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꽃

― 마음을 노래하기 : 우리말로 시쓰기



곳 : 부천 원미동 〈용서점〉

때 : 2025.3.25.16시.

누가 : 파란놀(최종규).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을 쓴 사람.



〈마음꽃〉이란?


: 글을 잘못 보는 사람이 수두룩합니다. ‘글’이란 “그린 말”입니다. 말을 그려 놓았기에 ‘글’입니다. 글은 그리 대단하지 않습니다. 말이 없으면 아무런 글이 없어요. 글을 쓰고 싶다면 말을 하면 됩니다. 다만, 사람들 앞에서 왁자지껄 떠들어야 말이지 않아요. 내가 나로서 어떤 마음인지 스스럼없이 드러내고 밝히면서 나타내려고 하기에 비로소 ‘말’입니다. 마음소리인 말을 손수 옮기기에 글입니다. 〈마음꽃〉이란, 우리가 스스로 우리 마음을 고스란히 느끼고 담아서 나누려고 할 적에 저절로 꽃이 피어난다는 뜻으로 펴는 노래쓰기(시창작) 자리입니다.



〈마음꽃〉을 나누는 길


ㄱ. 말이란, 마음을 담은 소리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을 어떤 말로 담아서 서로 나누는지 먼저 차분히 짚고 돌아봅니다.


ㄴ. 우리는 늘 ‘우리말’을 하지만, 정작 우리말이 무엇인지 거의 모릅니다. ‘순우리말(토박이말)’이어야 우리말이지 않습니다. 나와 너를 아우르는 말이기에 우리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말 : ‘나 + 너 = 우리’를 이루려고 서로 마음을 잇는 말”처럼 뜻풀이를 새로 할 일이라고 느낍니다.


ㄷ. 우리말 : 누구나 스스로 뜻과 생각을 나타내고 나누면서, 너와 내가 ‘우리’로 어울리는 길을 여는 즐거운 마음소리. 너하고 나를 아우르면서 나누는 말. 우리가 쓰는 말. 우리나라 사람이 쓰는 말. 우리가 예부터 물려주고 물려받으면서 쓴 말. 우리가 스스로 삶을 짓고 서로 사랑하면서 함께 나누고 하루하루 즐겁게 일군 말. 우리 스스로 생각해서 쓰는 말. 우리 나름대로 삶을 가꾸고 지으면서 나란히 가꾸고 지어서 쓰는 말.


ㄹ. 낱말뜻을 ‘국립국어원 낱말책’에 기대어 살피지 않습니다. 모든 말은 바로 “우리 스스로” 지어 왔습니다. 먼먼 옛날부터 나처럼 너처럼 우리처럼 수수한 누구나 스스로 이 살림자리에서 지은 ‘우리말’인 터라, 우리는 이 〈마음꽃〉을 펴면서 “그저 우리말에 담은 나와 네 마음”을 읽기로 합니다.


ㅁ. 말빛과 말결과 말씨를 찬찬히 짚고 나서, 문득 낱말 하나를 글감으로 삼아서 쪽글을 적어 봅니다. 손바닥만 한 조그마한 종이에 열 줄 안팎으로 나와 너를 아우르는 이 삶에서, 나는 나로서 내 이야기가 무엇일까 하고 헤아리면서 내 손으로 사각사각 글을 적어 봅니다.


ㅂ. “입으로 하는 말”을 “손으로 담는 글”을 여민다고 할 만합니다. 우리는 마음과 마음을 말로 이으니, 다시금 이 마음과 마음을 글로 여미기도 합니다.


ㅅ. 남한테 보여주려는 글이 아니라, 바로 내가 스스로 두고두고 되읽으면서 “내 마음을 다스릴 이야기”를 씁니다.


ㅇ. 내 나름대로 내 말씨로 쓴 글을 살며시 손질해 봅니다.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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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삶읽기 / 삶꽃

수다꽃, 내멋대로 63 한국말 잘하네



  2025년 3월 15일, 부산나루 건너에 있는 〈창비부산〉에서 《혼란 기쁨》이라는 책을 놓고서 두런두런 마음을 나누는 책모임이 있다. 이날 마침 부산에 일을 하러 간 터라, 더욱이 부산 사상나루에 내려서 만나는 이웃님이 보수동에 있기에 시내버스를 타고서 사뿐히 찾아갔다.


  이날까지 까맣게 잊었는데, 《네 머리에 꽃을 달아라》(김비, 삼인, 2011)를 진작에 읽었고, 2012년 1월 5일에 느낌글을 쓰기도 했다. 어느새 열 몇 해 지난 묵은글인 터라 잔뜩 손질하고 뜯어고쳐야 할 텐데, 김비 님은 ‘어지럽’거나 ‘힘든’ 일이 없이 여태 살아냈다고 느낀다. ‘어지러운’ 사람은 김비가 아닌 “김비를 보는 남”일 뿐이고, ‘힘든’ 사람도 김비가 아닌 “김비를 보며 쫑알거리는 남”일 뿐이다.


