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바람 이는 숲을 거닐다 (2019.9.6.)

― 전남 순천 〈책방 심다〉

전남 순천시 역전2길 10

061-741-4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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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서나 문제집이 아닌 책을 사러 처음 책집에 가던 때를 제대로 떠올리기는 어렵습니다. 아주 어릴 적에 형 심부름으로 만화책을 사러 마을에 있는 작은 책집을 다녀온 때는 다섯 살이나 여섯 살이었을 수 있어요. 일곱 살 무렵에 형 심부름으로 만화책을 사던 일은 또렷이 떠오릅니다. 그때 그 책집이며, 책집으로 가려고 디딤길을 올라 2층 안쪽에 있는 골마루까지 걷던 일도 생생해요.


  중학생 무렵부터 시집하고 《태백산맥》을 사려고, 또 이때 갓 한국말로 옮기던 만화책 《드래곤볼》을 사려고 마을책집을 드나들었습니다. 이즈음에는 형 심부름으로 《하이틴》 같은 잡지를 샀고, 저는 《르네상스》하고 《아이큐점프》 같은 만화잡지를 샀습니다. 결이 다른 만화잡지 둘을 나란히 보았는데, 결이 달라도 줄거리나 이야기가 아름다우면 어느 만화이든 마음에 들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에 헌책집에 깃든 책시렁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처음으로 깨달은 뒤부터 이레마다 이틀씩 보충수업·자울학습을 빼먹고 헌책집으로 달려갔습니다. 말 그대로 달려갔습니다. 저녁 다섯 시 넘어서 드디어 정규수업이 끝나면 이 핑계 저 토를 붙여서 뒷수업을 빼먹으려 했고, 핑계나 토가 안 먹히면 학원에 가는 동무들 물결에 슬며시 파묻혀서 얼른 달아났지요. 고등학교가 있던 인천 용현5동에서 인천 금창동 배다리 헌책방거리까지 한숨도 안 쉬고 달렸어요.


  두 가지가 아쉬웠어요. 첫째, 버스를 타고 가면 버스삯이 아쉽고, 걸어가든 버스를 타든 달릴 적보다 느리니(버스는 여기저기 돌아서 가느라), 책집에서 10분이라도 더 책을 읽고 싶어서 한숨을 안 쉬고 달렸습니다. 아낀 버스삯으로는 책값에 보태었고, 집으로 돌아갈 버스삯까지 탈탈 털어서 책 한 자락을 더 장만하려고 하다 보니, 인천 배다리에서 인천 연수동까지 두어 시간을 걸어서 돌아갔어요. 더구나 이렇게 걸어서 돌아가는 밤길에 거리등 불빛으로 책을 읽었습니다.


  어느 모로 보면 책에 미친 사람이지만, 다르게 보면 날마다 매바심이 춤추는 입시지옥 수렁에서 빠져나와 숨쉴 구멍을 찾으려는 몸부림입니다. 어느 모로 보면 대학입시하고 얽힌 문제집이나 참고서를 멀리한 길이지만, 다르게 보면 삶을 슬기로 일깨우는 책을 마주하면서, 어른다운 어른은 어디에 있는지 스스로 찾으려던 길입니다.


  고등학교를 마친 뒤에는 마음껏 책집마실을 다녔습니다. 이제 더는 저한테 ‘참고서를 보라’느니 ‘문제집을 펴라’느니 하는 잔소리는 한 마디도 안 들을 만했거든요. 본고사까지 치른 고등학교에서는 그날부터 날마다 헌책집에 파묻혀 그 헌책집이 문을 닫을 밤까지 갖가지 책을 읽었어요. 가벼운 주머니로는 살 수 없는 책을 한국책이든 외국책이든 가리지 않았고, 오래된 책이든 새책이든 따지지 않았어요.


  이제 전남 고흥이란 시골에 살며 책집마실을 달포에 한 걸음을 하기에도 빠듯합니다. 어디이든 다 먼 탓입니다. 그래도 고흥에서 시외버스를 타면 순천에 마을책집도 헌책집도 있어서 반가이 찾아갑니다. 시외버스에서 내린 다음 시내버스를 갈아타고서 천천히 거닐어 〈책방 심다〉에 이릅니다. 여러 해째 이곳을 찾아가는데, 〈책방 심다〉를 찾아갈 적마다 ‘심다’란 이름을 혀에 얹으면서 즐거워요. 아마 이곳 ‘심다’를 찾아가는 이웃님도 매한가지일 테지요.


  우리는 무엇을 심을까요? 책을 읽는 두 손으로 무엇을 심을까요? 책을 읽고서 우리 마음에 무엇을 심을까요? 책으로 배운 슬기를 몸으로 풀어놓아 새롭게 익히는 길에 어떠한 사랑을 어느 곳에 심을까요?


