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삶읽기 / 숲노래 마음노래

수다꽃, 내멋대로 61 힘들거나 가볍거나



  어릴적부터 늘 짐꾼으로 살았다. 요새는 안 그럴 텐데, 예전에는 아무리 어리더라도 누구나 짐꾼이었다. 아마 고장마다 다를 수 있을 테니, 나는 내가 나고자란 고장을 바탕으로 얘기를 해야 옳다고 본다. 나는 인천에서 1975년에 태어나서 남구·중구·동구에서 지내는 동안 으레 두 손 가득히 등에도 수북히 짐을 쥐고 얹고 짊었다. 인천에서는 순이돌이를 안 가렸다. 가시내도 머스마도 똑같이 고스란히 짐순이에 짐돌이로 살았다. 재미있다면 재미있을 텐데, 어린배움터(국민학교)를 다니던 1982∼87년 여섯 해를 돌아보면, 길잡이(교사)가 아이들을 몽둥이나 손찌검으로 호되게 다스릴 적에 순이돌이를 똑같이 두들겨팼다. 1986∼87년 무렵에는 ‘순이가 돌이보다 덜 맞는’ 얼거리로 바뀌었는데, 어릴적에는 잘 몰랐지만, 끝자락 이태는 우리나라에 들물결(민주화운동)이 넘실거렸고, 이 바람에 지난날 어린순이는 어린돌이보다 조금 덜 얻어맞으면서 하루를 보냈다.


  곧잘 예전 일이 또렷하게 떠오르는데, 1986∼87년에 ‘매맞는 어린돌이’는 으레 길잡이한테 “선생님, 왜 여자애들만 살살 때려요? 왜 여자애들은 남자애들 반밖에 안 때려요?” 하고 따진다. 그러면 길잡이라는 놈팡이는 “부럽냐? 그럼 너희도 여자로 태어나야지. 너희는 남자로 태어난 잘못으로 여자애들 몫까지 맞으면 돼!” 하면서 이기죽거렸다.


  지난날 ‘매맞는 어린이’ 이야기를 발자취(역사)로 적어 놓는 글바치(학자)가 있을까? 아마 다들 1986∼87년이라고 하면 들불을 이야기할 뿐, 또 전두환을 끌어내리던 너울을 다룰 뿐, 그때에 아이들이 얼마나 매맞고 시달리고 들볶이고 짓눌리면서 눈물바람으로 하루를 살았는지는 못 다루거나 안 짚는다고 느낀다.


  아침이면 아침이라서 때린다. 먼저 집에서 맞는다. 엄마나 아빠한테 맞고서 하루를 여는데, 언니오빠가 있으면 언니오빠가 성풀이로 동생을 때린다. 나는 집에서 막내였으니 언제나 ‘매벌이’ 구실이었다. 이웃집 막내도 나랑 마찬가지이다. 한또래이지만 언니오빠 자리에 있는 동무는 아침에 엄마아빠한테서 맞은 앙갚음을 동생한테 하고서 나온다. 그런데 동생이 없다면? 같은 배움터에서 힘없는 또래나 동생을 때리거나 괴롭힌다. 이리하여 나는 아침부터 집과 마을과 배움터에서 잇달아 맞는다. 이윽고 길잡이가 우리 앞에 서면 이 핑계에 저 탓을 뒤집어씌워서 1교시부터 6∼8교시까지 신나게 매바심을 한다. 겨우겨우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언니오빠나 한또래한테 걸려서 저녁매를 맞고, 집으로 돌아가면 또 집에서 엄마아빠에 언니오빠한테 다시금 매를 맞는 나날이다.


  나는 하도 얻어맞고 산 터라 그들이 어떻게 때리고 괴롭혔는지 낱낱이 되새기거나 적을 수 있다. 맞는 그 자리에서는 넋을 비운 채, 이른바 ‘유체이탈’을 하고서 얻어맞는다. 그래야 아픈 줄 못 느낀다. 그냥그냥 이렇게 살았는데, 용케 목숨을 잃지 않으면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느끼면서, 이 목숨을 건사할 수 있어서 고맙다고 돌아본다. 이러면서 생각한다. ‘나는 왜 어릴적에 그토록 얻어맞은 나날을 안 잊을까?’


