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룰라 4선 (+ 민주·좌파·독재 사이)



  예순 해 가까이 ‘만화책집’을 꾸린 할머니가 있다. 이분 이야기에 귀기울인 글꾼은 없었고, 이분이 흘린 땀방울을 눈여겨본 고을지기(시장·국회의원)도 책바치도 없었다. 만화책집 할머니는 “딸아들 키우고 학교 보냈으면 됐지, 뭘 더 바라?” 하셨다. 손수 도시락을 싸서 자그마한 책집에서 하루를 보내시다가, 딸아이가 “그만 힘들게 일하라”고 말리면서 책집을 접으셔야 했다.


  이제 쉰 해 넘게 헌책집을 꾸리는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하나둘 늘어난다. 오래도록 책을 만지고 다루면서 가난한 책벌레한테 징검다리가 된 발자국이다. 쉰 해이건 마흔 해이건, 서른 해이건 스무 해이건, 마을 한켠에서 책집지기로 땀흘린 나날은 놀랍고 아름다우면서 빛난다. 늘 새롭게 배우고 익히고 가다듬는 굳은살 그득한 손길로 어진빛을 이웃하고 나누는 살림살이라고 하겠다.


  책집지기로 일하는 분은 ‘책집을 이어받을 젊은이’가 있으면 기꺼이 이모저모 가르치고 알려주면서 물려준다. 책집을 통째로 물려주기도 하지만, 따로 새롭게 책집을 차리라고 북돋우기도 한다. 마지막숨을 내려놓는 날까지 ‘책집할매’나 ‘책집할배’로서 스스로 배우고 싶은 마음이라서 끝까지 책집지기라는 일을 하는 분이 많다.


  먼나라 브라질에서는 ‘룰라 4선 대통령’을 한다더라. ‘대통령 4선’이라니, 이를 기뻐하거나 반겨야 할까, 아니면 왜 혼자 차지하고 거머쥐려 하느냐고 따져야 할까?


  우리나라 발자취를 보면, 이승만·박정희는 빼도 박도 할 수 없는 사납꾼(독재자)이다. 혼자 힘을 쥐락펴락하면서 혼자 얼굴을 내밀고 혼자 목소리를 내려고 했다. ‘그들’이 아니면 나라를 이끌 일꾼이 없다는 듯이 굴었다. 이러다가 이 두 사납꾼은 끌려내려왔다. 뒤를 이은 전두환·노태우도 고스란히 사납꾼으로 칼을 휘둘렀다.


  나라지기라는 일은, 아무리 훌륭한 분이 있더라도, 잇달아서 벼슬을 거머쥐려고 하지 않아야 할 자리라고 본다. 훌륭한 분이라면, 나라지기를 맡은 첫걸음으로 마치고서 다른 젊은 일꾼한테 물려줄 노릇이다. 할 일이 그득그득 많다면 꼭 두걸음까지는 할 수는 있되, 석걸음이나 넉걸음은 안 가야 할 노릇이다. ‘나라지기 석걸음’이라면 그이가 왼날개이건 오른날개이건 ‘사납꾼(독재자)’일 뿐이다. 나라를 아름답게 가꾸고 일구려는 뜻이라면 스스로 뒤로 물러나서 조용히 이바지하는 심부름꾼으로 지내야 맞다.


  오래도록 마을에서 책집지기로 알뜰살뜰 일하는 분은 이녁 얼굴이나 이름을 내세우려는 뜻이 없다. ‘책집을 드나드는 책손’이 저마다 아름답게 빛나면서 다 다르게 사랑스레 일하는 길을 열기를 바라는 책집지기라고 하겠다. 나라지기도 이와 같아야지. ‘나라지기 얼굴과 이름값’만 드날린다면 그냥그냥 사납꾼이다. 나라지기가 아닌 “나라를 이루는 들꽃 같은 수수한 사람들”이 저마다 반짝이고 빛나고 보람차게 땀흘리면서 보금자리를 가꾸는 터전이어야 맞다. 나라지기는 되도록 조용히 일하되, 글바치(기자·작가)하고는 날마다 마주하면서 스스로 무슨 일을 하는지 들려주고, 나라 곳곳에 어떤 일감이 있는지 물어보고 들어야 맞다.


  왜 브라질에서는 나라지기가 넉걸음이나 혼자 차지하려고 하는지 물어볼 일이다. 왜 젊은 일꾼이 물려받지 않는지 따질 일이다. 이러면서 우리 스스로 이 나라를 둘러볼 일이다. 고을지기(지자체장)는 몇 걸음을 해야 할까? 벼슬(국회의원·기초의원)은 몇 걸음을 해야 할까? 고을지기도 두걸음까지만 맡을 수 있어야 맞지 않나? 벼슬도 두걸음에서 끝내야 맞지 않나? 석걸음에 넉걸음에 닷걸음에 엿걸음을 끝없이 차지하는 벼슬이라면, 마을살림이 망가지는 지름길이지 않나? 젊은 일꾼한테 물려주려는 뜻이 없는 벼슬이라면, 그만 힘꾼(권력자)이자 사납꾼이지 않나?