  우리들 사랑심기는 얼마나 고울 만한가를 헤아리면서 《이파브르의 탐구생활》(이파람, 열매하나, 2019)을 집어듭니다. 서울 아닌 시골이라는 터전이 우리 마음자락에 어떠한 품인가를 지켜본(탐구) 이야기(생활)를 글로 조곤조곤 풀어냅니다.


  저는 대학교를 그만둔 몸입니다만, 그만두기 앞서, 또 그만두고서도 몇 달 즈음 대학 구내서점에서 일꾼으로 지냈습니다. 책집 일꾼으로 지내던 삶은 아주 뜻깊은 나날이었어요. 새책집에서 일을 하니 날마다 드나드는 책을 마음껏 살필 만합니다. 책꽂이로 옮기면서, 보기 좋게 자리를 잡으면서, 책을 사는 분들한테 책싸개를 씌워 주면서, 힐끗힐끗 넘겨읽는 몇 쪽이 달콤했어요. 책손이 뜸할 적에는 흐트러진 책꽂이를 갈무리한다면서 슬쩍슬쩍 여러 쪽을 넘기고 제자리에 두기를 되풀이했지요. 이런 나날을 되새기면서 《전국 책방 여행기》(석류, 동아시아, 2019)를 손에 쥡니다. 글쓴이는 책집 일꾼을 그만두고서 나라 곳곳에 있는 책집을 찾아가서 만나보기를 했다는군요.


  다만, 이 책을 쓰신 분이 너무 만나보기에 매였지 싶습니다. 꼭 어느 고장 어느 책집지기를 만나서 이야기를 묻지 않아도 되거든요. 사뿐사뿐 찾아가서 조용히 책을 읽고 사서 나오는 손님 몸짓이 된다면, 저절로 이야기가 태어납니다. 왜냐하면 어느 책집에 가든 그 책집 책꽂이만 보아도 책집지기 마음을 환하게 읽을 수 있거든요. 책꽂이하고 갖춤새가 바로 책집지기 마음이요 이야기입니다.


  이제는 시골에서 살기에 책집마실이 뜸할 수밖에 없기도 합니다만, 시골에서 살며 종이책을 덜 읽거나 안 읽어도 넉넉하다고 느껴요. 그도 그럴 까닭이, 인천이나 서울에서 사는 동안 날마다 숱한 책집을 찾아다니고 밤늦도록 그곳에 머물며 ‘책집 = 서울(도시)을 밝히는 푸른 숲터’로 느꼈거든요.


  바람 이는 숲을 거닐려고 책집마실, 또는 책숲마실을 다닙니다. 바람이 는 숲을 거니는 마음을 누리려고 종이책을 손에 쥐어 살짝 펼칩니다. 그리고 저 스스로도 종이에 붓으로 글을 새삼스레 그려 넣으며 새로운 책이 태어나는 길을 걷습니다. 우리는 책숲(책방)에서 바람으로 만납니다. 서로서로 바람입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사전을 쓰는 사람.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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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9-10-17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방심다라니 서점 이름이 참 예쁘네요.순천의 헌책방하면 형설서점이 기억나는데 워낙 오래전 일이라 지금도 있는지 궁금하네요.그리고 숲노래님이 서울에 계실적에 카메라를 목에 걸고 자전거로 헌책방 마실을 오신것을 본 기억이 나네요^^

숲노래 2019-10-17 18:36   좋아요 0 | URL
형설서점은 튼튼히 잘 있답니다.
요새는 낙안 쪽 폐교로 옮겨서 더 멋지게 꾸미시지요.

오늘 <책방 심다>에서 이야기꽃을 펴느라
일찌감치 와서 책을 보고
동시를 쓰고
사전 원고도 한창 추스릅니다 ^^
 

숲노래 책숲마실

어린이책을 즐기는 어른 (2019.9.3.)

― 서울 성산 〈책방 사춘기〉

서울 마포구 월드컵북로9길 30

https://www.instagram.com/sachungibook



  2017년 2월에 처음 문을 열고, 2018년 봄에 망원역 쪽으로 자리를 새로 튼 마을책집 〈책방 사춘기〉가 있습니다. 저는 이런 살가운 이름을 붙인 마을책집이 있는 줄 까맣게 몰랐어요. 더구나 〈책방 사춘기〉 책지기님이 ‘아침독서신문’ 일꾼으로 일한 적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그때에 초롱초롱한 글빛으로 이야기를 꾸린 줄 새롭게 알았습니다.