  처음 들어서는 〈창비부산〉이라서 예가 맞나 하고 두리번거리다가 들어갔고, 책모임 자리에 가려면 뒷간에 갈 수 없으니 기다려서 뒷간에 들른다. 이러느라 책모임 자리에는 좀 늦게 닿는다. 조용히 자리에 앉아서 내 글꾸러미(수첩)를 하나씩 꺼내고서 숨을 돌리는데, 이 자리에 앉은 분마다 ‘나말하기(자기소개)’를 한다. 아직 숨도 덜 돌렸으나 벌써 ‘나말하기’를 해야 한다. “국어사전을 쓰는 사람”이라고 밝히면서, “오늘 부산에서 이오덕읽기모임을 꾸리려고 왔다”가 이 책모임이 있는 줄 듣고서, 마침 때와 곳이 맞아서 이야기를 들으며 쉬려고 찾아왔다고 짧게 말한다.


  그런데 나랑 마주보는 앞에 있는 어느 분이 “한국말 잘하네?” 하고 한마디 불쑥 한다. 이러면서 이 자리에 앉은 분들이 다들 하하하 웃는다.


  다만, 나는 어릴적부터 “어느 나라 사람이야?” 하고 묻는 말을 들었다. 어린이일 적에도, 그러니까 예닐곱 살이나 여덟아홉 살일 적에도, 열 살이나 열세 살일 적에도, 열너덧 살이나 열예닐곱 살에도, 스무 살에도, 스물두어 살에도, 스물다섯 살이나 서른 살에도, 서른다섯 살이나 마흔 살에도, 마흔다섯 살이나 쉰 살에도 으레 듣는다. 벌써 마흔 해 넘게 들은 말이라서 시큰둥하고 대수롭지 않다. 곰곰이 손가락을 헤아리니, “한국말 잘하네?”나 “어느 나라 사람이야?” 하고 묻는 말을 즈믄(1000) 넘게 들었다.


  그렇지만 마흔 살에 이를 즈음까지 “어느 나라 사람이야? 한국인 맞아? 외국인이 왜 이렇게 한국말을 잘해?” 같은 그야말로 알쏭달쏭하고 엉뚱하고 뜬금없고 어처구니없는 핀잔인지 추킴말인지 비아냥인지 궁금(순수한 의도)인지, 그야말로 “너 한국사람이야?” 하고 따지듯이 송곳으로 후벼파는 이런 말을 그저 흘러넘기지 못 했다. 큰아이가 제법 자란 열 살 즈음에 “우리 아버지 괴롭히지 마요!” 하고 갑자기 외치는 말을 듣고서 번쩍 눈을 떴다.


  그래, 나는 누가 나더러 “한국말 잘하네?”나 “한국말 할 줄 아네?” 하고 내 얼굴과 몸을 위부터 밑까지 훑어보면서 불쑥 뱉는 말에 늘 괴로웠나 보더라. 큰아이가 외친 말은 그때에 나를 깨웠고, 우리나라 ‘진보좌파’조차도 “사람을 사람으로 안 보는” 줄, “성소수자 인권을 지키고 돕자”고 외치는 이들조차도 ‘마음’이 없는 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언제나 말을 하는데, 나는 우리말(한국말)을 못 한다. 나는 우리말을 못 하는 몸으로 태어났기에 어릴적부터 핀잔과 손가락질과 따돌림에다가 매질까지 받았다. 그래서 나는 “죽기살기로 살아남으려”고 ‘우리말(한국말)’을 조금이라도 제대로 해내려고 용을 썼다. 열세 살까지 “모든 날마다 한두 시간쯤 맞으면서 자란 아이”가 어떻게 스스로죽기(자살)를 안 하면서 살아남았겠는가.


  나는 우리말을 못 하니까, 늘 우리말을 배운다. 우리말을 못 하는 사람이니까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쓴다. 우리말을 못 하는 줄 알기 때문에, 날마다 모든 낱말을 다시 처음부터 뒤적이고 찾아보고 생각하면서 쓴다. 나는 우리말을 못 하는 사람이기에 새벽 1∼2시 무렵에 하루를 열면서 모든 말소리를 처음부터 가다듬고 제대로 내려고 해본다.


  나는 우리말을 못 하니까, 언제나 우리말을 다시 익히고 새로 가다듬는다. 나는 내가 하는 모든 말을 언제나 꼬치꼬치 짚고 돌아보면서 고치고 손질하고 바로잡는다. 나는 어릴적부터 고삭부리라서 숨을 거의 못 쉬었다. 이른바 코머거리라서, 코로 숨을 아예 못 쉬다시피 했다. 나로서는 굶기가 오히려 쉽고, 숨쉬기가 가장 힘들었다. 마흔 살까지 숨쉬기가 괴로워서 늘 숨막힌 몸으로 살았고, 마흔 살에 ‘숨쉬기’를 비로소 배웠기에, 코머거리를 하루아침에 털어냈다.