  집살림을 알차게 꾸린 살림꾼이 마을일꾼(지자체장)이나 나라일꾼(대통령·장차관·기관장)을 맡는 틀을 세우기를 빈다. 집살림꾼이면서 아이를 사랑으로 어질게 돌본 수수한 어버이가 마을일꾼에 나라일꾼으로 서는 틀을 마련해야지 싶다. 왼쪽에는 젊은이가 일할 자리를 마련하고, 오른쪽에는 살림꾼이 일할 자리를 두어야지 싶다. 젊은눈과 살림눈이 나란히 만나서 늘 새롭게 마을살림과 나라살림을 가꾸는 이곳으로 거듭나기를 빈다.


  몇몇 분만 뛰어나거나 훌륭하다면 앞날이 캄캄하다. 모든 사람이 다 다르게 일할 자리를 열면서, 누구나 보금자리부터 ‘보금숲’이자 ‘배움숲’으로 돌보고, 온나라 온마을이 어깨동무하면서 푸르게 어울리는 길을 헤아리는 꿈을 씨앗 한 톨로 심어야지 싶다. 2026.10.26.달.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푸른말로 글빛노래 시 따라쓰기》,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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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푸른말씨를 심는 푸른사람

― 작은배움숲 7 작은손으로 쓰는 작은노래



  국립국어원 낱말책에서 ‘습득’을 뒤적이면, 줍거나 얻는다는 뜻인 한자말 ‘습득(拾得)’하고, 배우거나 삭인다고 하는 한자말 ‘습득(習得)’ 사이에, 중국 당나라 무렵 중이라는 ‘습득(拾得)’이라는 사람이름을 뜬금없이 실어놓습니다. 그저 뜬금없고 얄궂습니다. 먼 옛날 당나라 무렵 중이라는 사람이름을 왜 우리 낱말책에 실을까요? 그런데 이처럼 중국사람이며 영국사람이며 독일사람이며 미국사람이며 일본사람이며 온누리 여러 나라 사람이름을 잔뜩 실은 국립국어원 낱말책입니다.


  곰곰이 짚자면, 주울 적에는 ‘줍다’라 하면 됩니다. 얻을 적에는 ‘얻다’라 하면 됩니다. 배울 적에는 ‘배우다’라 할 노릇입니다. 익힐 적에는 ‘익히다’라 할 노릇입니다. 이런 일을 ‘拾得’이나 ‘習得’으로 가려서 쓸 까닭이 없습니다.


  손가락을 써서 ‘집’습니다. 손아귀로 ‘잡’습니다. 바닥에 있기에 ‘줍’습니다. 바닥에 받치려고 ‘짚’습니다. 안쪽으로 모으려고 ‘접’습니다. 지나가려는데 조이는 듯한 틈이나 길이라서 ‘좁’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늘 쓰는 말마디부터 차근차근 짚으면서 생각길을 넓힐 노릇입니다. 말씨를 차분히 가다듬지 않으니 눈썰미가 좁아요. 해마다 새롭게 씨앗이 깃들어야 푸르게 우거지는 숲인데, 막상 우리 스스로 마음자리에 말씨(말씨앗)를 제대로 못 심거나 안 심기 일쑤입니다. 때로는 얄궂거나 뒤엉킨 채 어지럽히는 말치레에 휩쓸리기도 합니다.


  집밖으로 나가서 바깥일을 보노라면 숱한 사람을 마주합니다. 웬만한 분은 손전화를 쓸 적에 소리를 끄거나 소릿줄을 귀에 꽂습니다. 그렇지만 소리를 크게 틀면서 노닥거린다든지, 소릿줄은 그냥 안 챙기는 이가 곧잘 있습니다. 탈거리(버스·전철)에서 소리를 쩌렁쩌렁 키운 이가 둘레에 있으면 어수선한데, 어리건 젊건 늙건 철없이 군다면, 사람살이를 하나도 안 배운다는 뜻이로구나 싶습니다.


  늦여름이 지나고서 첫가을로 접어든 가을에 풀벌레 노랫가락이 한결 깊고 너르면서 반짝입니다. 다 다른 숱한 풀벌레는 노랫가락으로 소리너울을 일으킵니다. 이와 달리 숱한 사람은 노래길이나 노래꽃이나 노래빛이 아닌 시끌마당으로 뒹굴어요. 꽃빛하고는 먼 채 읊어대는 말이라면 마음마저 없거나 메마른 소리늪엘 테지요. 누구보다 이녁 스스로 갉는 소리불늪이라고 할 테고요.