  제가 쓰는 사전이나 책을 꾸준히 펴내어 주는 철수와영희 출판사가 있고, 이곳은 서울 망원역 곁에 일터가 있어요. 그동안 낸 사전하고 책을 돌아보면서 앞으로 어떤 새롭고 알찬 사전이나 책을 쓰면 좋을까 하고 이야기하려고 곧잘 서울마실을 하면서 망원역 쪽으로 찾아갑니다. 예전에는 망원역 곁에 책집이 뜸했어요. 헌책집 〈영광서점〉이 이쪽에 오래 있었는데 동묘 쪽으로 옮긴 지 한참 되었습니다. 누리책집 알라딘이 합정역 곁에 ‘알라딘 중고샵’을 열었기에, 가끔 이곳에 들러서 코코아를 마십니다. 서울에서는 무릎셈틀을 펼쳐서 글쓰기를 할 만한 마땅한 쉼터가 드문데, 합정역 알라딘 중고샵을 ‘코코아 마시며 글쓰기를 하는 샘가’로 삼곤 하지요.


  망원역 곁에 〈책방 사춘기〉가 2018년부터 진작 자리를 튼 줄 뒤늦게 알았지만, 이제부터 잘 알고 사귀면서 사뿐히 찾아가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참말 사뿐걸음으로 찾아갔어요. 굳이 망원역부터 합정역까지 걸어가서 코코아를 마시기보다는, 망원역에서 〈책방 사춘기〉 쪽으로 걸어가다가 조그마한 마을찻집 ‘커피 문희’에서 찻집지기님이 타 주시는 따뜻한 코코아를 누리고서 더 사뿐한 걸음으로 마을책집으로 나들이를 갑니다.


  오늘은 첫걸음이라면 머잖아 두걸음을 할 테고, 서울마실길에 가볍게 세걸음이며 네걸음을 하겠지요. 햇빛도 햇살도 햇볕도 골고루 스며드는 골목 한켠에 이쁘게 깃든 〈책방 사춘기〉 앞까지 걸어왔습니다. 책집에 들어서기 앞서 해님을 더 맞아들입니다. 이렇게 해가 좋은 날에 책집으로 가벼이 마실할 수 있는 일도 참 재미있구나 싶어요.


  어린이책이며 푸른책이며 그림책을 알뜰살뜰 여민 이곳이기에 더 마음에 듭니다. 어린이책이란 어린이부터 누리기에 참으로 허물없는 이야기꽃이지 싶어요. 푸른책이란 푸름이부터 즐기기에 참말로 스스럼없는 이야기나무이지 싶습니다.


  그림책 《봉숭아 통통통》(문명예, 책읽는곰, 2019)을 집어듭니다. 봉숭아가 통통통 춤추듯, 이 그림책을 눈여겨보고 집어들 이웃님 마음에도 통통통 춤추는 살림꽃이 피리라 생각해요.


  이다음으로 그림책 《식혜》(천미진 글·민승지 그림, 발견, 2019)를 집어들어요. 단술이란 마실거리를 이렇게 생각날개를 펴서 들려주어도 좋네요. 지식이나 정보를 가르치지 않고 이야기를 살살 엮어서 생각으로 가볍게 날아오르는 그림책이기에 어린이도 어른도 함께 둘러앉아 읽으면서 하하호호 수다잔치를 누리겠지요.


  그림책 《무슨 벽일까?》(존 에이지/권이진 옮김, 불광출판사, 2019)는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서 ‘두 눈에 들보를 스스로 쓰느라 참빛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아이’가 어떻게 담을 뛰어넘으면서 스스로 새길을 즐겁게 노래하면서 나아가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림책이란 대단하지요. 이렇게 깊고 너른 이야기를 부드러우면서 눈부신 붓결로 찬찬히 들려주어 어린이가 마음 가득 생각꽃을 키우도록 북돋우거든요. 더구나 푸름이나 젊은이도, 할머니나 할아버지도 이 같은 그림책을 어린이하고 함께 읽으면서 새롭게 슬기를 틔우고 사랑을 바라보기도 해요.


  한 자락쯤 책을 더 고를까 싶어 《줄리의 그림자》(크리스티앙 브뤼엘 글·안 보즐렉 그림/박재연 옮김, 이마주, 2019)까지 집어듭니다. 이 그림책은 좀 아픈 이야기를 다룹니다. 마치 제 어릴 적을 보는 듯한 그림책인데, 온누리 곳곳에 아픈 어린 날을 보낸 이웃이 많은가 봐요. 저마다 다르게 즐겁고 가벼이 어린 나날을 누린 분이 있다면, 저마다 다르게 아프고 고단한 어린 나날을 누린 분이 있을 테지요.


  그렇다고 그림자가 나쁘다고 여기지 않아요. 그늘진 옛길이 나쁠 까닭이 없어요. 그저 그림자로 얼룩진 일을 겪었을 뿐이고, 그늘로 가려진 일을 치렀을 뿐입니다.


  아이는 스스로 일어섭니다. 아이는 똑같은 어른이 되지 않습니다. 아이는 상냥한 어른이 되는 꿈을 마음에 씨앗으로 품습니다. 아이는 사랑스런 어른으로 크는 길을 마음에 생각으로 심습니다.