  내가 튼튼몸으로 태어났다면, 아마 다른 일을 했을 수 있지만, 내가 튼튼몸으로 안 태어났기에, 나는 나부터 들여다보고서 사랑해야 하는 길을 걸었다. 늘 주저앉고, 늘 놀림받고 따돌림받고 괴롭고 아파야 한 어릴적을 보냈고, 숨을 못 쉬어서 숨막혀 죽는 몸을 버티어내야 했기에, 혀가 짧고 말을 더듬느라 마음을 제대로 말로 못 담는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기에, “우리나라에서 한국사람으로 태어났지만, 말소리를 쉽게 못 내는 모든 이웃을 헤아리는 국어사전 쓰기”라는 일을 스스로 맡고 찾아서 짓는다고 느낀다.


  나더러 어떻게 글을 그렇게 잔뜩 쓰느냐고, 안 지치느냐고 묻는 이웃님이 많다만, 나는 글을 입으로 쓴다. 나는 ‘말더듬이’인 내 몸을 스스로 갈아엎고 싶어서 늘 “말을 하면서 글을 쓴다”고 하겠다. 그러니까, 나는 내 말소리를 가다듬고 추스르려고 글을 쓰는 셈이다. 내가 쓰는 모든 글은 “내가 말을 하는 그대로”이다.


  그래서 내 글쓰기를 잘 모르는 분은 “어쩜 최종규 씨는 책에 적힌 글하고, 입으로 하는 말이 똑같네요! 다른 작가님은 글과 말이 다르던데요!” 하고 놀라더라.


  놀랄 수 있지만, 놀랄 일이 아니다. 나는 내가 소리를 낼 수 있는 낱말만 골라서 글을 쓴다. 나는 내가 입으로 말할 수 있는 소리만 가려서 글을 쓴다. 나는 1992년에 첫글을 쓰던 그날부터 오늘 2025년에 이르기까지, 늘 말하면서 글로 옮긴다. 아니, 나는 내가 입으로 하는 말을, 나 스스로 내 손을 써서 옮겨적을 뿐이다. 나는 내 글과 내 말이 다를 수 없고, 내 말이란 내 삶이고, 내 살림이자 내 사랑이다. 그리고 내 글이란 내 숲이다.


  김비 님이 쓴 《혼란 기쁨》이라는 책을 놓고서 즐겁게 도란도란 책모임을 하려고 모인 분이라면, 어느 누구도 ‘수구 꼴통’이 아니리라 본다. 그러나 ‘수구 꼴통’이 아닌 분이 말더듬이 아저씨한테 “한국말 잘하네?” 하고 한마디를 했고, 아무도 이 말을 그자리에서 안 바로잡았고, 아무도 뉘우치지 않았고, 아무도 뭐가 잘못인지 느끼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들 웃었다.


  나도 웃었다. 그러려니 하면서 웃었다.


ㅍㄹㄴ


※ 글쓴이

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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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숲

책숲하루 2025.3.18. 돌돌돌


―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 (국어사전 짓는 서재도서관)

: 우리말 배움터 + 책살림터 + 숲놀이터



  이레쯤 앞서부터 ‘어릴적’처럼 붙여쓰기를 합니다. 여태까지 “어릴 적”이나 “어릴 때”처럼 띄어쓰기를 했는데, 굳이 띌 까닭을 더는 찾을 수 없습니다. 둘레를 보면, ‘소년기·유년기·유아기·성년기·노년기’처럼 한자 ‘-기’는 모조리 붙여쓰기를 하면서 새말을 엮는 얼거리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늘 쓰는 수수한 말씨를 차근차근 잇고 익혀서 일구려면 ‘어릴적·젊을적·늙을적·죽을적’처럼 가볍고 수수하게 붙여쓰기를 할 만합니다.


  이러구러 어릴적에 늘 앓고 드러눕고 뻗던 몸이라서, ‘차돌’이라는 이름을 얻은 동무를 늘 유난히 지켜보고 배우려고 했습니다. 차돌 같은 아이 가운데 저보다 키나 덩치가 큰 아이는 없더군요. 저도 어릴적에 조그맣고 여린 몸이었지만, ‘차돌이’는 참말로 작아요. 차돌이는 늘 참하고 차분히 지켜보고 헤아리는 매무새요 마음이고, 아무리 밉놈이나 막놈이 무슨 저지레를 일삼더라도 이놈이 하는 말을 끝까지 듣고서 굵짧게 한마디를 하더군요.


