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집놀이터 / 숲노래 사랑꽃

숲집놀이터 294. 남들은 책날(세계 책의날)



해마다 4월 23일을 ‘책날(세계 책의날)’이라 하는 듯하다. 4월 23일이 저물녘에 비로소 알아챈다. 속으로 “그런가?” 하고 혼잣말을 하다가 이내 잊는다. 집안일을 하고, 집살림을 맡고, 읍내 나래터(우체국)로 얼른 글자락을 부치러 시골버스를 타고서 달려가야 하고, 숨돌릴 틈이 없이 바깥일을 보고서 겨우 어느 기스락 걸상에 앉아서 다리를 주무른다. 퉁퉁 부은 다리를 천천히 주무르고, 만지기만 해도 욱씬거리는 발가락을 하나하나 푼다. 두 아이하고 날마다 쓰는 나눔글(교환일기)을 쓰고 나니 팔뚝과 손목마저 시큰거린다. 지난 4월 19∼22일을 고스란히 부산·대구·서울을 돌고서 고흥으로 돌아온 터라 등허리까지 결린다.


그나저나 오늘이 책날이라고 하지만, 시골사람으로서는 하나도 느낄 수 없다. 어느새 오늘 아닌 어제로 넘어가고, 마당에만 서도 밤개구리와 밤풀벌레와 밤새가 베푸는 소릿가락이 너울거린다. 구름이 모두 걷힌 밤하늘은 캄캄한 어둠빛이면서 별이 초롱초롱하다. 멍하니 하늘바라기와 들바라기를 하면서 후박나무 곁에 선다. 후박나무는 한봄부터 새잎과 꽃을 내면서, 늦봄부터 한여름 사이에 가랑잎을 떨군다. 숱한 늘푸른나무는 한겨울에도 잎이 푸르되, 봄여름에 잎갈이를 한다.


책날이기에 책을 기리고 그리는 이웃님이 많다. 그런데 책날에 나무를 기리고 그리는 이웃님은 드물다. 책날에 들숲메바다를 기리고 그리는 이웃님은 더더욱 적다. 책날에 ‘아이들한테 물려줄 들숲메바다를 푸르고 파랗게 사랑으로 기리고 그리는 이웃님’은 아직 찾아보기 어렵다.


책날이기에 책을 복판에 놓고서 기리고 그려야 맞을 텐데, 책이 어디에서 오는가? 책을 이루는 몸은 바로 들숲메바다에서 온다. 숲에서만 오는 종이가 아니다. 바다가 파란빛으로 넘실거려야 숲이 나란히 푸르고, 숲이 나란히 푸를 적에 들도 함께 푸른데, 들이나 바다가 망가지고 메가 앓으면 숲도 죽어간다. 곧, 책을 이루는 종이란 들숲메바다가 바탕이기에, 들숲메바다한테 먼저 고맙다는 마음을 들려주는 하루일 적에 책날이 빛나리라 본다.


책에 담는 이야기는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아이들을 사랑으로 품고 보살피는 푸른집(싱그러운 보금자리)에서 온다. 책날일수록 더더욱 들숲메바다와 보금자리를 돌아보고 되새기는 이웃님이 늘기를 빈다. 책날일수록 우리가 어른으로서 아이들한테 무엇을 물려주고 남기려는 하루인지 더더욱 깊이 짚고 다루며 생각할 일이라고 본다.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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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 숨은책읽기 2025.4.17.

숨은책읽기 67


《꿈을 비는 마음》

 문익환 글

 백범사상연구소

 1978.4.20.