  이 아이하고 손을 잡아 보시겠어요? 마을 한켠에서 해님을 듬뿍 받는 책집으로 가볍게 마실을 가서 우리 아이들 마음에 빛으로 스며들 노래꽃을 살몃살몃 한 자락씩 두 자락씩 만나 보시겠어요?


  마을책집에서 어린꽃이랑 푸른꽃을 보살피려는 손길로 하루살림을 짓는 책집지기 이웃님한테 손수 쓴 글꽃을 슬쩍 건넵니다. 열여섯 줄로 ‘동시’를 쓰는데요, 동시란 이름보다는 노래꽃이란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 저는 제 글꽃을 노래꽃이란 이름으로 밝히면서 연필로 종이에 정갈히 옮겨서 내밀곤 합니다. 아름책을 만난 기쁨을 제 노래꽃이 부디 아름글로 스며들 수 있기를 바라면서 드려요. 이야기를 얻기에 이야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이야기가 흐르는 마을이기에 저마다 도란도란 모임을 엮고 맺어요.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사전을 쓰는 사람.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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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읽는 어른" 2019년 10월호에 실은 글입니다.





우리말 이야기꽃

여섯걸음 ― 마음을 읽고 쓰다


삶을 노래하면서 살림을 짓는 마음으로 이오덕 님 책을 새로 읽어 보았습니다. 꿈을 그리면서 생각을 짓는 손길로 이오덕 님 책을 하나하나 되읽었습니다. 사랑을 지피면서 책을 짓자는 꿈으로 이오덕 님 책을 살며시 쓰다듬으면서 가슴에 품어 봅니다. 《이오덕 마음 읽기》 9쪽


  제가 나고 자란 고장은 인천입니다. 이 인천은 예부터 바다가 아름답고 고개가 가득한 조그마한 바닷마을입니다. 한자를 새기면 ‘어진내’라고도 하는데, 높은 멧자락은 없어도 구백아흔아홉 고개가 있다고 할 만큼 고개나 언덕이 많아요. 그런데 일제강점기 무렵부터 군수공장이 들어서야 했고, 서울로 보내는 물건을 실어나르는 길목이 되어야 했습니다. 해방 뒤에는 아주 공장도시로 바뀌었어요. 저는 ‘아름다운 바닷마을’인 모습이 자취를 감추고 ‘매캐한 공장도시’일 적에 이 고장에서 태어났습니다. 집은 골목집이되, 마을 둘레는 어디를 보아도 겹겹이 공장이었어요. 여름에도 창문을 열기 어려웠는데 때때로 매우 새로운 한 가지를 느꼈습니다. 제법 커다랗기에 동무들하고 타고 오를 만한 나무 곁에 있으면 한여름에 안 덥더군요.


  어른 눈으로 보면 대수롭지 않은 대목일 수 있고, 교과서나 방송에서 한 마디로도 안 가르친 대목일 텐데, 나무그늘은 선풍기는 저리 가라 할 만큼 시원했고, 늘 바람이 감돌았어요. “야! 나무 곁에 앉으면 되게 시원해!” 하는 말이 늘 절로 터져나왔어요. 나무그늘이 아닌 곳에서도 바람이 화악화악 화라라락 들어오면 어찌나 시원하던지, 바람이야말로 불볕을 식히는 멋진 동무라고 느꼈습니다.


  한여름에 선풍기를 틀고 마루에 앉아서 수박을 먹다가도 그랬어요. 열어 놓은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오면 “바람이 아주 시원하다!” 하고 어느새 외쳤습니다. 다만 이 바람결에 매캐한 기운이 늘 묻어났는데, 그래도 바람이 반가워 회오리바람이 치니 밖에 나가지 말라고 타이르던 때에도 몰래 밖에 나가서 회오리바람을 실컷 맞으면서 놀곤 했습니다.


  오늘날 새롭게 태어나서 자라는 어린이는 어떤 터전을 누릴까요? 어릴 적에 나무그늘에 감도는 바람을 누릴까요, 아니면 선풍기도 그닥 안 쓰는 채 에어컨 바람을 누릴까요? 나무그늘에 감도는 바람은 숲이 거저로 베풀 뿐 아니라 전기도 발전소도 송전탑도 아무것도 없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줄 몸으로 얼마나 받아들이는 삶터일까요?


  《이오덕 마음 읽기》(자연과생태, 2019)라는 책을 써내는 동안 내내 나무를 떠올렸습니다. 멧골에서 멧노래를 부르는 멧새로 다시 태어나고 싶던 이오덕이란 어른을 ‘어른’으로 여기기보다는 ‘마음동무’로 만나려고 이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이오덕 어른 유족은 저더러 ‘아버지(이오덕) 평전이나 전기’를 쓰면 어떻겠느냐고 물으셨으나, 저는 이오덕 어른이 남긴 글하고 책을 갈무리하는 데까지만 일하겠다고, 평전이나 전기는 다른 사람 몫이 되도록 하겠다고 손사래쳤습니다.