  처음부터 다그치거나 막아세우지 않던 차돌이입니다. 누구나 왜 그런 짓이나 일을 했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몽땅 듣고 나서 생각하더군요. 어떤 잘못이나 저지레를 일삼는 다른 아이도 까닭이 있게 마련이니, 먼저 말썽쟁이 마음부터 풀어내려고 하면서, 이다음에 말썽쟁이가 일으킨 말썽을 차근차근 다독이고 추슬러요.


  차돌이가 하는 말과 짓과 눈길을 늘 지켜보았습니다. 차돌이는 다른 뭇사람을 지켜보면서 스스로 배운다면, 저는 스스로 배우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다고 여겨서 차돌이를 오래오래 지켜보았습니다. 어느 날 차돌이가 불쑥 묻더군요. “넌 왜 자꾸 날 보니?”


  차돌이한테 “나는 스스로 할 줄 아는 일이 너무 없는데, 넌 참 당차게 잘 하더라. 그래서 때와 곳마다 어떻게 하는지 배우고 싶어서 가만히 보았어.” “그런데, 너는 너대로 해야 하는데, 내가 하듯이 네가 할 수 없잖아. 넌 너를 봐야 네 길을 찾을 수 있어.”


  아마 열한 살 무렵에 주고받은 말일 텐데, 그무렵에는 그저 벙뜬 채 듣기만 했다가, 쉰 살 언저리에 이 말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지난 흙닐(3.15.)에 부산으로 건너가서 이틀을 지내고서 어제 달날(월요일)에 고흥으로 돌아왔어요. 고흥집으로 돌아와서 어찌저찌 20시 무렵까지 큰아이랑 곁님하고 이야기를 하다가 곯아떨어졌고, 04시 즈음에 느즈막이 일어났습니다. 저로서는 04시에 눈을 뜨는 하루는 ‘늦다’고 여깁니다. 으레 01시나 02시에 하루를 여니까요.


  어제와 그제와 그끄제 겪은 여러 일을 돌아보면서 오늘과 모레와 글피에 할 여러 일을 그리는 하루입니다. 저는 여태 “똑같은 길”을 걸은 바가 없습니다. 남이 본다면 “똑같은 길”만 다니는 듯 보일 테지만, 저는 “남이 보는 똑같은 길”이 아니라 “어느 길을 가든 늘 새롭게 빛나는 길”이라 여기며 걷습니다.


  스무 살부터 하던 손빨래를 쉰 살에도 하고, 여덜 살부터 한나절(4시간)쯤 가볍게 걸어다니는 살림인데, “똑같은 일”을 한다고 여기거나 느낀 적이 없어요. 얼핏 보면 “되풀이하는 몸짓”일 테지만, 언제나 처음으로 마주한다고 여기면서 합니다. 두 아이 천기저귀를 손빨래를 하고 삶고 다스려서 대던 나날도, 밥살림이건 집살림이건 도맡는 나날도, 읽고 쓰고 나누고 짓는 나날도, 어느 하나조차 똑같을 수 없습니다.


  돌돌돌 구르는 차돌로 살아가려는 살림새입니다. 누구나 돌이고, 누구나 돌아보고, 누구나 동무이고, 누구나 두레이고, 누구나 동그라미입니다. 쉬운말을 새롭게 알아차리려고 하면 누구나 깨어나는 빛이자 님입니다.


ㅍㄹㄴ


* 새로운 우리말꽃(국어사전) 짓는 일에 길동무 하기

http://blog.naver.com/hbooklove/28525158


*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 지기(최종규)가 쓴 책을 즐거이 장만해 주셔도 새로운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짓는 길을 아름답게 도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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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16일 

바로 오늘 곧 펼 이야기꽃이 있다.

밑글을 올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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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읽기 모임 (11걸음)

― 바보눈 + 나살림 : 바라보고 보살피는 눈 + 나를 살리는 씨앗



곳 : 부산 거제동 〈책과 아이들〉과 함께

때 : 2025년 3월 16일 (일요일) 10∼12시

님 : 숲노래 × 곳간출판사

곁 : 《아나스타시아 1∼10》



얼개

ㄱ. 이오덕을 바라보면서 나를 보살피는 눈을 틔운다.

ㄴ. 드높은 봉우리가 아닌, 아이 곁에 있는 어른을, 아이한테 쉬운말로, 상냥하게 이야기 들려주며, 어깨동무하는 마음을, 우리 눈으로 바라보고서, 우리 손으로 적으면서, ‘나살림’으로 나아간다.

ㄷ. 이오덕을 읽어가면서 ‘나’라는 마음과 삶을 새롭게 바라보는 눈을 생각한다.

ㄹ. 여태 이오덕 책은 두루 읽었으니, “‘이오덕’이라면 어떻게 읽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나는 나를 사랑으로 읽을 수 있는가?” 하고 묻는다.