  가만히 보면 어떤 일이건 잊지 않는다. 모든 일은 우리 마음과 머리와 살갗과 뼈와 이와 머리카락과 눈코귀입에 고스란히 남는다. 우리 스스로 ‘잊었다’고 둘러댈 수 있지만, 우리 몸은 하나도 안 잊는다. 그래서 다시금 곱씹는다. ‘나는 참말로 왜 그 끔찍한 짓을 못 잊지?’


  우리는 모든 일을 배우면서 살아간다. 가벼운 일이나 힘든 일이란 없다. 그저 다 다르게 배우면서 스스로 북돋우고 살리는 길이다. 가벼운 일이어도 구태여 가볍다고 여기지 않고서 맡으며 하면 된다. 힘들다는 일이어도 굳이 힘들다고 여기지 않고서 맡으면 어느새 끝을 낸다. 가벼운 일을 가볍다고 여기기에 으레 말썽을 일으키거나 잘못하거나 틀어진다. 힘들다는 일을 지레 힘들다고 여기는 탓에 그만 짓눌리고 무게에 사로잡혀서 허우적거리거나 허둥허둥 헤맨다.


  가벼운 일이기에 아이들이나 이웃한테 넘길 수 있다. 가볍게 해보라는 뜻으로 일감을 나눌 만하다. 힘든 일이기에 슬며시 달아날 수 있다. 애써 내가 안 하더라도 기꺼이 맡거나 억지로라도 맡는 다른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니까, 가볍든 힘들든 그냥 하면 다 이루는 일이고, 정 못 하겠구나 싶으면 내려놓거나 달아날 노릇이다.


  일도 놀이도 말도 삶도 가볍거나 힘들지 않다. 언제나 다 다른 일과 놀이와 말과 삶일 뿐이다. 더 신나는 놀이를 해야 더 신나지 않다. 심심한 놀이를 하기에 심심하지 않다. 마음에 스스로 뿌린 씨앗 그대로 하는 일과 놀이와 말과 삶이다. 어떤 마음으로 다가서고 마주하고 품느냐에 따라서 늘 다르게 맞닥뜨리고 부딪히고 겪는다.


  얼추 마흔 살 언저리에 이를 때까지 “날마다 신나게 얻어맞고 얻어터지며 살았다”는 말을 거의 벙긋조차 하지 못 했고, 어쩌다 말을 해야 하면 눈물부터 핑 돌았다. 그런데 이제는 가끔 “늘 맞고 산 매벌이였어요” 하고 스스럼없이 말할 뿐 아니라, 빙글빙글 웃으면서 말할 수 있다. 나는 이런 나를 그저 지켜본다. 왜 잊지 않는지, 그리고 잊지 않으면서 무엇을 배우는지, 이리하여 온삶을 가로지르는 길이란 우리한테 어떤 빛줄기인지 새삼스레 돌아본다.


  나는 내가 우리말꽃(국어사전)이라는 꾸러미를 손수 쓰는 길을 걸을 줄 미처 몰랐지만, 아무래도 진작부터 알았다고 느낀다. 다만, 아주 오랜 예전 마음을 들춰 본다면, “밥벌이를 하는 우리말꽃은 하지 않겠어. 밥벌이로 하면 지치거든.” 같은 혼잣말이 나왔다. 밥벌이를 하며 고된 엄마아빠에 이웃사람을 늘 지켜본 터라, 아무리 뜻있거나 빛나는 일거리라 하더라도 밥벌이로 하면 아니될 노릇이라고 느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말꽃이라는 꾸러미를 손수 써야 할까?


  이 수수께끼를 품으면서 세 살이 지나고 다섯 살이 흐르고 일곱 살을 건너고 여덟아홉 살에 열 살에 이르면서 천천히 보인다. “그저 언제나 즐겁게 하면 될 뿐이구나!” 그래서 언제나 즐겁게 얻어맞았다. 그래서 언제나 몸벗기(유체이탈)를 바로바로 하면서 신나게 얻어맞았다. 그래서 그토록 얻어맞고 살갗이 찢기고 뼈가 부러지고 살점을 파내야 했어도, 내 몸에는 흉터가 하나조차 없다. 다만, 두바퀴를 달리다가 치여죽을 뻔한 숱한 일 탓에 흉터가 남았는데, 이제는 이 흉터조차 차츰차츰 사그라라든다. 아마 예순 살 무렵이면 ‘뺑소니에 치인 흉터’까지 감쪽같이 사라질 만하다.