  다만, 떠난 어른을 책으로 만날 이웃을 헤아리자면, 어른이 책에 남긴 마음은 조금 짚어 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를테면 〈우리 말 우리 얼〉 1999년 2월호에 “책도 보기는 해야 하겠지만 그 속에 빠져 버리지는 말라(20쪽)” 하고 말씀하셨어요. 곧, 이오덕 어른이 글이며 책을 쓴 바탕이라면, 에어컨도 선풍기도 아닌, 더구나 부채조차 아닌, 집이며 마을에 나무가 우거져서 ‘숲이 베푸는 바람’을 언제나 누구나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고, 이 마음을 밝혀 보자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기틀 ← 기반. 기초. 여건. 조건. 요소. 요건. 토대. 근간. 베이스. 포인트


  제가 쓰는 말은 제가 어릴 적부터 둘레 어른들이 쓰던 말이면서, 저 스스로 삶을 가꾸어 살림을 짓는 길에 새롭게 익힌 말입니다. ‘기틀’은 어릴 적부터 둘레 어른들이 으레 쓰던 말이라 귀에도 손에도 눈에도 익어요. 아무렇지 않게 ‘기틀’이란 말을 쓰는데, 어느 날 어느 분이 ‘기틀’이란 말을 저한테서 처음 듣는다고, 그런 한국말이 있느냐고 갸우뚱해 하셨습니다. 그때에 저도 갸우뚱했어요. ‘아니, 이 말을 모르는 분이 있네?’ 이러다가 다시 생각했어요. 강원도 바닷가에서 나고 자란 어느 이웃님은 인천이나 충남 바닷가에 처음 찾아가던 때에 ‘밀물썰물’을 보고 깜짝 놀랐다면서, 그분이 서른 살에 이르도록 그분 고장에서는 ‘밀물썰물’이란 말을 듣지도 못했다고 한 적이 떠올랐습니다.


  삶자리에서 흐르는 말은 그 삶자리에 있는 사람한테는 매우 익숙하면서 마땅합니다. 삶자리에서 보기 어렵거나 못 보는 살림하고 얽힌 말이라면, 서른 살이나 쉰 살이 되더라도 그러한 말을 알기도 힘들지만, 문득 소리로 들어도 알아차라기 어렵습니다.


  ‘기틀’이란 낱말을 어느 자리에 어떻게 쓰는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니 여러 한자말하고 영어가 떠오릅니다. 온갖 말을 재미나게 쓰고자 여러 한자말하고 영어를 끌어들일 수 있어요. 그런데 어쩌면 ‘기틀’이란 말을 어릴 적부터 못 듣고 자란 터전이라서 ‘기틀’을 홀가분하면서 즐겁게 쓰는 길을 아직 익히지 못한 셈일 수도 있습니다.


  삶 아닌 책으로 글을 읽으며 말을 배우다 보면, 글이나 책 아닌 삶으로 말을 배운 이웃하고 멀어질 수 있습니다. 책이나 글 아닌 흙살림으로 말을 편 시골 할배는 ‘기둥·뿌리·줄기·나들이’ 같은 말을 으레 쓰지만, 책이나 글에서는 ‘근간·근본·맥·외출’ 같은 낱말이 흘러요.


  반드시 이쪽 낱말을 써야 하지 않습니다. 저쪽 낱말을 꼭 이쪽 낱말로 고쳐서 써야 할 까닭이란 없습니다. 모든 밑바탕은 오롯이 하나, 삶에서 피어난 말을 즐겁게 쓰며 기쁘게 나누는가이지 싶어요. 돌개바람을 느끼고, 빗물을 마시고, 흙내를 맡는 말씨를 새로우면서 즐겁게 가꾸어 오늘에 맞게 산뜻하게 북돋우면 참으로 넉넉하리라 봅니다.


  《이오덕 마음 읽기》라는 이름으로 책을 내기까지 얼추 열다섯 해쯤 걸렸지 싶습니다. 지난 열다섯 해가 길었다면 길지만, 새롭게 배우며 걸어온 나날로 본다면 알맞춤하게 흐른 하루하루였다고 느낍니다. 책이름에 ‘마음’이란 낱말을 굳이 넣었는데, “이오덕 읽기”라고만 하지 않은 까닭이 있어요. “이오덕을 읽는” 데에서 그쳐도 나쁘지 않지만 “마음을 읽는” 길로 뻗어 본다면 한결 즐겁거나 기쁘게 마음동무를 만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떠난 어른이 쓴 ‘우리 글 바로쓰기’이든, ‘동시하고 동화’이든, ‘교육·사회 비평’이든, ‘권정생 님하고 나눈 글월’이든, ‘긴긴 해를 채운 일기’이든, ‘어린이문학 비평’이든, ‘숲을 그리며 쓴 수필’이든, 어떤 마음을 글로 그려내어 우리한테 어떤 빛을 건네거나 물려주고 싶어하셨나 하고 ‘마음’을 돌아본다면, 새삼스레 나무그늘 바람 한 줄기가 후욱 끼친다고 느껴요.