줄거리 : 어린이가 푸름이를 지나고 젊은이에서 어른으로 (+ 2002 붉은물결)



  지난 2004년에 《아이들에게 배워야 한다》라는 책이 나온 적 있습니다. 2002년에 네덜란드사람 히딩크 님이 우리나라 축구선수를 가르치고 이끌어서 ‘축구잔치’에서 선보인 놀라운 일을 풀어낸 꾸러미입니다. 이오덕 님은 ‘스포츠’를 아예 안 쳐다보는 분인데, 2002년 그해에는 온나라 젊은이가 한물결을 이루어 새롭게 목소리를 내어 모이는데, 돌멩이 하나 던지지 않고도 나라를 바꿀 수 있는 커다란 밑힘을 느꼈다고 합니다. 한겨레 밑넋이 이렇게 춤노래와 어울림과 어깨동무로 사랑을 그려서 심는 아름다운 몸짓인 줄 새삼스레 바라보았다지요.


  히딩크 님이 쓴 《마이 웨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뜻밖이라면 뜻밖으로 ‘조선일보사’에서 펴냈습니다. 다른 곳도 아닌 조선일보사에서 나온 《마이 웨이》라서 2002년부터 2024년에 이르도록 거들떠보기 싫어서 고개를 돌리다가, 2025년에 이르러 헌책집에서 300원을 치르고 사읽었습니다. 스물 몇 해가 지났으니 300원쯤으로 파는 곳이 있으면 사읽을 만하겠거니 여겼습니다.


  《아이들에게 배워야 한다》(이오덕, 길, 2004)를 읽으면서 삶·마음·물결·어깨동무가 우리 살림길하고 얽힌 대목을 엿보았습니다. 《마이 웨이》(거스 히딩크, 조선일보사, 2002)를 읽으면서 사람·마을·눈빛·생각을 우리 스스로 어떻게 맺고 푸는가 하는 실타래를 들여다보았습니다. 두 가지 책을 나란히 읽어 본다면, 우리가 어떤 틀을 단단하게 세우면서 스스로 갇히는지 느낄 만합니다. 우리가 어떤 틈을 살그머니 내어 새롭게 싹틀 수 있는지 배울 만하고요.


  모든 사람은 몸에 씨앗을 품습니다. 사람이 몸으로 품은 씨앗은 혼자 싹틔우지 못 합니다. 나무도 사람과 같고, 헤엄이와 짐승도 나란합니다. 이따금 홑몸으로 암수씨를 함께 건사해서 아기를 낳을 수 있기도 하지만, 굳이 이 별에서 살아가는 뭇숨결은 암몸과 수몸으로 갈라서 암씨와 수씨를 따로 건사합니다. 팔을 하나 잃으면 외팔을 다루어 빚거나 짓는 매무새를 익힐 수 있되, 사람몸은 처음부터 왼오른손에 왼오른팔에 왼오른발에 왼오른다리를 나란히 쓰는 결로 나옵니다. 나무로서는 뿌리와 가지가 땅밑과 땅바닥에서 나란하지요. 헤엄이와 짐승과 벌나비와 풀벌레 모두 왼오른을 나란히 다루어야 합니다.


  둘을 하나로 마주할 적에 비로소 ‘온’이요, ‘함께(하나)’라고 합니다. 따로 있는 둘을 하나로 맞이하기에 ‘알(알다)’이면서, ‘하늘(바람)’이라고 합니다. 지난 2002년 한물결은 2025년 외침길하고 다릅니다. 2002년 한물결에는 왼오른이 없이 한빛이었습니다. 한물결을 이룬 한빛을 북돋운 네덜란드 아저씨는 ‘졸업장·학맥·인기’를 따지지 않으면서 사람을 뽑았습니다. 네덜란드 아저씨는 ‘감독과 선수 모두 알맞게 쉬어야 한다’고도 밝혔습니다.


  대학교에서 도서관학과를 마쳐야 ‘도서관을 열어서 돌보’거나 ‘책집을 차려서 꾸릴’ 수 있지 않습니다. 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과나 문예창작학과를 마쳐야 ‘글을 쓰’거나 ‘책이야기를 쓰’지 않습니다. 책을 사랑하며 마음으로 품기에 책숲(도서관)을 열거나 책집을 차립니다. 글을 사랑으로 헤아리기에 손수 쓰거나 읽으면서 마음을 나눕니다. 똑같이 달리거나 빨리 달려야 하지 않고, 첫째로 들어오거나 둘째나 셋째쯤 차지해야 하지 않습니다. 몇 째로 달리건 대수롭지 않습니다. 달리는 마음을 누리면서 스스로 기뻐할 노릇입니다. 어느 책을 읽건 스스로 보금자리를 일구는 살림빛을 익힐 노릇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바탕을 다진 뒤에는 ‘어느 길’과 ‘어느 일’과 ‘어느 말’을 다독이려는지 돌아보아야지요. 뜻이 훌륭하기에 아무 길이나 가도 되지 않습니다. 마음이 착하기에 무슨 일이나 해도 되지 않습니다. 생각을 밝히기에 아무 낱말에나 얹어도 되지 않습니다. “말이 씨가 된다”라는 살림말을 늘 되새길 줄 알아야 “어느 말을 혀와 손에 얹듯 스스로 사랑”입니다. ‘말씨’에 깃드는 마음이 아닌, ‘말씨’에 ‘뜻(주의·주장)’만 담으려고 하면, 그만 자그마한 말씨는 펑 터집니다.