  말이란 모두 마음이다. 마음에는 좋은 마음과 나쁜 마음이 없다. 그저 다 다른 모든 삶을 담는 마음이라는 그릇이자 그루이다. 사람은 저마다 ‘나’이다. 그래서 ‘나’인 사람은, 사람을 살리는 숨(바람)을 내주는 ‘나무’ 곁에서 함께 ‘그루’로 선다. 꽃길이건 가시밭길이건 언제나 ‘길’이다. 그래서 우리가 쓰는 말에는 좋은말과 나쁜말이 없이 오직 말만 있으니, 이 말이란 ‘삶말’이면서 ‘마음소리’이다.


  이오덕 어른이 걸은 길을 톺아보자면, 처음 태어나서 맞이한 시골집에, 얼음나라(일제강점기)에 다니던 배움터에, 얼음나라에서 길잡이(초등교사)가 되어 일본책(일본교과서)으로 일본말을 우리 아이들한테 가르쳐야 하던 일에, 1945년 8월이 지나가고 나서야 뒤늦게 창피한 줄 깨달은 일에, 그동안 창피하게 저지른 ‘길잡이(초등교사)’라는 얼룩을 지우고 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홀로 속앓이를 하는 일에, 마침내 실마리를 찾아서 멧골마을 아이들하고 글쓰기랑 그림그리기랑 놀이랑 노래랑 멧밭짓기랑 여러 하루를 나누는 길을 걸어가는 일에, 이러면서 글쓰기모임을 여는 일에, 권정생을 만나서 마음동무로 사귀는 일에, 박정희·전두환한테서 아이들이 안 시달리도록 품에 안은 일에, 이러다가 배움터에서 쫓겨나야 하던 일에, 처음으로 대학교에서 젊은이한테 글쓰기를 가르치다가 우리나라 민낯을 들여다본 일에, 여태 해오던 ‘교육비평·어린이문학비평’을 한동안 접고서 《우리글 바로쓰기》부터 처음으로 열어야겠다고 깨달은 일에, 조금 우리말과 우리글을 알아차렸다고 느낄 무렵 더는 일을 할 수 없는 아픈 몸으로 치달아 그만 2003년에 흙으로 돌아간 일에, 어느 일을 보더라도 온통 가시밭길이었다고 여길 만하다.


  그러나 온통 가시밭길이었기에 어른 한 사람이 설 터전이 생긴다. 가시밭길을 걷기에 “나 혼자 이 가시밭길을 걷지 않는구나. 다들 이 가시밭길에 서는구나.” 하고 알아본다. 하루아침에 가시밭길을 꽃길로 바꿀 수는 없지만, 씨앗을 심기로 한다. 《나무를 심는 사람》이라는 그림책이 있지만, 우리는 ‘나무부터 심을 수 없’다. 언제나 씨앗부터 심는다. ‘나무’ 또한 씨앗부터 돌보면서 키운 숨결이다. ‘나무심기’란 “남이 해놓은 것을 슬쩍 가져다가 한다”는 뜻이다. 나무심기를 해도 안 나쁘지만, 우리가 할 일이란, 남이 해놓은 나무를 가져다가 옮겨심는 일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모두 새롭게 씨앗부터 심을 일이어야 아름답고 사랑스럽다.


  우리는 누구나 아이요 어른이다. 모든 사람은 다 아이답고 어른답다. 우리는 누구나 아이답게 아름답기에 하늘누리로 갈 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어른답게 어질어 사랑스럽기에 이 삶을 슬기롭게 지을 수 있다. 떠난 어른은 저 높거나 먼 데에 없다. 떠난 어른은 늘 우리 마음자리에 있다. 왜냐하면, 우리도 누구나 다 다르게 어른이거든.