  어느 모로 본다면, 어른 한 사람은 ‘우람한 나무’라기보다는 ‘아이들이 신나게 타고 노는 나무 한 그루’요, 이 나무 한 그루는 예닐곱 아이들쯤이 나무그늘을 누리면서 땀을 식힐 적에 후욱후욱 싱그럽고 푸른 바람을 일으켜서 살살 어루만져 주는 셈일 수 있습니다.


마음동무 : 1. 마음이 맞거나, 마음을 나누거나, 마음을 서로 읽거나, 마음이 같이 흐르는 사이 2. 낯설거나 어려운 일을 마음으로 헤아려 주면서 차근차근 차분히 이야기를 들려주어 기운이 나도록 이끄는 사이.


  여느 한국말사전에 아직 ‘마음동무’란 낱말이 없습니다. 제가 새로 쓰는 한국말사전에는 ‘마음동무’라는 낱말을 넣을 생각이고, 뜻풀이를 붙여 보는데, 얼핏 새 낱말 하나가 가슴으로 스칩니다. 마음동무가 되는 사이가 있다면, ‘마음어른’으로 곁에 모시면서 삶이며 살림을 배울 분이 있을 만하겠다고. 마음에 빛이 될 만한 어른이라면 ‘마음어른’이겠구나 하고.


  ‘절친’이나 ‘소울메이트’ 같은 말도 쓸 수 있지만, ‘마음동무’를 써도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정신적 지주’나 ‘멘토’ 같은 말도 쓸 수 있는데, ‘마음어른’을 써도 즐거우리라 생각합니다. ㅅㄴㄹ


제 나름대로 길을 찾았습니다. ‘즐겁게’입니다. 쉽게 읽지도 않되 어렵게 읽지도 않는 길이란 ‘즐겁게’ 읽는 길이지 싶습니다. 이오덕 님을 함께 읽을 이웃님도 늘 마음자리에 ‘즐겁게’를 씨앗으로 놓아 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오덕 마음 읽기》 153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사전을 쓰는 사람.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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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숲마실

바깥담책꽂이랑 살림하는 어깨동무 (2018.3.30.)

― 도쿄 진보초 〈矢口書店〉



  전남 고흥에서 일본 도쿄를 가자면, 먼저 부산공항으로 가야 합니다. 고맙게도 고흥에서 부산으로 가는 시외버스가 있고, 이 버스를 타고 네 시간 즈음 달린 뒤에, 부산전철을 갈아타고 공항으로 가서 짐을 맡기면 되어요. 일본 도쿄는 2001년에 처음 간 적이 있으니 열일곱 해 만에 새로 찾아가는 셈입니다. 국제선을 타기도 오랜만이라 이래저래 헤매면서 비행기를 탔고, 얼마 안 있다가 나리타에 내립니다. 생각해 보면 매우 짧은 길입니다. 고흥에서 도쿄나 오사카 같은 일본에 가는 길은 오히려 고흥에서 강릉이나 구미나 양주 같은 곳에 갈 적보다 짧은 길이기까지 합니다.


  시외버스에서, 전철에서, 비행기에서, 이웃이란 누구이고 어디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가 하고 가만히 헤아렸습니다. 이러면서 동시를 스무 자락쯤 씁니다. 누구한테 줄 한글 동시인지 모르지만 저절로 이야기가 흘러나와서 바지런히 옮겨적었습니다. 나리타공항에 내려서 도쿄로 들어서는 전철을 탄 뒤에도 동시를 씁니다. 제대로 전철을 탔는지 아리송하지만 길을 잃을 걱정은 안 합니다. 요새는 손전화로 어느 나라에서든 길찾기를 할 수 있거든요. 더욱이 종이로 길그림을 잔뜩 뽑아 왔습니다.


  전철을 함께 탄 사람들이 수다를 떠는 말씨는 거의 일본말이지만, 사이사이 영어가 섞입니다. 마치 사투리를 듣는 듯 이 말씨를 한귀로 들으면서 동시를 더 썼고, 오늘 하루 동안 스물여덟 꼭지를 마무릅니다.


  우에노역에서 전철을 내려 갈아탑니다. 스무 해가 얼추 안 된 예전에 이곳에 왔던 일이 한달음에 떠오릅니다. ‘어쩜, 이 나라 이 고을은 영 안 바뀌네? 그대로잖아?’ 군데군데 한글 알림판이 붙은 모습이라든지, 새로 생긴 가게나 다를 뿐, 길이나 골목이나 전철역이나 웬만한 골목집은 그대로라고 느낍니다. 어쩌면 이런 모습이 오랜 살림이요, 문화이자 역사일 테지요. 길바닥 돌을 바꾼다든지 뭘 어수선하게 뜯어버리고 새로 올려서 장사를 잘하는 길을 찾으려 하면 그저 장사일 뿐, 살림(문화)하고는 멀어질 테고요.