  사람은 손수 심은 씨앗에 따라서 낟알과 열매를 거둡니다. 사람이 손수 안 심어도 바람과 새와 벌레와 비와 뭇짐승이 심은 씨앗이 익으며 낟알과 열매를 얻습니다. 푸른숲은 푸른씨가 푸른빛으로 번지고 어울리면서 모두를 살리고 밝히는 푸른터를 이룹니다. 우리 사람은 어떤 길인가요? 우리는 사람으로서 푸른말(푸른말씨)을 심는 푸른하루인지요? 우리는 사람으로서 푸른글(푸른글씨)을 나누는 푸른살림인가요?


  오늘(2026.9.14.)은 부산으로 ‘이야기마실’을 갑니다. 이웃님이 전남 고흥 시골자락에 깃든 〈숲노래 책숲〉으로 찾아와서 ‘푸른책’이며 ‘씨앗책’을 함께 읽으면서 배움자리를 누리기도 하고, 제가 어느 먼길이든 사뿐히 나서면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배움자리를 마련하기도 합니다. ‘강의·강좌·강연’이나 ‘수업·공부·클래스’ 같은 이름을 붙이고 싶지 않아서 ‘이야기마실’을 가서 ‘이야기꽃’을 함께 피운다고 말합니다. 낱말 하나부터 처음부터 새롭게 지어서 나누면, 서로서로 생각을 새롭게 밝히는 말씨(말씨앗)를 마음에 심을 만합니다. 우리는 ‘좋은책(양서)’이나 ‘길책(교재)’을 곁에 두지 않아도 됩니다. 모든 책을 늘 새롭게 마주하면서 배우는 ‘길동무책’이자 ‘푸른책(삶과 마음을 푸르게 일구는 길을 스스로 익히는 책)’으로 삼으면 됩니다.


  “찾아가는 배움자리”이기에 ‘이야기마실’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더 많은 이웃을 한자리에 모아서 혼자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배움자리에 모인 누구나 마음을 밝히는 말을 주고받는 자리로 꾸립니다. 함께 이야기를 밝히다가 문득 쪽종이를 한 자락씩 쥐고서 손을 놀립니다. 조그마한 종이 한 바닥만큼 쪽글을 적어 봅니다. “쪽종이에 짧게 맺고 끊는 글”을 살며시 가다듬으면, 어느새 노래(시) 한 자락으로 거듭나는 길을 누리는 모임입니다.


  서로 마음을 기울여서 마주하는 자리일 적에는, 우리가 나누는 모든 말은 어느새 노래로 깨어납니다. 서로 아무 마음을 안 기울이면서 시끄럽게 떠들거나 목청을 높이거나 손전화를 켤 적에는, 그야말로 북새통이면서 소리늪입니다.


  책으로 숲을 이루기에 책숲입니다. 우리는 아직 일본말 ‘도서관’이나 ‘박물관’이라는 이름을 못 내려놓습니다. ‘관(館)’ 같은 한자를 붙여야 크거나 좋다고 잘못 여깁니다. 그러나 ‘관(館)’은 ‘집’을 가리키는 한자인걸요.


  우리는 아직 우리말이 무슨 뜻과 결과 빛과 숨과 씨인지 제대로 못 짚거나 안 짚을 뿐 아니라, 못 가르치거나 안 가르칩니다. 한자말 ‘우주(宇宙)’가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아는 분은 얼마나 될까요? ‘우주(宇宙) = 집(宇) + 집(宙)’인 얼개입니다. 집과 집을 함께 두기에 ‘누리(우주)’가 되는 얼개입니다. ‘누리’란, 셀 길이 없도록 숱한 집이 가없이 있다는 밑뜻입니다.


  그러면 ‘집’이 어떤 곳인지 헤아려야겠지요. ‘집’은 ‘지붕’만 얹은 ‘채’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살림을 집에서 ‘짓’습니다. 밥살림과 옷살림을 하려고 먼저 ‘집’부터 찬찬히 알맞게 세워요. ‘지음터(짓는 터전)’인 집부터 세워야, 이곳에서 누구나 넉넉하고 느긋하게 모든 살림을 손수 지어서 지내고 즐겁게 즈믄해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집에서 짓지 않으면 지겹게 마련입니다. 지으며 지낼 집이 아니라면 지치고 맙니다. 짓는 손길과 마음을 잊거나 팽개치니 짐에 파묻혀서 집니다(쓰러집니다).