  어린이는 많이 배워야 하지 않습니다. 어린이는 그저 신나게 뛰놀며 조잘조잘 수다꽃을 피울 노릇입니다. 푸름이는 어린이보다 더 배워야 하거나 대학교에 가야 하지 않습니다. 푸름이는 차츰 철드는 빛을 몸마음으로 함께 느끼고 누리면서 새빛을 바라보고 심는 길을 익힐 노릇입니다. 젊은이는 아무 데나 부딪혀 봐야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몸마음에 심은 꿈씨를 늘 바라보면서 어느 곳에서든 꿈빛을 그리는 매무새를 돌볼 노릇입니다. 어른은 어린이와 푸름이와 젊은이라는 길을 지나온 슬기를 차근차근 풀어서 둘레에 나눌 노릇입니다.


ㅍㄹㄴ

※ 글쓴이
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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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15일

오늘 부산 마을책집 <카프카의 밤>에서 펴낸 '이응모임'은

20시보다 30분 앞서인

19시 30분부터 꾸립니다.


새로 태어난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우리말 어원사전)>을 곁에 놓고서

이 도톰한 낱말책을 기리는 수다잔치도 살며시 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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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읽는 “이응모임” 11걸음

― 새롭게 있고, 찬찬히 읽고, 참하게 잇고, 느긋이 익히고



때 : 2025.3.15.토. 19시 30분

곳 : 부산 연산동 〈카프카의 밤〉

님 : 숲노래 × 곳간출판사

곁 : 《나무처럼 산처럼》을 미리읽기, 또는 〈카프카의 밤〉에서 사기



줄거리

가. 다리

 ㄱ 다가가다

 ㄴ 다다르다

 ㄷ 다니다

 ㄹ 사이를 놓다

 ㅁ 땅


나. 손

 ㄱ 솟다

 ㄴ 속

 ㄷ 소리

 ㄹ 소근소근

 ㅁ 솥


다. 노래

 ㄱ 손가락틀을 배우다

 ㄴ 멧길을 오르내리면서

 ㄷ 아이들한테 들려주면서

 ㄹ 말할 수 없던

 ㅁ 윤이상과 부산


라. 이원수 동요

 ㄱ 헌 모자

 ㄴ 고향의 봄

 ㄷ 부끄러워서

 ㄹ 전자건반

 ㅁ 국가보안법


+


열걸음 : 걷고 생각하고 호미를 쥐고 (윤이상)


  우리는 아직 마음을 고스란히 나누기에는 만만하지 않은 나날을 살아갑니다. 일본굴레(일제강점기)에 생긴 ‘국가보안법(치안유지법)’이 버젓하거든요. 일본은 ‘치안유지법’을 내세워서 주리를 틀고 재갈을 물렸다면, 1948년부터 이승만은 이 땅에 새롭게 굴레(독재)를 씌우려고 ‘국가보안법’을 내세웠습니다. 나중에 박정희는 ‘반공법’을 더했으니, ‘국가보안법·치안유지법’이란, 이 나라 우두머리와 벼슬아치를 나무라는(비판) 모든 목소리를 쳐내는 칼 노릇입니다.


  ‘나라를 지킨다(애국)’는 허울을 내세우지만, ‘나라’는 언제나 ‘권력자(대통령·국회의원·기득권정당·공무원)’였을 뿐, “나라를 이루는 사람들”이지 않았습니다. “나라를 이루는 사람들”을 억누르면서 입틀막을 하는 칼 노릇인 국가보안법입니다. 자유·평등·평화·통일, 이런 길을 모두 막는 사나운 굴레인데, 1997년(김대중)과 2002년(노무현)과 2017년(문재인)을 거쳤어도 세 사람 모두 국가보안법을 없애지도 고치지도 않았습니다. 국가보안법은 어느 쪽 정당한테만 이바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득권정당은 언제라도 “최고권력을 거머쥘 때”가 있다고 여겨서 ‘몹쓸굴레(악법)’를 조용히 내버려둘 뿐입니다.