  도쿄 진보초에서 만난 분이 잡아 준 길손집(호텔)에 짐을 풀기로 합니다. 일본은 한국보다 값이 세겠거니 여겼습니다만, 이 길손집은 하루에 1만 엔쯤 치릅니다. 한국에서도 서울 한복판이면 10만 원쯤 잠값을 치러야 하니 비슷한 셈이로구나 싶습니다. 아무튼 짐은 나중에 갈무리하기로 하고, 얼른 가벼운 차림에 사진기를 챙겨서 나옵니다. 벌써 해가 기울려 하거든요. 해가 기울면 일본 진보초 책집은 일찌감치 문을 닫아요. 문을 닫기 앞서 한 곳이라도 찾아가고, 한 자락이라도 장만하며, 사진도 찍자는 마음으로 바쁩니다.


  길손집을 나와서 처음 마주하는 책집은 〈矢口書店〉입니다. 이곳은 2001년에 이곳에 왔을 적에도 아주 남달리 보인 책집이었어요. 그러나 그때에는 이곳에서 책을 사지 못했습니다. 이 마실길에는 이곳에서 꼭 책을 사야겠다고 다짐하며 바깥담에 마련한 책꽂이를 살핍니다. 책집 안쪽도 멋스러울 테지만, 〈矢口書店〉은 바깥담을 빙 두른 책꽂이가 어여쁩니다. 아침이나 낮에 보아도 멋스러울 책빛일 텐데, 어스름에 보는 책빛도 멋스럽습니다.


  한국에서도 이렇게 바깥담을 두른 책꽂이를 놓을 수 있을까요. 슬쩍 훔치려는 손길을 살며시 어루만지려는 책손으로 바꿀 수 있을까요. 일본에도 책을 훔치는 이가 제법 있다고 합니다만, 어쩌면 이 ‘바깥담책꽂이’는 책으로 마을을 새삼스레 감싸면서 포근한 기운을 나누어 주는 새길일 수 있겠다고 느낍니다.


  책을 하나하나 쓰다듬으며 살피다가 사진책 《北上川》(?部澄, 平凡社, 1958)을 봅니다. 어느 냇마을 사람들 이야기를 사진으로 묶었습니다. ‘키요시 소노베’란 분 사진인데, 사진결이 푼더분하면서 그윽합니다. 1958년 사진책이라면 이 냇마을 삶자락을 적어도 1950년대부터 찍었다는 뜻일 테고, 어쩌면 1940년대나 1930년대부터 찍었을 수 있으며, 오래도록 곁에서 지켜보고서 찍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1958년에 이만 한 사진책을 선보이려는 사진님이 있었을까요. 아니 1968년이나 1978년이나 1988년에 이르도록 냇마을이며 들마을이며 숲마을이며 바닷마을 사람들하고 어깨동무하는 이웃이라는 마음으로 사진을 찍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쓴 님이 몇이나 있었을까요. 잊혀지거나 사라지는 옛모습을 담는 사진이 아닙니다. 오늘 여기에서 즐겁게 살림을 지으면서 노래하는 이웃하고 손을 맞잡는 웃음하고 눈물로 담는 사진입니다.


  두 손에 찌르르 울리는 숨결을 느끼며 이 사진책을 골라 〈矢口書店〉 안쪽으로 들어서는데, ‘스미마셍’이라 하며 곧 문을 닫는다고 알립니다. 안쪽에도 눈에 뜨이는 아름다운 사진책하고 만화책이 코앞에 있으나 더 고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꼭 하나를 만났으니 고맙지요.


  이튿날 다시 찾아와 보는데, 어제 안쪽에서 보던 그 책꾸러미를 어느 자리 어느 칸으로 옮겨서 꽂거나 두었는지 찾을 길이 없습니다. 어제오늘 만나지 못한 책이라면, 앞으로 언젠가 다시 만나겠지요. 여기에서든 다른 데에서든.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사전을 쓰는 사람.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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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숲마실


과일집 곁에서 문어에 깃든 넋을 생각

― 광주 〈책과 생활〉

광주 동구 제봉로 82번길 13-11, 2층 

070.8639.9231 

https://www.instagram.com/chaekand



  나라 곳곳에 작은 책집이 고개를 빠꼼 내밉니다. 때로는 제법 커다란 책집이 기지개를 켭니다. 자그마한 책집은 마을 한켠에 참말로 “고개를 빠꼼” 내미는데요, 왜 고개를 빠꼼인가 하면 참말로 조그맣게 조용하게 태어나거든요.