  시골 옛배움터(폐교)에 마련한 작은배움숲은 푸른말로 푸른씨를 심고 나누는 배움자리이기도 하고, 노래자리이기도 하며, 이야기자리에다가, 생각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머잖아 사라질 수 있다고 여기는 시골(군단위 지자체)이라면, 옛배움터를 작은배움숲으로 살리는 길을 조그맣게 열어서 조촐히 나누는 길을 찾아볼 만합니다. 이미 서울과 큰고장으로 떠난 어린이와 푸름이를 시골로 붙잡아 올 수 없어요. 굳이 붙잡으려고 할 일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작은씨 한 톨을 손수 심어서 푸른숲으로 가꾸는 작은길을 누구나 나누면서 넉넉히 어울려 지낼 터전을 천천히 가꾸면 되어요. 누구나 나무 한 그루를 손수 심고서 두고두고 지켜볼 작은집을 작은배움숲 곁에서 지을 수 있으면 됩니다.


  전남 고흥에서 부산으로 가려면 두나절(일고여덟 시간)이 걸립니다. 시외버스와 길에서 한참 보냅니다. 이동안 책도 읽지만 손으로 글종이에 노래도 씁니다. 버스와 길에서 쓴 노래 몇 자락을 배움자리에서 만나는 이웃님한테 드립니다. 작은시골에서 길어올린 이야기를 큰고장에도 푸른터가 싹트기를 바라면서 건넵니다. 작은손으로 여민 작은노래가 온고을에 오롯이 온빛으로 오달지게 온꽃으로 올망졸망 피어날 앞날을 그리면서 작은수다를 즐깁니다.


  다함께 푸른말씨로 푸른집을 일구는 푸른마음을 나눌 수 있기를 바라요. 우리집과 이웃집 모두 두런두런 이야기씨앗을 부드럽게 펴고서 받는 푸른하루를 지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씩 하면 됩니다. 함께 해보면 됩니다. 파랗게 일렁이는 하늘빛으로 함박웃음을 짓는 손길로 어깨동무하면 됩니다. 2026.9.16.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푸른말로 글빛노래 시 따라쓰기》,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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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월간토마토> 2026년 10월호에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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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재기의 온도·품격 (이기주+ㅂㅇㅇㄹㅎ)



  겉멋과 겉치레로 휘감은 채 보기(조회수)를 늘리려는 짓을 잇다가 ‘고마움’이라는 마음을 등지면서 말밥에 오른 ㅂ씨가 있다. ‘박위’라는 분인데, 그냥 ㅂ씨라 하고 싶다.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말 ‘고맙다’는 자꾸 자취를 감추려 한다. 일본말 ‘감사(感謝)’가 또아리를 틀더니, 여기에 “타인의 호의”처럼 더 꼬아버린 일본말씨가 번진다. 우리 스스로 무엇이 ‘고마(고마움)’인지 잊어버리기에 밑뜻이며 참뜻을 헤아리지 않고서 겉멋과 겉치레로 휘감는 셈이다.


  ‘호의(好意)·친절(親切)·배려(配慮)·정(情)’은 나쁜말이 아니다. 이웃말(외국말)일 뿐이다. ‘매너(manner)’도 좋거나 나쁜 말씨가 아닌 그저 이웃말이다. ㅂ씨는 사람들이 ‘매너’가 있어야 한다고 끝없이 외치지만, 정작 ㅂ씨 스스로 ‘매너’가 없이 살았다. 아무래도 스스로 ‘매너’가 없는 탓에 둘레에서 ㅂ씨한테 ‘매너’를 보여주고 베풀어도 못 알아채거나 못 느끼면서 쳇바퀴를 돌았다고 느낀다.


  지난 2016해에 《언어의 온도》라는 책이 난데없이 자랑책(베스트셀러)에 오른 적이 있고, 온나라 마을책집마다 이 얄팍한 책을 번듯하게 놓은 모습을 보았다. 마을책집을 드나들며 읽기로 참 후줄근한 짜깁기라고 느꼈다. 그런데 100군데 마을책집 가운데 95군데 마을책집은 “이 책 좋은데요?” 하고 여기더라. 나는 《언어의 온도》 같은 책은 ‘짜깁기와 겉멋과 겉치레로 가득한 후줄그레한 거품’이라고 느낀다고 얘기했다. 그러니까 책집지기 100사람은 심드렁하게 타박하는 내 말을 거북하게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한 해쯤 지켜본 끝에 2017해 끝자락(12.28.)에 느낌글을 쓰기로 했다. 《언어의 온도》를 ‘강력추천’ 하는 마을책집에서 온돈을 치러서 샀다. 막상 온돈까지 치러서 사읽자니 얼마나 겉멋스러운지 새삼스레 더 느꼈다. 그렇지만 둘레에서는 이렇게 글을 꾸며야 한다고 여긴다든지, 이렇게 멋을 부려야 비로소 글맛이 난다고 여기는구나 싶었다.