  이렁저렁 힘들거나 가벼운 일을 되새겨 본다. 숱하게 얻어맞고 걷어차이며 뒹굴던 어린 나날 그대로, 어른이라는 몸을 입은 오늘도 똑같이 얻어맞거나 걷어차이거나 뒹군다고 여길 만하다. 나는 “이런 종이는 없는 어른 이웃”을 기다린다. ‘이런 종이’란 ‘졸업장·자격증·면허증’이다. 아이들한테는 아예 신분증부터 없다. 아이들한테 여권을 만들어 주기도 하지만, 아이는 모름지기 “이런 종이”는 하나도 안 거느리는 맨손이다. 아이는 오직 가볍게 맨손으로 모든 놀이를 하고 모든 소꿉을 누리다가, 어른 곁으로 다가와서 “내가 뭘 좀 도울까?” 하고 상냥하게 스스럼없이 묻는다.


  “이런 종이”가 없는 사람은 늘 상냥하게 스스럼없이 다가와서 즐겁게 어깨동무를 하는 이웃으로 서더라. 그러나 “이런 종이”가 있는 사람은 하나같이 길미를 따지고 돈과 이름과 힘을 살피더라.


  내가 바라는 이웃이란, “저런 종이”가 있는 사람이다. “저런 종이”란 손수 붓(필기구)을 쥐고서 천천히 적는 빈종이를 가리킨다. 언제 어디에서나 주머니나 가방에 빈종이에 붓을 챙기는 “저런 종이”가 있다면, 이이는 바로 나한테 이웃이요 동무라고 느낀다.


  오늘날 우리나라 글밭(문학계·언론계·작가집단)을 보면, 하나같이 “이런 종이”를 앞세우더라. “저런 종이”를 챙기는 사람을 아주 드물게 겨우 만난다. “이런 종이”를 앞세우는 글바치는 으레 모든 글밭에서 돈과 힘과 이름을 거머쥐면서 ‘베스트셀러 만들기’를 함께한다. 그래서 나는 “저런 종이”를 손에 쥔 이웃하고 마주앉아서 천천히 손으로 노래 한 자락을 새로 쓴다. 나는 ‘베스트셀러 만들기’를 할 뜻도 안 할 뜻도 없다. 나는 그저 ‘삶을 담은 마음을 그리는 소리인 말을 새롭게 그리는 글에 사랑이라는 씨앗 한 톨을 푸른들빛과 파란하늘빛·파란바다빛으로 고르게 담아서 아이 곁에서 나누는 오늘을 노래하려는 일’만 바라본다.


  우리말꽃이라는 꾸러미를 쓰기에 모든 책을 읽고 모든 말을 듣고 모든 글을 쓴다. 여러모로 보면 미친짓이다. 참으로 미친놀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우리 삶이란 워낙 누구나 다 다르게 미친삶이지 않은가. 머리가 핑그르르 도는 미친길일 수 있고, 서로서로 미치는(닿는·다가서는·스미는) 길이기도 하다. ‘종이’에 두 가지가 있듯, ‘미치다’에 두 가지가 있다. 우리가 쓰는 모든 말은 적어도 두 가지로 다 다르게 결과 길이 다르다. 이를테면 ‘눈’과 ‘배’와 ‘말’과 ‘피’와 ‘키’는 그냥 한글로 적어 놓으면 어떤 낱말인지 가릴 수 없다. 그러나 곰곰이 짚으면 이런 길과 저런 길로 다르되 언제나 하나로 맞물린다.


  가벼운 일이란 늘 힘든 일하고 맞닿는다. 힘든 일이란 노상 가벼운 일하고 맞물린다. 가벼운 일을 맡으니 더 힘들곤 하고, 힘든 일을 맡으니 더 가볍곤 하다. 그래서 우리는 일을 하면 된다. 좋은일도 나쁜일도 아닌, 가볌일도 힘듦일도 아닌, 오롯이 일을 하면 된다. 깨끗한 말이나 멋진 말이나 훌륭한 말이나 아름다워 보이는 말이 아닌, 그냥 말을 하면 된다. 그냥 말을 할 적에는 ‘장애인·비장애인’을 가르는 굴레가 말끔히 사라진다. 그냥 말을 하기에 ‘왼·오른’이나 ‘순이·돌이’를 나누는 담벼락이 깨끗이 녹는다.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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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 숨은책읽기 2025.6.19.