  어쩜 이 자리에 책집을 여는가 하고 여길 만합니다. 이런 곳에도 책집을 열 수 있나 싶기도 해요. 그렇지만 마을책집은 자리를 아랑곳하지 않아요. 더 좋은 목이라든지 사람이 더 많이 드나드는 길목이 아니라, ‘사람들이 사뿐사뿐 걸어서 즐겁게 찾아갈 만한 마을’에서 새롭게 이야기를 열려고 해요.


  지난날을 생각해 봅니다. 지난날에는 그야말로 좋은 목이 아니라면 책집을 열기 어렵다고들 여겼습니다. ‘찾아가기 쉬운’ 곳이어야 한다고 여겼어요. 오늘날에는 ‘찾아가기 쉽거나 어렵거나’ 딱히 따지지 않습니다. 아무렴, 그렇지요. 모든 곳은 저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터예요. 도시라는 테두리에서 어느 곳은 ‘한복판’이거나 ‘언저리’일 테지만, 마을이라는 눈에서는 모든 곳은 저마다 다르게 이야기가 흐르는 즐거운 자리입니다.


  광주광역시 ‘국립아시아 문화전당’ 곁에 조그맣게 책집 〈책과 생활〉이 있습니다. 이렇게 커다란 곳 곁에도 책집이 있구나 하고 생각하며 광주 시내버스를 타고 찾아가면서 생각합니다. 그런데 마을책집 곁에는 마을가게(구멍가게)도 있고, 과일집도 있고, 머리집도 있습니다. 찻집도 있고 빵집이나 중국집이나 꽃집도 있어요.


  아하, 그렇지요. 책집은 마을에 있는 여러 가게하고 어깨를 겯습니다. 마을에 숱한 가게가 있으면서 아기자기하게 마을살림을 이루는데, 이 가운데 책집 하나는 ‘숲에서 온 나무로 엮은 종이’에 이야기를 담아서 마을사람한테 다가서는 쉼터로구나 싶습니다.


  접고 접어서 빚은 《박쥐통신 1》(한일박쥐클럽, 2018.10.)라는 책이 재미있습니다. 이처럼 가볍고 단출하게 책 하나를 빚어도 좋네요. 《박쥐통신》 둘째 이야기는 언제 나올 수 있을까요.


  시골에서 살며 손수 쑥잎을 덖어서 잎물을 누립니다. 쑥잎이든 찻잎이든 어떻게 잎을 훑고 덖으면 되는가를 알려주는 자리가 드뭅니다. 그래도 이곳저곳을 살피고 찾아내었는데요, 《아홉 번 덖음차》(묘덕, 담앤북스, 2018)는 누구나 어렵지 않게 찻잎을 덖는 길을 알려줍니다.


  이런 책을 진작 알았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지만, 늦게 알았어도 반갑습니다. 더구나 《아홉 번 덖음차》는 다룸새만 들려주지 않아요. 아홉벌에 걸쳐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도 들려주지만, 이에 못지않게 ‘찻잎이 되어 주는 나뭇잎이나 풀잎을 손으로 만지는 넋하고 숨결’을 곰곰이 보면서 이야기를 엮어요. 손길 하나에 사랑을 담을 노릇이요, 불길을 다스려 찻잎에 얹을 노릇이며, 눈길이 꿈길이 되도록 건사하는 몸짓으로 덖음질을 마주하라고 알려줍니다.


  꽤 궁금하던 바닷자락 이야기를 읽을 수 있는 《문어의 영혼》(사이 몽고메리/최로미 옮김, 글항아리, 2017)을 만납니다. 그래요. 문어하고 오징어한테도 넋이 있지요. 넋이 없는 목숨이란 없어요. 문어나 오징어는 ‘사람들이 잡아서 먹는 밥’이기만 할 수 없습니다. 바닷자락에서 살아가는 숨결이지요.


  멸치나 꽁치도 그래요. 그냥 물‘고기’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손쉽게 ‘물고기’라 이르지만, ‘먹이(고기)’로만 본다면 이들 바닷자락 이웃한테서 아무런 이야기를 못 들어요.


  마땅한 소리입니다만, 나락 한 톨에도 넋이 흐르기 마련입니다. 콩 한 알에도 넋이 흘러요. 깨알에도, 강아지풀에도, 모든 들풀하고 나무에도 넋이 흐릅니다.


  마을책집 〈책과 생활〉은 과일집 옆 건물 2층에 있습니다. 길 쪽만 보고 걸으면 자칫 놓칠 수 있습니다. 해가 한결 잘 드는 2층에 깃든 〈책과 생활〉이라 창가에 놓은 꽃그릇은 햇볕을 듬뿍 머금습니다. 햇빛이 그윽하게 스미면서 조용합니다. 책시렁이며 책꽂이 곁을 가붓하게 거닐다 보면 우리 마음으로 살짝 젖어들려 하는 책을 한 자락 만날 만해요. 마을에서 책을 만나고, 마을에서 이야기를 느끼고, 마을에서 나들이를 즐깁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사전을 쓰는 사람.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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