  나이가 어리다고 젊은이가 아니요, 나이가 많다고 늙은이가 아닌 줄 시나브로 배웁니다. 어릴적부터 이 대목은 늘 느꼈어요. 둘레에 어른다운 어른이 드물었던 터라, 어릴적 제 꿈 가운데 하나는 “나이만 먹는 사람이 아니라 슬기를 먹는 사람이 되자”였어요. “슬기롭게 자라서 이 땅을 디디는 사람으로 살지 않는다면 어른이 될 수 없다”고 여겼어요. 문익환이라는 이름을 곧잘 들었지만 누구인지 모르다가, 1993년부터 이분 책을 찬찬히 찾아서 읽는데, 어느 날 헌책집에서 《꿈을 비는 마음》이란 매우 얇은 꾸러미를 만났어요. 이 손바닥책에 〈전주 교도소로 이감되던 날〉이라는 노래가 있더군요. “감방쪽으로 돌아서는 길목에서 / 말없이 지켜보던 개나리 꽃봉오리들 / 활짝 피며 흩날릴 그 금싸라기들은 / 영영 볼 길이야 없겠지만―” 머리가 허연 할아버지가 차가운 사슬터에서 봄을 그리는 노래를 썼다니, 더욱이 이런 글을 서슬퍼런 박정희 굴레 한복판에 썼다니, 그즈음 다른 글바치는 무엇을 했을까 궁금하더군요. 따뜻한 집에서 붓을 휘두르면서 돈과 이름과 힘을 거머쥔 숱한 이들은 어떤 글을 펼쳤을까요? 꿈을 비는 마음이 없는 이들이 너무 많고, 꿈을 빌지 않는 채 쓰는 글이 너무 넘실거리는 이 나라이지 않나 모르겠습니다.


덧.

94쪽에 ‘고은’이라는 분이 “시집이 나오는 날 나는 내 몇백억원을 다 가지고 나가서 그를 위한 술자리를 마련하고 얼싸안으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다.” 하고 적습니다. 사슬터에 갇힌 사람을 걱정한다는 말이 ‘술자리’라니, 참으로 술망나니인 고은답습니다.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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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 숨은책읽기 2025.4.17.

숨은책 1044


《韓國動亂과 맥아더元帥》

 ? 글

 하혁 옮김

 범국민양서보급회

 1968.11.15.



  인천에서 나고자란 어린이 가운데 몇이나 ‘맥아더’가 좋다고 여기면서 자랐을까 궁금합니다. 저는 맥아더를 좋아한 또래를 한둘 빼고는 아예 못 보면서 자랐습니다. 인천에 있는 골목마을을 내려다보는 곳에 손바닥만 한 ‘자유공원’이라는 데가 있는데, 인천에서 배움터를 다닌 분이라면 으레 이곳으로 봄나들이나 가을나들이를 가야 했습니다. 지긋지긋했어요. 한 군데 배움터만 자유공원으로 봄가을 나들이를 가지 않거든요. 초·중·고가 나란히 이곳으로 우글우글 몰리는데, 여러 배움터 사람들이 북새통으로 뒤덮이면서 앉지도 서지도 쉬지도 못 하는 채 땡볕을 고스란히 받으면서 “맥아더 동상 앞 기념사진”까지 찍어야 겨우 하루를 마치고서, 집까지 먼먼 길을 다시 걸어가야 했습니다. 《韓國動亂과 맥아더元帥》는 누가 언제 낸 어느 책을 훔쳐서 낸 판인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일본책을 훔쳤지 싶습니다. 이 책을 읽으신 분은 빈자리마다 노랫말을 잔뜩 적으셨군요. 마르고 닳도록 읽었을 뿐 아니라, 수첩처럼 삼은 셈인데, ‘인천상륙작전’을 한답시고 월미도를 비롯해 인천 골목마을을 아주 잿더미로 짓밟은 줄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나중에 다 드러난 일입니다만, ‘미국 군인이 보기에 놈(적군)과 우리켠(아군)이 똑같이 생겼기에 그냥 다 밀어버리고(죽이고)서 들이치려’ 했다지요. ‘전쟁영웅’이라는 이름이란 하나같이 “사람을 무시무시하고 끔찍하게 아주 많이 죽인 놈”입니다.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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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 숨은책읽기 2025.4.16.