  이오덕 님은 1997년에 김대중 씨를 밀었습니다. 김대중 씨가 ‘국가보안법 폐지’를 비롯해서 ‘어린이와 여린이를 돌보는 새길’을 열겠다는 다짐을 했기 때문인데, 막상 김대중 씨는 대통령 자리에 들어서고 나서 어느 다짐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주민등록증 한자 표기 의무’를 밀어붙이고, 공공기관과 공공문서에 한글조차 안 쓰고서 한자와 영어를 즐겨쓰기도 했습니다.


  이오덕 님이 눈을 감은 2003년까지도 ‘학교 체벌(교사폭력) + 돈자루(촌지)’는 고스란했고, 이승만·박정희 기득권정당이 아닌 민주당이 최고권력을 잡았어도 이 굴레(학교 체벌)에 마음을 쓰지 않았습니다. 2025년에 이르도록 배움불굿(입시지옥)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배움불굿이 그대로여야 어린이와 푸름이가 나라(사회·정치)에 마음을 쓸 겨를이 없이 ‘교과서(나라에서 외우라고 시키는 지식·정보)’에 갇힌 채, 스스로 생각하는 날개를 못 펴거든요. 이오덕 님은 ‘더 날뛰는 지옥으로 치닫는 대학입시’를 없애기를 바랐습니다. 대학입시(입시지옥)를 없애야 ‘체벌·촌지’를 비롯한 모든 교육 문제를 풀 만하리라 보았습니다.


  이오덕 님은 혼자 걸을 수 없어서 바퀴걸상에 몸을 맡겨야 하는 늘그막을 맞이했습니다. 거의 하루를 자리에 누워서 보내야 하면서 멧마실을 못 했습니다. 철이 바뀌는 해바람비를 맞이할 수 없는 삶이 갑갑하여 견디기 힘들어 했습니다. 이때에 큰아들한테 ‘전자건반’을 사 달라고 얘기했고, 집이나 둘레에 아무도 없을 즈음에 혼자서 전자건반을 한참 칩니다.


  지난날에는 어린배움터(초등학교) 길잡이를 맡으려면 ‘풍금’을 반드시 치고 다룰 줄 알아야 했습니다만, 이오덕 님은 ‘풍금을 치면서 노래를 가르치는 눈금’을 훨씬 넘을 만큼 피아노를 다룰 줄 알았습니다. 여러모로 보면 일본굴레 막바지이던 무렵을 거치면서 풍금이건 노래를 배우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이 뒷이야기를 따로 글로는 제대로 남기지 않고서 말로만 큰아들한테 얼핏 귀띔을 합니다. 부산에서 한동안 교사로 일할 즈음 윤이상 님한테서 다른 한 사람하고 둘이서 피아노를 배웠다고 합니다.


  2000∼2003년 사이는 아직 ‘윤이상’ 발자취를 우리나라(남녘)에서 글로든 말로든 섣불리 펼 수 없었습니다. 국가보안법이 서슬퍼렇기도 했고, 윤이상 님 발자취를 여러모로 보면 자칫 한두름으로 묶여서 사달이 날 만했습니다. 김대중·노무현이 나라지기였어도 국가보안법은 서슬퍼렇던 즈음이요, 이무렵에도 비전향장기수·강제전향장기수와 얽힌 실타래는 크나크게 굴레였습니다. 1950년대 첫무렵에 윤이상 님한테서 피아노를 배우면서 노래짓기(작곡)도 배우셨을 텐데, 두 분 모두 이 일을 놓고서 글을 남기지 않았고 말도 거의 삼간 탓에 어느 만큼 얼마나 배웠는지는 수수께끼입니다. 그저 이오덕 님은 1951년에 부산 동신국민학교에서 길잡이를 맡았고, 윤이상 님은 한국전쟁 언저리에 부산사범학교와 부산고등학교에서 길잡이를 맡았다는 대목만 어림할 뿐입니다.


  어린이 곁에서 글(동시·동화)을 나누는 어른이자 길잡이로 서려는 마음이었고, 이원수 님하고 일찍부터 글월을 주고받고 전화로 이야기를 하고, 서울에 갈 적이면 으레 만나서 배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원수 님 글은 곧잘 동요라는 옷을 입었는데, 이오덕 님은 ‘학교에서도 가르치는 이원수 동요 가락’이 영 못마땅하다고 여겼습니다. 이원수 동시에 깃든 숨결과 이야기를 제대로 살리지 못 한다고 보았습니다. 〈헌 모자〉 같은 글에 가락을 입히지 않아서 아쉬워했습니다. 그래서 이원수 동시 가운데 열 자락 남짓 손수 가락을 입혀서 경상북도 멧골아이를 가르칠 적에 으레 풍금을 치면서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고향바다〉나 〈부엉이〉 같은 글에 가락을 입혔습니다.