숨은책 1064


《서울시내 일제유산답사기》

 정운현 글

 한울

 1995.10.2.첫/1996.1.10.재판



  처음 《서울시내 일제유산답사기》를 만나던 1995년 가을을 떠올립니다. 갈수록 싸움터(군대)가 나아진다고 하지만, 지난 2024년 5월 23일에 ‘여중대장 가혹행위 훈련병 살인(제12보병사단 훈련병 사망 사건)’이 일어납니다. 아무리 이 나라가 차츰 어깨동무에 가깝게 가더라도 ‘부산 돌려차기남 사건’처럼, ‘묻지 마’ 주먹질에다가 ‘일부러’ 주먹질이 판칩니다. 저는 1995년 11월 6일에 싸움터에 들어가는 날을 앞두고서 하루하루 ‘끝말(유언)’을 적었습니다. 1995년은 길에서도 주먹떼(깡패·조폭)가 버젓이 날뛰었고, 배움터에서는 ‘사랑매’ 아닌 그냥 주먹질이 흔했습니다. 저는 싸움터에서 ‘상병 5호봉’까지 날마다 얻어맞아야 했고, 이 바보짓을 동생들이 안 물려받기를 바랐기에 ‘상병 6호봉’부터 혼자만 주먹질을 안 했습니다. 또래(입영동기)는 저더러 “야, 너 혼자 신선이야? 너 혼자 하느님이야? 네가 얘들을 안 때리니까 우리만 나쁜놈 같잖아? 여태까지 맞은 게 얼마인데, 넌 분통도 안 터져? 제발 너도 좀 같이 때려!” 하고 외쳤지만, 귓등으로 흘렸습니다. 중대장만 순이가 맡는대서 싸움터가 안 바뀝니다. 아예 싸움터를 없애야 하는데, 정 못 없애겠다면, 아이를 낳아서 돌본 아주머니가 중대장·연대장·사단장·국방부장관을 맡을 노릇입니다. ‘아이 아줌마’는 슬기로나 힘으로나 마음으로나 으뜸인걸요.


  《서울시내 일제유산답사기》는 줄거리가 훌륭합니다. ‘일제유산’이라는 이름을 이 책이 비로소 이 나라에 퍼뜨렸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글님은 ‘큰것’만 보려고 했습니다. ‘작은것’, 이른바 수수한 사람이 살아간 곳에 깃든 ‘작은 일제유산’은 아예 안 쳐다보았다고 할 만합니다. 일본말씨하고 일본한자말도 ‘일제유산’일까요? ‘국민학교’는 이름을 바꿔도 모든 벼슬꾼(정치인)은 늘 ‘국민’을 섬기겠다고 외칩니다. ‘국민’이란 뭔가요? “일본우두머리를 섬기는 나라를 이루는 사람”이 ‘국민’이요, “일본우두머리를 안 섬기는 몹쓸 부스러기”를 ‘비국민’이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쪽이든 저쪽이든 ‘벼슬을 쥔 무리’를 섬겨야만 ‘국민’인 셈이고, 벼슬무리를 안 섬기면서 아이를 돌보고 사랑하는 수수한 사람은 몽땅 ‘비국민’으로 여기는 끔찍한 일제유산이 아직도 온나라에 서슬퍼렇게 흐르는 판입니다.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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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 숨은책읽기 2025.6.19.

숨은책 1055


《꽃길》

 윤석중 글

 배영사

 1968.12.23.



  “문학을 문학만으로 본다” 같은 말을 누가 할는지 곱씹을 노릇입니다. “문학을 문학만으로 보자”고 외치는 분 가운데 ‘이원수 글’을 그저 ‘문학’만으로 보는 분은 드물고, ‘윤석중·방정환 글’은 그저 ‘문학’만으로 보려고 하더군요. 이원수는 ‘친일시’를 썼되, 1945년부터 온삶을 바쳐서 어린이 곁에 서며 어린이를 지키는 글을 쓰고, 가난한 이웃과 어깨동무하는 일을 했습니다. 방정환은 《어린이》라는 달책을 냈되, 일본 달책을 늘 그대로 따왔고 ‘일제강점기에 얼음(빙수)을 날마다 그렇게 잔뜩 사먹은’ 삶입니다. 윤석중한테서 친일시를 못 찾는다지만, 이승만·박정희·전두환에 이르는 동안 언제나 ‘권력해바라기’로 온삶을 누리면서 외려 어린이하고 동떨어진 높은벼슬을 거느렸습니다. 아직도 ‘김동인·서정주·고은’을 그저 ‘문학’만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분이 많은데, 그러면 왜 〈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는 그저 ‘언론’만이라고 여기지 않을까요?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잘못이 잘못일 수 없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뒤에 걸어가는 삶을 보아야 하지 않나요?