숨은책 1042


《스무 살까지만 살고 싶어요》

 민초희 글월

 김창완·이장수 글

 길석 사진

 야정문화사

 1990.12.20.첫/1991.12.20.5벌



  ‘13평’이라지만 아무래도 10평이 안 되었지 싶은 집에서 어린날을 보냈습니다. 언니하고 한 칸을 함께 쓰는데, 언니는 늘 소리(라디오)를 들었어요. 저는 소리를 들을 마음이 없어도 언니가 듣는 소리를 내내 들어야 했습니다. 언니가 듣는 소리에 어느 날 ‘민초희’ 이야기가 나왔고, 오래 살지 못 하고서 너머길로 갔다는 이야기가 흘렀습니다. 이윽고 《스무 살까지만 살고 싶어요》라는 책이 나왔으며, 언니 심부름으로 이 책을 사왔습니다. 언니는 푸른배움터를 마치고서 울산으로 일하러 떠났고, 1992년에는 이 책을 바탕으로 보임꽃(영화)이 나오기도 합니다. 몸이 아프던 민초희 님은 다른 또래처럼 배움터를 다니면서 스무 살을 맞이하는 꿈을 그렸다면, 그냥그냥 배움터를 다니던 저나 또래는 “이놈 학교에서 날마다 두들겨맞다가 스무 살을 못 보고서 골로 가지 않나?” 하고 여겼습니다. 더욱이 사내들은 큰배움터에 못 붙으면 곧장 싸움터(군대)로 끌려갑니다. 2025년이 아닌 1994년 싸움터는 그저 주먹질과 발길질로 애꿎은 젊은이가 죽어나가던 데였습니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끝없이 얻어맞는 굴레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는지 까마득했기에 ‘스물’은 너무 멀어 보였습니다. 오늘 이 나라 어린이와 푸름이한테 스물은 어떤 나이일까요? 새롭게 피어나는 꿈을 사랑으로 그릴 만한 첫자락일 수 있을까요?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내 책이 아닌 언니 심부름으로 산 책이라

나한테는 이 책이 없기에

헌책집을 다니던 어느 날

문득 만나서

나도 우리 책숲에 건사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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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 숨은책읽기 2025.4.16.

숨은책 1041


《科學哲學序說》

 김태섭 글

 정음사

 1963.9.10.



  일본에서 ‘철학’을 배우고서 미국에서 종이(학위)를 딴 다음, 서울대학교에서 가르치는 분이 1963년에 내놓은 《科學哲學序說》을 읽으면 토씨만 한글입니다. 한글로 붙인 토씨를 가타가나로 바꾸면 일본책이 될 만합니다. 일본사슬에서 풀린 지 거의 스무 해가 된 무렵에도 우리말로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우리글로 생각을 밝히는 길을 좀처럼 못 연 자취입니다. 이 책을 처음 장만해서 읽은 분은 1976년에 연세대학교 불문과 4년을 다닌 듯합니다. 책에는 다른 종이(영수증)가 둘 깃들었어요. “등록금 162,820원”하고 “앨범대 4000원”이 적히는데, 하나하나 보면 “수업료 105300원, 기성회비 45000원, 실습비 400원, 자율적경비 5880원, 학도호국단비 2140원, 졸업비 3850원”이라고 합니다. 배움삯(수업료) 못잖게 ‘기성회비’가 매우 높고, 뜬금없어 보이는 ‘자율적경비’에 ‘학도호국단비’가 있고, ‘졸업비’까지 받아내는군요. 큰배움터라기보다는 크게 쥐어뜯는 곳 같습니다. 이렇게 쥐어뜯는 얼거리이니, 가난한 사람은 얼씬조차 못 할 만한 틀이요, 다른 종이(졸업장)를 거머쥐면 악착같이 돈을 벌어들이는 길로 달려야 하는 굴레로 여길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배우고 가르치는 마당으로 거듭났을까요, 아니면 그대로일까요.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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