아야 담을 수 있습니다. 틈이 있으면 스르르 새기에 못 담아요. 그런데 너무 단단히 닫아걸면 ‘담’이 되어요. 살림을 건사하려고 ‘담다’이지만, 끼리끼리 어울리거나 돌라먹기를 하려는 ‘담(담벼락)’이란 무서운 돌더미입니다.
틔우는 작은길이란, 서로 마음을 담아서 다가가고 다가오는 자리라고 할 만합니다. 조그맣게 틔우기에 바람과 햇볕이 드나들어요. 바람과 햇볕이 드나들고 빗물이 드리울 수 있기에 ‘들’이며, ‘들’은 ‘논밭’을 가리키는 여러 이름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떤 씨앗이든 우리 손으로 심어서 돌볼 수 있는 푸른터가 ‘들’입니다.
대여섯 달이 넘도록 틈틈이 〈숲노래 책숲〉을 추스릅니다. 전남 고흥에서 열여섯 해를 살아내는 올해(2026해)인데, 책숲(도서박물관)으로 삼는 작은배움터(폐교)를 더는 쓸 수 없다면 새터를 찾아서 새곳으로 떠나야 하는가 하고 한참 헤아려 보았습니다. 이러다가 문득 다시 생각합니다. 처음 전남 고흥에 깃든 예전(2011해)에 열여섯 달에 걸쳐서 먼지를 쓸고 곰팡이를 닦고 묵은냄새를 뺐습니다. 스무 해 즈음 닫힌 작은배움터는 그야말로 먼지판에 곰팡이판이었습니다.
먼지는 열여섯 달 만에 걷었지만, 곰팡이를 마지막으로 걷어내기까지는 여섯 해쯤 걸렸습니다. 책꽂이에 곰팡이가 더 번지지 않기에 한숨을 돌렸지만, 그래도 곰팡이는 이따금 나뭇바닥에서 살며시 올라옵니다. 다시 쓸고닦고 바람길을 틔우면서 건사하는 나날인데, 앞으로 어떤 일을 맞이하든 처음 이곳에 깃들던 때처럼 큰쓸이(대청소)를 해봅니다. 모든 집일은 살림짓기를 하는 손길에서 비롯하듯, 〈숲노래 책숲〉이라고 하는 이곳도 비질과 걸레질을 비롯해서 차곡차곡 더 손끝을 보태어 가다듬고 갈무리하는 일부터 다시 펴려는 마음이랄까요.
서울에 집이 모자라서 새로 지어야 한다고 말이 많습니다. 그런데 서울에는 이미 집이 너무 많습니다. 서울에는 집이 모자라다기보다 ‘들’이 없고 ‘숲’이 모자랍니다. 서울사람은 서울에서 들(논밭)을 일구지 못 합니다. 서울 한복판은 땅값이 비싸니까 더 높이높이 치솟는 잿더미(시멘트 구조물)를 놓아야 한다고 여기더군요. 그러나 곰곰이 헤아려 볼 노릇입니다. 모든 잿더미(시멘트 구조물)는 되쓰지 못 합니다. 그저 쓰레기(건축폐기물)입니다. 올해에 쉰겹이나 일흔겹으로 높다랗게 올리더라도, 앞으로 쉰 해나 예순 해 뒤에는 어쩔 셈인지 헤아려야지요.
나무 한 그루는 서른 해만 자라도 우거집니다. 나무 한 그루는 쉰 해만 자라도 아름드리로 뻗습니다. 나무를 잔뜩 심어야만 숲을 이루지 않습니다. 나무 한 그루가 쉰 해를 느긋이 자라면서 두온(200)이나 즈믄(1000)이라는 해를 느긋이 살아낼 수 있는 터일 적에 비로소 ‘마을’이라는 이름이 걸맞습니다.
우리나라는 일본굴레(일제강점기)에 시달리면서 아름나무를 잔뜩 빼앗기고 잃었습니다. 잇달아 터진 한겨레싸움(한국전쟁)에서는 온나라 온숲이 망가지고 불타야 했습니다. 지난날에는 어떤 작은마을이어도 어귀에 아름드리로 나무가 여러 그루 우람하게 섰습니다. 또한 ‘숲정이’라는 오랜 낱말처럼, 모든 마을은 나무로 푸르게 감싸는 모습이었습니다.
서울은 새집을 더 짓지 않아야 합니다. 서울은 ‘이미 있는 높은 잿집(아파트)’을 하나씩 허물어서 ‘즈믄해(1000년)를 살아낼 나무’가 자랄 푸른터로 돌릴 노릇입니다. 이러면서 시골 작은마을에서 빈집을 고쳐서 느긋하면서 오붓하게 살아갈 보금자리라는 길을 함께 열 노릇이라고 봅니다.
시골에서도 서울에서도 나무를 돌보고 사랑하는 손길로 함께 지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크거나 넓다란 잿집이 아닌, 수수하고 조촐한 작은집에 마당과 뒤꼍과 뜨락을 함께 품으면서 나무를 심을 수 있는 ‘푸른집’으로 거듭나야지 싶습니다. 이제는 틈을 내는 길을 생각할 때 아닐까요? 이제는 집마다 띄엄띄엄 떨어져서 사이에 나무가 우거지는 ‘푸른마을’로 피어나야 하지 않을까요? 커다란 흙수레로 커다랗게 짓는 커다란 논밭이 아닌, 누구나 손으로 가볍게 일구어서 짓고 나누는 작은들(작은논밭)부터 서울 한복판에 들어서기를 빕니다.
시골은 작은들을 없애면서 노래가 사라졌고, 노래가 사라지면서 어린이가 사라졌고, 어린이가 사라지면서 놀이가 사라졌습니다. 손으로 심고 가꾸고 지을 만한 땅뙈기를 모든 살림집이 누릴 때부터 어떤 새일(4차산업)도 즐겁게 싹틀 만합니다. ‘살림짓기’부터 집집마다 자리잡을 수 있어야 ‘서울쏠림’을 풀면서 온나라가 한마음 한뜻 한살림으로 나아갈 만하다고 봅니다. 별빛처럼 배롱배롱 밝은 배롱꽃이 얼추 온날(100일)째 피고 집니다. 배롱꽃과 누런들이 나란한 가을빛을 시골뿐 아니라 서울이웃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앞길을 그립니다.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푸른말로 글빛노래 시 따라쓰기》,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