 https://blog.aladin.co.kr/hbooks/9799851 (알라딘서재 느낌글)

 https://blog.naver.com/hbooklove/221172648324 (네이버블로그 느낌글)


  “보기에 좋은 떡이 먹기에 좋다”는 옛말을 제대로 곱씹어야 한다. “보기에 좋으니 손이 쉽게 간다”는 뜻이고, “먹기에 좋기에 몸에 이바지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개똥을 약으로 쓰려니 없다”는 옛말을 차분히 되새겨야 한다. ‘개똥’이라는 빗댐말은 ‘잘난책(베스트셀러)’ 같은 이름값을 얻지 못 해서 처박히고 만 ‘아름책’을 가리킨다. ‘잘난이(유명인사)’ 같은 벼슬을 얻지 않으면서 시골에서 조용히 지내는 ‘살림이(살림을 짓는 일꾼)’를 가리키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아이를 낳아 돌보는 수수한 손길이 얼마나 빛나고 눈부시고 아름다운지 안 알아본다. ‘아이돌봄·집안일’이 수수하기에 숲처럼 푸르게 빛나는 사랑인 줄 알아보는 사람이라면, 나라벼슬(장차관·국회의원·대통령) 같은 겉멋에 얽매이지 않는다. ‘아이돌봄·집안일’을 하찮게 여기느라 나라벼슬을 비롯해서 큰돈과 큰이름과 큰이름을 거머쥐고서 끝까지 붙들려고 용쓴다. ‘기본소득당’이 아니라 ‘가족소득당’이라는 손가락질을 받는 그곳처럼 악착같이 ‘돈·이름·힘’에 사로잡혀서 눈치코치 없는 모습을 보라.


  보기에 좋은 떡에 눈이 먼 탓에 그저 덥석덥석 집어먹는다. 보기에 좋게 꾸미느라 무슨 짓(화학처리)을 했는지 안 가리고 만다. ‘임상검사·부작용검사’조차 하지 않은 미리맞기(백신)를 두어 해 사이에 푸른별 모든 사람한테 하루아침에 때려맞힌 지 고작 서너 해밖에 안 되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나란히 휩쓸리면서 ‘보기좋은’이라는 껍데기를 붙잡아 왔다. ‘아름다움’을 그냥 개똥으로 여기면서 팽개쳤고, ‘아름다움’과 ‘사랑’이야말로 온사람을 살리는 빛살인 줄 아예 안 쳐다보면서 서울바라기로 치닫기까지 한다.


  서울에 쏠린 숱한 일터를 ‘서울밖(지방)’으로 옮긴다고 하니 길거리에 나와서 팔뚝을 휘두르고 목청을 높이는 그들을 보라. ‘그들’은 남이나 놈이 아닌 ‘우리 스스로’이다. 스스로 ‘서울밖’에서 보금자리와 일자리를 헤아리려는 매무새(매너)가 아니기에 책 하나를 놓고도 ‘아름책’을 개똥으로 여겨 팽개치면서 ‘잘난책·자랑책’을 ‘보기좋다’고 여기면서 잔뜩 사들이는 얼거리이다.


  《언어의 온도》를 선보인 이기주 씨, 아니 ㅇ씨는 《보편의 단어》라는 이름으로 지난 2024해에 새책을 내놓으면서 사재기를 신나게 했더라지. 이미 숱한 펴냄터가 여태까지 사재기를 선보이면서 잘난책을 쥐락펴락했다. 또한 사재기가 아니어도 “어마어마하게 거느리는 모임(북클럽·서평단)”으로 별꽃잔치를 벌여서 물밑짓을 일삼는다. ㅇ씨에 앞서 ㅂ씨도, ㅂ씨에 앞서 다른 ㅇ씨(이병한)도, 오래오래 저지른 막짓이 뒤늦게 불거졌는데, 이들이 여태 긁어모은 돈을 뱉어냈다는 말은 들은 바 없다. ㄹ씨(료)나 ㅎ씨(황석희)는 뱉어낸 돈이 있을까? 그저 숨을 뿐 아닌가?