“지금 하는 일 : 새싹회 회장, 조선일보사 편집고문, 중앙 아동 복리위원, 방송용어 심의위원, 청소년보호 대책위원, 서울특별시 문화위원, 대학적십자사 청소년 자문위원장, 대한교련 청소년 복지분과 위원장, 문인협회 이사, CISV 한국협회 부회장, 난파 기념 사업회 이사장, 중앙대학교 사범대학 보육학과·성신여자 사범대학 초등교육과·국민대학 보육학과 강사”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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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 숨은책읽기 2025.6.19.

숨은책 1056


《시사만평 2호》

 이명숙 엮음

 사시평론사

 1990.2.1.



  낱말책을 뒤적이는 한자말 ‘시사’가 열여섯 가지나 있습니다. 이 가운데 세 가지는 쓰지만 열세 가지는 아예 쓸 일이 없습니다. 《시사만평 2호》라는 작은책에 붙은 ‘시사(時事)’입니다. 요즈음에도 ‘시사만평’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쓰는데, 거의 ‘정치·사회’를 그림감으로 삼습니다. “크게 벌어진 일”은 으레 나라지기나 벼슬아치하고 얽힙니다. 가만히 본다면 ‘정치·사회를 비꼬면서 속눈을 틔우’려는 붓끝일 테지만, 곰곰이 다시 본다면 ‘정치·사회에 파묻히고 비꼼붓에 사로잡혀서 그만 우리 보금자리·마을·터전·들숲메바다는 모조리 잊거나 등지’려는 붓끝과 같습니다. 모든 ‘시사만평’은 으레 날마다 나오는데, 날마다 이 붓끝을 펴려고 ‘새뜸(신문)’을 뒤적입니다. 몸소(직접경험) 부대끼거나 찾아보는 붓끝이 아닌, 거쳐서(간접경험) 얻은 몇 가지 조각을 잇는 얼거리예요. 또한 모든 붓끝이 서울에 쏠립니다. 서울 한복판에서 나라일(정치·사회)을 꾸린다고 여기느라 온통 서울 목소리인데, 이러다 보니 시골에서 터지는 말썽거리는 아예 눈감거나 놓치거나 흘리기 일쑤요, 무엇보다도 우리가 새롭게 살림을 가꾸고 사랑으로 삶을 짓는 길을 붓끝으로 안 담거나 못 담습니다. ‘싸워서 없앨 놈’만 다루려고 한다면 오히려 얕지 않을까요? ‘살면서 풀 이야기’를 다뤄야 비로소 참다이 ‘살림붓(시사만평)’이지 않을까요?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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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삶읽기 / 숲노래 마음노래

수다꽃, 내멋대로 65 걸으면서 쓴다



  나는 이웃을 만날 적에 미리 옮겨적은 노래(시)를 건네곤 한다. 내가 건네는 노래종이(시를 적은 종이)를 받는 분은 곧잘 “글씨가 참 정갈하네요” 하고 말씀해 주시는데, 나는 자리맡에 앉아서 손글씨를 쓰는 일은 아예 없다시피 하다. 나는 자리맡에 앉을 적에는 ‘낱말책 새로쓰기’로 거의 온하루를 보낸다. 손글씨는 시골버스를 타고 움직이면서 저잣마실이나 나래터(우체국)를 다녀오는 길이라든지, 먼고을로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시외버스를 타고서 다녀오는 길에 쓴다.