  다만, 워낙 여러 일을 돌보느라 책상맡에 앉아서 노래짓기를 할 짬을 내지 못 했고, 이원수 님이 1981년에 눈을 감은 뒤로는 더 노래짓기를 하지 않은 듯합니다. 전두환이 서슬퍼렇던 1980년대에는 내내 국가보안법 사슬에 꼼짝을 못 했고, 노무현·김영삼으로 넘어선 1990년대에도 어린이 곁을 지키면서 우리말을 살리는 일에까지 마음을 쏟느라 노래짓기는 까맣게 잊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두바퀴(자전거)조차 타지 않고서 걸었기에 긴긴 거님길에서 문득문득 노래를 지었다고 합니다. 멧골마을 작은배움터에서 가르쳤으니 두바퀴를 탈 수 없었겠지요. 그저 멧숲을 따라서 오르고 내리는 기나긴 길에 멧새가 들려주는 노래하고, 바람이 나뭇잎과 나뭇가지를 건드리는 노래하고, 햇볕과 햇살이 따뜻하고 따갑게 비추는 숨결하고, 땀이 나도록 걷는 길에 나무그늘이 드리우는 빛하고, 이 멧골자락에서 뛰놀고 일하고 주눅들지만 다시 웃으면서 살림을 짓는 아이들 얼굴을 모두 어우르고 싶은 노래를 몇 남겼습니다.


  이원수 님이 살던 무렵에 “이 선생, 이 선생이 내 동시에 가락을 입혔다고 들었는데, 나도 다른 사람이 가락을 붙인 동요가 마음에 들지 않는데, 이 선생이 가락을 붙여 준 동요를 들려줄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고 합니다. 이오덕 님은 차마 부끄러워서 이원수 님 앞에서 ‘이오덕 작곡 이원수 동요’를 못 불렀다고 합니다. 1981년에 이원수 님이 눈을 감은 뒤에 “왜 예전에 부끄러워하며 못 불렀을까?” 하며 스스로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모든 사람은 먼저 마음으로 마주하는 사이입니다. 마음이 있기에 다리를 써서 다가가고, 다가오고, 서로 다닙니다. 다다가고 다가오기에 다다릅니다. 닿지요. 서로 닿아서 마음을 나누는 동안, 너와 나는 참으로 다르지만 닮은 줄 깨닫습니다. 서로 배울 대목을 새삼스레 마음에 담습니다. 즐겁게 나누고 배운 마음이 가득하면서 어느새 너와 나는 함께 들판을 달립니다. 새봄에 돋는 들딸기를 훑습니다. 손과 입에는 달달한 들딸기물이 듭니다.


  우리 손은 속에서 솟는 숨결을 담아서 무엇이든 새롭게 짓고 빚고 가꾸고 일구는 몸입니다. 속에 있듯 포근하다고 여겨 ‘솜’이라는 이름입니다. ‘손·속·솜’에다가 ‘소’까지 모두 같은 뿌리인 낱말입니다. 샘은 땅밑(깊은 안쪽인 속)에서 솟는 물입니다. 우리가 저마다 샘물로 마주하는 ‘샘님(선생님)’일 적에는 마음도 몸도 싱그러이 씻고 적시고 달래면서 어깨동무할 테지요.


  어느 틀(법)이 있기에 잘잘못을 다스리거나 이 땅을 지키지 않습니다. 아름나라에는 아무런 틀이 없습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라면, 아이를 안 낳더라도 둘레 뭇아이를 돌아보는 어른이라면, “아이 곁에서 살림하는 보금자리와 마을”에는 아무런 ‘틀’이 없이, 오직 ‘사랑’ 하나로 마주하면서 어울리는 줄 알게 마련입니다. 뛰어나거나 빈틈없는 틀(법)이란 없습니다. 모든 틀에는 틈이 있습니다. 틈이 있기에 틀이거든요. ‘틀’은 나쁘지도 좋지도 않습니다. 너와 나 사이에 바람이 드나들도록 틔우기에 틈입니다. 너와 나 사이에 마음이 오갈 만하도록 세우기에 틀입니다. 마음을 틔우고 생각을 틔우기에, 싹트고 움트듯 새롭게 씨앗이 깨어납니다.


  어떤 노래를 듣는 하루인지 생각할 일입니다. 그냥그냥 ‘가요(대중가요·민중가요)’에 얽매이는지, 아니면 스스로 노랫말과 노랫가락을 지어서 부르는 ‘틔움(싹틔움·씨앗틔움)’인지 생각할 노릇입니다. 말(노랫말)만 훌륭할 수 없는 노래이고, 가락(노랫가락)만 빼어날 수 없는 노래입니다. 둘이 하나로 어울릴 적에 비로소 노래입니다.


ㅍㄹㄴ


※ 글쓴이

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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