  그들(우리 스스로)이 사재기를 하건 말썽을 저지르건 어느 하루 반짝 저지르는 몹쓸짓이 아니다. 술을 퍼마시고서 달구지를 모는 이는 꼭 하루만 ‘술달구지(음주운전)’를 하지 않는다. 늘 하던 짓이다. 이미 늘 보여주는 민낯이 ‘큰짓’이 될 때까지 알아차리지 않거나 알아보지 않으려고 하는 나(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려고 할 때라야 비로소 모든 껍데기와 겉치레와 겉멋을 걷어내면서, 누구나 저마다 아름답게 사랑으로 살림을 짓는 집(짓는곳)을 이루리라고 본다.


  끝으로 한 가지 붙인다. 이웃말 ‘감사(感謝)·호의(好意)·친절(親切)·배려(配慮)·정(情)·매너(manner)’는 우리말로 ‘고맙다·좋아하다·따뜻하다·살피다·마음·매무새’를 가리킨다. 곱게 여기는 고맙다요, 싫어하지 않는 좋아함이고, 해처럼 베푸는 따뜻함에, 이모저모 먼저 살피며, 모두 하나인 마음이라 여기고, 늘 보이는 매무새이다. 2026.9.9.물.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푸른말로 글빛노래 시 따라쓰기》,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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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달걀



  엊그제(2026.10.10.) ㅈ씨가 ‘브라질 달걀값’을 따지는 말을 했다더라. ㅈ씨는 우리나라가 사들인 ‘브라질 달걀’이 ‘한 알에 1300원’이라 말하기에 갸우뚱했다. 나라밖에서 사들였다는 달걀이라는데, 한 판이 아니고 한 알에 1300원이라니, 이처럼 미친값을 치르면서 브라질 달걀을 사올 만큼 우리나라가 어리석거나 멍청한가 싶어서 아리송했다. ㅈ씨는 집살림이나 집안일을 안 하느라 달걀값도 모르나 싶어 피식 웃음이 났다.


  그런데 오늘 나온 여러 이야기를 살피자니, ㅈ씨가 한 말은 참이었구나 싶다. ‘미국 달걀’은 한 알에 464원에, ‘태국 달걀’은 한 알에 305원에 들여온다고 한다. 어느 나라 달걀을 들여오든 한 판에 이미 1만 원을 넘는다.


  농림축산식품부에서 내놓은 글에서 따왔다고 하니 거짓말일 수 없다. ‘브라질 달걀 한 판 39000원’을 치르고서, 여기에 나라돈을 잔뜩 퍼부어서 큰가게에서는 4900원에 판다면, 누구한테 이바지하는 일인지 더 알쏭달쏭하다. 34100원은 어디로 사라지는가? 우리는 왜 브라질한테 어마어마한 돈을 퍼주어야 하는가? 우리가 달걀을 못 먹어서 죽는가?


  여느때에 ‘가장 좋게’ 판다는 달걀이라면, 한 판에 18000원쯤 한다. 이다음으로 좋게 판다는 달걀 한 판은 13000원쯤 한다. 그냥 우리나라 ‘좋은 달걀’을 사다가 먹으라고 하면 된다. 굳이 먼나라에서 값비싸게 사들여서 애먼 나라돈을 벌써 1200억 원이나 날려야 할 까닭이 없다.


  달걀값으로만 뒷짓이나 장난을 치지 않았으리라. 숱한 곳에서 숱한 뒷짓을 일삼으면서 나라돈을 곶감처럼 빼먹는 장난이 끝없겠지. 누가 뒷짓과 장난을 하는지 얼마나 지켜볼 수 있는가. 누가 이 뒷짓과 장난을 따갑게 나무라는가. 누가 이 뒷꾼과 장난꾼을 벼슬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있는가. 2026.10.11.해.


ㅍㄹㄴ


장동혁 “브라질 계란 고가 수입…‘국제 좌파’ 챙기기 아닌가”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666/0000126757?sid=100


"싼 계란 놔두고 왜?"…장동혁, 1300원에 사서 100원에 판 건 '좌파 커넥션'

https://v.daum.net/v/20261010102757920


브라질산 계란 한 판 수입가 3만9000원…1200억 물가 대책에 ‘혈세 낭비’ 논란

https://v.daum.net/v/20261011131913310


“백색에 특란 규격”…브라질산 신선달걀 최초 수입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662/0000099870?sid=101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662/0000091683?sid=101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8/0002797889?sid=101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푸른말로 글빛노래 시 따라쓰기》,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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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발닿는 곳으로 들락날락 책숲을

― 작은배움숲 8 마을에 나무와 어린이를



  부산으로 이야기마실을 다녀왔습니다. 고흥으로 돌아오자마자, 새로 고흥교육장이 된 분한테 찾아가서 손글(손편지)을 건네었습니다. 다만, 새 교육장님은 고흥교육지원청에 안 계셔서 곁일꾼(비서)한테 맡겼습니다. 이러고서 이튿날은 고흥 어린이하고 글놀이꽃(시쓰기 수업)을 폈고, 오늘에서야 겨우 숨돌립니다.