  ‘버스에서 책읽기’는 열일곱 살 때부터 했다. 열일곱 살 여름에 우리 아버지가 갑자기 집을 옮기는 바람에, 늘 걸어서 오가는 배움터를 이때부터 버스를 타야만 오갈 수 있었다. 버스를 타고도 40분 남짓 걸렸는데, 처음 하루이틀은 길을 익히느라 오직 바깥만 바라보았다면, 길눈을 익힌 뒤에는 책을 읽었다. 1991년 인천 연수동은 이제 막 삽질을 하던 무렵이라 길이 어마어마하게 나빴고, “이런 길을 다니다가는 버스가 망가지겠구나” 싶도록 흔들리고 덜컹이는 흙길(비포장도로)을 오르내렸다. 동무들은 “야, 넌 어떻게 이런 버스에서 책을 읽어? 이런 버스에서 영단어를 어떻게 외워? 이런 버스에서 ‘수학 정석’을 푼다고?” 하면서 놀라지만, 나는 동무들한테 이렇게 대꾸했다. “이런 덜컹버스에서는 책을 안 읽거나 수학문제를 풀지 않거나 영단어를 외우지 않으면 오히려 멀미가 나. 책을 읽고 수학문제를 풀고 원서(영어책)를 읽어야 마음을 다스리면서 멀미가 안 나.”


  2008년에 큰아이를 낳으면서 ‘버스에서 책읽기’를 멈췄다. 아기가 있으니 아기를 보면서 아기랑 놀고, 아기한테 끝없이 노래를 들려주고 함께 춤을 추었다. 큰아이가 2009년부터 한글을 익히겠다며 아버지한테 달라붙느라 2009년부터 큰아이한테 읽힐 노래(시)를 썼다. 다른 어느 곳도 아닌 바로 버스와 길에서 노래를 쓰고, 버스와 길에서 읽히고, 버스와 길에서 가락을 입혀서 읊었다.


  큰아이는 혼자 마음껏 걸을 수 있던 2010년 무렵부터 ‘걸으며 책읽기’를 했다. 나는 큰아이 곁에서 ‘걸으며 사진찍기’하고 ‘걸으며 책읽기’를 나란히 했다. 다만, 나는 1991년뿐 아니라 1982년부터 늘 큼지막하고 묵직한 등짐을 짊어진 채 걸었고, 버스를 탔고, 버스에서 책읽기를 했고, 걸으면서 책읽기를 했다.


  어린배움터(국민학교)를 다니던 1982∼1987년 사이에 나보다 걸음이 빠른 사람을 꼭 하루 스쳤다. 1988∼2005년 사이에 나보다 걸음이 빠른 사람을 새로 한 사람 스쳤다. 2006∼2025년 사이를 사는 동안, 나보다 걸음이 빠른 사람이라면 우리집 작은아이가 있다. 다만, 나보다 걸음이 빠른 세 사람은 등짐을 짊어지지 않은 맨몸일 뿐이다. 나는 맨몸으로 걸어다닌 일이 아예 없다시피 하다. 늘 앞뒤로 잔뜩 짊어지며 걷는다.


  2006년 무렵이었지 싶은데, 어느 이웃님이 “최종규 씨가 얼마나 빨리 걷는지 궁금해서요, 등짐을 벗고서 같이 걷기를 겨루면 어떨까요?” 하고 여쭈었다. “네? 왜 겨뤄야 해요? 저는 그저 길에서 하루를 흘리기 싫어서 그저 신나게 걸을 뿐인데요.” “그래도, 등짐을 푼 맨몸으로 같이 걸어 봐요.” 열 해에 하루조차 거의 없을, 아니 쉰 해를 살며 등짐 없이 걸어 본 일이란 다섯손가락에 꼽을 만큼 없을 일을, 어느 날 겪어 보았다. 그런데 등짐이 없이 맨몸으로 걷자니, 너무 힘들더라. 이미 나는 무게를 잔뜩 이고 진 몸에 맞게 팔다리를 놀리는 매무새에 익숙한 터라, 아무 짐이 없이 빨리 걸어가기란 오히려 너무 어렵더라. 몇 걸음 떼다가 그만두었다.


  충북 음성 생극면 버스나루에서 충북 충주 무너미마을까지 8킬로미터 즈음이다. 생극 버스나루에서 무너미마을까지는 오르막이다. 이 오르막을 2003∼2007년에 50분∼70분 사이로 걸었다. 늘 등짐차림이었다. 무너미마을에서 생극 버스나루는 내리막이다. 이 내리막을 두바퀴로 달릴 적에 4분∼7분 사이로 갈랐고, 거꾸로 오르막일 적에는 15분∼24분 걸렸다.


  인천 배다리(창영동)에서 서울 합정나루까지 32킬로미터 즈음 나오는 듯싶은데, 서울과 인천에서 살던 무렵에 이 길을 두바퀴로 50∼70분 사이로 달렸다. 걸으면 두 시간 반이 넘었다. 어떤 분은 말이 되느냐고도 묻지만, 왜 말이 안 될까? 예전에 이 길을 달리거나 걸을 적에는 언제나 때(시간)를 쟀다. 달리거나 걷고서 킬로미터도 쟀다. 이제는 구태여 이런 짓을 안 하지만, 한때 두바퀴에 때바늘(속도계)를 달고서 사람들한테 보여주기도 했다. 두바퀴에 붙인 때바늘은 길에서 쇳덩이(자동차)가 나를 치고서 달아난 탓에 조각나서 사라졌다.


  요즈음 두바퀴를 달리면서 어림해 보니 24∼28킬로미터로 느릿느릿 밟는구나 싶다. 더구나 요새는 예전처럼 안 걷는다. 요새는 ‘걷는읽기’하고 ‘걷는쓰기’를 한다. 그렇지만 내가 ‘걷는읽기’하고 ‘걷는쓰기’를 하더라도 둘레에 나란히 걷는 웬만한 사람들보다 훨씬 빠르더라. 서울·부산·인천으로 마실을 가면, 쇳길(전철)을 갈아탈 적에도 걷는읽기하고 걷는쓰기를 하는데, 나는 으레 디딤돌(계단)로만 오르내린다. 디딤돌을 오르내릴 적에도 걷는읽기하고 걷는쓰기를 한다. 이미 이런 매무새는 1991년부터 붙인 터라, 등에 묵직하게 책짐을 짊어지고서도 꽤 빠르게 디딤돌을 오르내리면서 읽고 쓴다.


  모든 사람은 모름지기 ‘느리’지 않다. ‘한글’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지었을 뿐 아니라, 우리말글 밑동을 처음으로 닦은 주시경 님이 있는데, 주시경 님이 새길(신학문)을 배울 적에, 서울에서 인천 싸리재(중구 답동·경동)까지 날마다 걸어서 오갔다고 했다. 이오덕 님이 남긴 글을 보면, 경상북도 멧골마을 아이들은 아침저녁으로 멧길을 네 시간 남짓 걸어서 오가기 일쑤였다. 우리는 구태여 빨리걷기를 해야 할 까닭이 없다만, 고작 쉰 해 앞서만 해도 “누구나 꽤 빨리 걸어서 길을 오갔다”고 할 수 있다. 늘 걷는 사람은 ‘걷기’가 그다지 느리지 않은 일인 줄 안다. 오히려 늘 걷고 오래 걷는 동안 스스로 마음을 추스르고 생각을 가다듬고 몸을 북돋우는 줄 알게 마련이다.


  아기수레를 굳이 써야 할 까닭이 없다. 아기를 안고 업고 걸리면 된다. 이따금 짐을 쇠(자동차)한테 맡길 수 있되, 언제나 스스로 짊어지고서 걸어다니면, 우리 몸은 오래오래 한결같이 튼튼하면서 빛난다고 느낀다. 무엇보다도, 등짐으로 걸어다니면 이동안 책읽기와 글쓰기를 실컷 누린다. 등짐걷기를 하면서 책읽기와 글쓰기를 한다면, ‘껍데기 아닌 속읽기’에다가 ‘글치레 아닌 삶쓰기’를 스스럼없이 하게 마련이다. 반듯한 책마루(서재)가 있어야 책을 읽거나 글을 쓰지 않는다. 부엌에서 쓰고, 마당에서 쓰고, 길에서 쓰면 된다. 한 손으로는 아기를 안고 달래되, 다른 손으로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쓸 수 있다. 걸으면서 읽고 쓰는 이웃이 한 사람씩 늘어난다면,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이 별이 아름답게 거듭나리라 본다.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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