  새로 장만한 책을 주섬주섬 꾸려서 우리 〈숲노래 책숲〉으로 나릅니다. 누렇게 물결치는 가을들을 바라보면서 먼고을 이웃님이 마주하는 책살림을 헤아립니다. 부산에서는 ‘구’를 넘어서 ‘동’에까지 부산시에서 꾸리는 책놀이터(도서문화예술공간)를 늘리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서울은 이미 어느 마을에서나 가볍게 거닐며 드나들 작은책숲이 무척 많다지요. ‘살림꽃(문화도시)’이기를 바라는 부산이기에, ‘들락날락’이라는 이름으로 책놀이터를 늘리는구나 싶은데, 전남광주는 어떤 모습일까 하고 헤아립니다.


  무척 오래도록 시골에는 책숲이 없다시피 했습니다. 이러다가 읍내에 ‘군립도서관’이 태어납니다. 읍이 둘이 있는 군이라면 더 큰 읍에 먼저 하나 열고, 한참 뒤에 다른 읍에 하나 엽니다. 군에서는 책숲은 하나만 있으면 된다고 여기기 일쑤였으나, 이럭저럭 긴 나날이 흐른 끝에 작은책숲이 면에도 하나둘 엽니다. 다만 시골 면에서 여는 작은책숲은 서울에 있는 동이나 아파트에서 여는 작은책숲에 대면 아주 조그맣습니다.


  시골에서 살며 철마다 다른 시골빛을 누리는 아이어른을 만나기는 안 쉽습니다. 오히려 서울사람이 철마다 다른 숲빛을 누리거나 느끼려고 애쓰는 듯합니다. 읍내에 사는 어린이와 푸름이는 외려 서울아이보다 들살림을 모르기 일쑤요, 면소재지에 사는 어린이와 푸름이도 서울아이보다 멧살림이나 바다살림을 모르기까지 합니다. 이미 시골배움터는 ‘서울로 수학여행’을 다녀올 뿐 아니라 ‘서울에 가서 신호등에 따라 건널목 건너기’라든지 ‘에스컬레이터 타기’라든지 ‘지하철 타기’라든지 ‘버스 갈아타기’를 미리 일러주고서 ‘해보기(수학여행으로 체험학습)’를 시키는 얼개라고도 할 만합니다.


  시골이라면 철마다 다를 뿐 아니라 달마다 다른 해바람비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만, 아직 이렇게 들려주거나 배우는 길은 없다시피 합니다. 따로 ‘작은배움숲(학교 밖 학교)’을 꾸리지 않고서야 첫봄해와 첫가을해가 어찌 다른지 알려주기란 어렵습니다. 한봄비와 한가을비는 어찌 다른지 들려주려면, 늦봄밤과 늦가을밤은 또 어떻게 다른지 이야기하려면, 그냥그냥 흘러가는 ‘서울바라기 제도권교육’으로는 하나도 못 합니다.


  왜 자꾸 시골은 줄어들 뿐 아니라 사라지려 하는지 돌아보기에는 한참 늦은 듯합니다. 그러나 한참 늦었어도 이제라도 처음으로 돌아가서 짚을 노릇이지 싶습니다. 사람도 일터도 돈도 서울에 몰렸고, 펴냄터도 책도 서울에 넘칩니다. 시골사람은 시골에 책집이 없으니 누리책집으로 시켜서 책을 사읽게 마련인데, 시골에서 살아가며 책을 사읽는 사람도 대단히 적습니다. 여러모로 보면, 이미 가을빛과 겨울빛부터 읽지 않는 터라 책빛도 시큰둥할 만합니다. 여름빛과 봄빛을 반기려는 마음이 스러진다면, 애써 주머니를 헐어서 책을 사읽으려는 마음도 없을 테고요.


  요즈음은 시골 읍내나 배움터에서 마련하는 책숲도 꽤 크고 책도 제법 갖춥니다. 그렇지만 “이곳이 왜 이곳인지” 짚거나 다루는 책은 어디 있는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고흥군이라면 고흥군이 왜 ‘고흥’이며, 이곳에서 어떻게 살림을 지으면서 푸른빛을 누리고 품고 나눌 만한지 들려주는 책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다른 곳 고을책숲(지역도서관)은 고을지기(지역작가)가 쓴 책을 앞장서서 알리기도 하고 읽히기도 할 뿐 아니라, ‘서울바라기’를 멈추고서 ‘마을바라기’를 하자는 뜻을 넓힙니다. 이와 달리 아름다운 들숲메바다를 품은 시골일수록 ‘관광객’과 ‘기업유치’와 ‘개발투자’에 얽매일 뿐, 막상 이곳 시골에서 나고자란 어린이와 푸름이가 이곳을 사랑하며 살림하는 길을 들려주고 알려주고 배우면서 함께 일굴 이야기는 없다시피 합니다.


  무엇을 사랑할 만한지 이야기하지 못 하면서 ‘관광객’과 ‘대형 토목사업’에 치우치는 행정이라면 ‘지자체’를 하는 뜻이 있을까요?


  서울 영천동 영천시장 끝자락에 〈골목책방〉이라는 마을책집이 있었습니다. 1970해부터 2021해까지 하루조차 안 쉬면서 책집을 열었다고 했습니다. 쉰 해 남짓 책빛을 일군 셈입니다. 이곳에 마지막으로 책마실을 다녀온 때가 2017해였지 싶습니다. 그 뒤로는 좀처럼 발걸음을 못 했습니다. 시골에서 서울마실이란 멀거든요. 이러다가 〈골목책방〉 아주머니가 전화로 책집을 닫는다고 알려주셔서 마지막길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우리 책숲을 추스르다가 한참 앞서 〈골목책방〉 아저씨가 고흥으로 보낸 꾸러미를 보았습니다. 되도록 안 버리고 모으다 보니, 책짐을 받을 적에도 빈 꾸러미(상자)를 포개어서 건사하곤 합니다. 빈 꾸러미 한켠에는 〈골목책방〉 아저씨가 슥슥 적은 손글씨가 고스란합니다. 손글씨가 남은 곳을 잘라서 쓰다듬습니다. 저는 “쉰 해 남짓 땀흘리다가 흙으로 돌아간 작은책집 일꾼이 남긴 손글씨 한 자락”도 길(역사)이라고 느낍니다. 누가 책(역사문서)으로 이런 손글씨를 남기지는 않을 테지만, 우리가 날마다 짓는 모든 살림살이야말로 우리 스스로 이루고 일구는 빛이요 씨앗이라고 여깁니다.


  부산시에서 꾀하는 ‘들락날락’처럼 전남광주 작은시골 작은마을마다 ‘작은배움숲’이 싹틀 수 있으면 아름다울 텐데 하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고흥군 도화면 시골마을 한켠에서 폐교인 흥양초를 〈숲노래 책숲〉으로 살려쓰듯, 다른 이웃님은 다른 마을에서 폐교를 빌려서 책숲이며 배움숲이며 노래숲이며 이야기숲이며 그림숲으로 살릴 만합니다. 빈집이나 헛간을 살려서 이음숲을 꾸릴 만합니다.


  목돈을 들이는 토목사업이 아닙니다. 더 크거나 멋지게 세울 학교나 아트센터도 아닙니다. 작은마을에 작은책숲이 있으면 됩니다. 마을을 둘러싼 들과 숲과 메와 바다를 아우르면서 배우고, 우리가 두고두고 남기는 작은책에 흐르는 이야기를 되새기면서 배우는 터전을 열면 됩니다.


  시골에서 여러 배움터를 묶으면(통폐합) 100억이니 200억이니 나라에서 내려준다고 합니다. 이런 일을 꾀할 수도 있습니다만, 시골에 있는 여러 배움터를 자꾸 없애면서 읍내로 쏠리는 얼개로 뻗으면, 읍내 배움터도 머잖아 닫을 수밖에 없습니다. ‘면소재지 배움터’는 ‘읍내 배움터’로 빠져나간다면, ‘읍내 배움터’는 ‘서울 배움터’로 빠져나가거든요. 이렇게 빠져나간 어린이와 푸름이와 젊은이는 다시 시골로 돌아올 마음이 없기 일쑤입니다. 나고자라는 시골에서 “시골이 왜 푸른터요 아름터인지 듣거나 겪거나 배운 바가 없다”면,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니거나 일자리를 얻은 뒤에 굳이 시골로 돌아갈 까닭을 하나조차 찾기 어렵습니다.


  바람이 들락날락 흐르는 틈이 있기에 모든 숨붙이가 싱그럽습니다. 햇볕이 들락거릴 틈새가 있기에 모든 씨앗이 싹틉니다. 빗물이 스며들 틈이 있기에 나무가 자라서 푸르게 우거집니다. 이제 시골에서는 해바람비라고 하는 푸른빛을 한복판에 두고서 ‘푸른바라기’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마을과 고을이 저마다 알맞게 흐르면서 어울리고 만날 때라야, 서울도 알맞게 몸집을 줄이면서 넉넉히 어울리는 한나라 한살림 한노래로 피어나리라고 봅니다.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푸른말로 글빛노래 시 따라쓰기》,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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